어메이징! 古都 익산…옛 숨결에 불어넣은 새 생명
발굴조사는 기록되지 않은 '선조의 삶'을 밝혀내는 것. 옛 도시의 풍경이 다양하게 간직되어온 곳도 있는 반면 대부분은 그 흔적만 남아있는 곳이 많다. 그러한 흔적을 찾는 과정이 발굴조사. 이를 통해 땅속에 묻힌 옛 모습들은 윤각을 드러낸다. 그러나 온전한 모습이라기보다는 파편의 형태로 나타날 뿐. 이러한 파편 조각들을 모아 새로운 생명을 불어 넣는 과정은 길고 지루한 시간을 필요하다. 마한·백제문화 도시 익산도 잊혀졌다가 다시 찾아진 도시 중 하나이다. 이제 익산은 긴 호흡으로 세계문화유산 도시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 마한의 도읍지, 익산
익산지역의 백제 역사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마한이다. 고조선의 준왕(準王)이 난을 피해 마한으로 피난했다는 기록을 통해 북방의 선진문화인 철기문화를 익산에 전래하여 익산에 문화적인 충격을 주었다는 것.
「동국통감」 마한조에 나와있는 '고조선이 위만에게 침탈을 당하고 궁인들을 거느리고 바닷길로 달아나 금마군(金馬郡)에 살면서 스스로 한왕(韓王)이라 칭했다'라는 구절을 살펴볼 때, 그 때보다 훨씬 후세의 지명이긴 하지만 금마군임을 지적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또한 고대 역사서 「제왕운기」 「동국여지승람」 등에서는 준왕이 정착한 지역을 지금의 익산으로 비정(比定)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금마가 준왕 도래 이전부터 고대 부족국가로서 굉장히 번창했던 국가 중 하나였기 때문에 준왕이 번창한 금마에 도읍 했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높여주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힘을 실어 주는 것이 발굴조사. 익산 영등동 유적, 익산 간촌리, 율촌리 등에서 발굴된 유적에서는 대체로 백제 무덤과는 차별성이 있는 마한의 무덤으로 밝혀져 아마도 마한세력의 성장이라든지, 마한문화와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 백제문화의 고도(古都), 익산
흔히 그렇듯이 백제의 역사와 문화를 이야기할 때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으레 공주나 부여를 관련지어 언급하곤 한다. 이에 반하여 익산은 불과 30여 년 전 197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이 지역이 한때 수도였다는 역사 사실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미륵산 남쪽 자락에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거대한 석탑 1기와 여기저기 흩어진 석재, 그리고 두 기의 당간지주조차도 옛날 어느 때인가 제법 큰 사찰이 자리하고 있었던 곳일 거라고 추정하기만 할 뿐, 이를 도읍과 연관 지어 생각해 보려는 견해도 거의 없었다.
그러나 30여년이 지난 2004년 '고도보존에 관한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함으로써 이제는 익산지역을 신라의 수도인 경주, 그리고 백제의 수도인 공주·부여와 더불어 옛 수도로서 특별히 보존되고 관리되어야 하는 '고도(古都)'로 인식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근래에 들어와서는 학술심포지엄을 주최하여 미륵사지와 왕궁리, 제석사지 등 익산지역에 산재돼 있는 백제사 관련 역사문화유산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시키기 위한 노력도 이어지고 있다. 한편 최근 미륵사지석탑에서는 국보급 유물들이 발굴되어 미륵사의 창건목적과 시주, 석탑의 건립연대를 밝혀주었고, 유리구슬 및 은제과대장식, 귀걸이 등은 백제시대 금속류 가공수법을 알 수 있는 미술사적으로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그러나 발견된 유물을 공개하면서 '서동요 허구론'이 급부상함으로써 익산의 정체성 혼란이 야기되기도 했다. 미륵사는 중앙과 동서의 세 가람이 합쳐진 형태의 아주 큰 사찰이다. 경주 황룡사지 보다 넓다. 한꺼번에 짓지 않고 20~30년에 걸쳐 지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이번에 유물이 발굴된 곳은 서탑인데 서쪽 가람은 백제 귀족의 딸인 후대 왕후가 짓고 중원은 선대 왕후인 선화공주가 세웠다는 가설도 가능하다. 이번 발굴조사는 미륵사 창건연대에 관한 삼국유사의 정확성을 입증했다는데 주안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
▲ 세계문화유산 도시로서 익산
익산지역의 유적지인 마룡지, 오금산, 쌍릉, 백제왕궁터, 왕궁리 5층석탑, 제석사지, 미륵사지와 미륵사지석탑, 당간지주, 익산토성, 미륵산성, 도토성, 낭산산성 등은 별개의 독립된 유적이 아닌 하나의 이야기에 묶여져 있다. 또한 유적의 보존상태도 비교적 좋은 편이다. 백제 왕궁터나 미륵사지를 발굴조사한 결과 지하에서 유적의 하부구조가 노출되어 유적의 배치를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유물이 수습되어 백제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배움터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익산지역은 이제 보여지는 도시가 아니라 읽어내야 하는 도시가 되었다. 한 도시의 궁극적인 발전기획이 그 도시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현재의 조건 속에서 결정된다면 그 도시의 기획에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모두 담겨야 한다. 좋은 본보기가 경주이다. 신라의 도시 경주는 2035년까지 장기플랜을 세워 신라왕경 재현으로 2000년 역사와 미래가 공존하면서 세계 속에 우뚝 서는 역사문화관광도시를 지향하고 있다.
익산에 산재되어 있는 마한·백제문화유산은 역사교육적 관광매력을 가지면서도 우리 역사를 중심으로 형성된 다양한 콘텐츠를 보유하고 있다. 이제 이러한 문화유산을 바탕으로 한 '역사문화도시는 이렇게 만든다'라는 기획이 필요한 때다. 구체적으로는 산재돼 있는 유적지를 하나로 묶어 관광매력을 높이는 방안, 문화유산 해설체계를 마련하여 전달력을 높이는 방안, 축제 프로그램과 콘텐츠를 구상하는 전략, 지속가능성을 배경으로 관광의 매력을 유지하고 지속화하기 위한 관리 방안들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런 준비과정들을 통해 세계문화유산 등재 여부도 결정될 것으로 생각한다.
/최우중 문화전문객원기자(전주역사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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