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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호의 클래식과 친해지기] ⑪정치와 클래식

왕의 권력은 음악으로부터 시작된다?…베토벤도 권력자 정치 홍보에 기여

클래식 음악은 순수 예술 세계를 추구하니 정치와는 동떨어져 있다?

 

아니다. 음악은 정치와 관계가 아주 깊었다. 권력자들은 자기 치적이나 목적하는 바를 음악을 통해 널리 알리고 싶어 했기 때문에 음악을 후원하기도 했지만 통제하기도 했다. 영국의 헨리 8세와 빅토리아 여왕, 프랑스의 루이 14세, 나폴레옹 1세, 오스트리아의 메테르니히, 소련의 스탈린 등 정치 권력자들은 음악을 자기 입맛에 맞게 깊게 관여하였다. 물론 음악에 조예가 깊은 이도 있었다. 정치와 클래식의 관계를 서너가지 예를 통해 살펴보자.

 

5살에 왕위를 계승한 루이 14세는 어린 시절의 어머니 섭정에 대한 반발로 성년이 되었을 때는 절대 권력을 강화했으며 그를 예술로 포장하였다. 스스로를 '태양왕'이라고 하며 태양신 아폴론과의 동일시를 표방한 것도 아폴론은 지성과 도덕, 율법의 보호자이기도 하지만 음악, 의료, 학문, 과학의 신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루이는 왕립아카데미를 세워 예술, 과학의 집중화를 꾀하고 그 아카데미에서 해당 분야를 지휘, 감독하게 하였다. 1669년 설립된 오페라 아카데미도 그 중 하나인 것이다.

 

루이 14세가 30여 년간이나 신임하던 음악가는 륄리였다. 장 밥티스트 륄리(Jeon-Baptiste Lully, 1632~1687 )는 이태리 피렌체 태생이지만 루이 14세의 돈독한 신임으로 프랑스 궁정 음악의 최고 관리자가 되었고, 막강한 권력을 누렸다. 루이 왕의 후원 하에 프랑스적인 오페라를 만들어 내기도 한 그는 오페라에서 왕의 치적을 칭송했다. 오페라는 극음악이기 때문에 그런 목적에는 아주 좋은 클래식 장르인 셈이다.

 

루이 13세는 궁정 악단으로 '왕의 24대의 바이올린'을 만들었었는데, 루이 14세는 아예 개인적인 용도로 현악기 18대로 구성된 '프티 비올롱(귀여운 바이올린 앙상블)'을 만들어 발레, 무도회, 식사 때의 배경음악, 여흥을 위한 음악을 연주하게 하였다. 이러한 앙상블을 '오케스트라'라고 했는데 오페라나 다양한 여흥을 위해 극장 무대 앞에 자리 잡고 있는 장소를 일컫는 의미였다. 륄리는 이 오케스트라를 연습시키면서 활 쓰기(Bowing)를 통일시켰고 장식음 사용도 조정하였는데 이런 방식이 이후에도 계속 오케스트라 연습의 정형이 되었다. 루이왕의 신임으로 권력자이기도 했던 륄리는 그의 의견에 반하는 음악가는 가차 없이 퇴출시켰으며, 오케스트라도 지휘봉 대신 지팡이로 지휘하며 왕의 절대 권력을 모방했다.

 

후원에 의존하지 않으며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오로지 예술혼만을 추구한 음악가로 세계 만인의 존경을 받는 베토벤! 그도 한 켠은 당시 오스트리아의 권력자 메테르니히의 환심을 얻고자 <영광의 순간> 이라는 곡을 작곡하였고, <레오폴트 2세를 위한 대관식 칸타타> <게르마니아> 등을 작곡하여 권력자의 정치 홍보에 기여하였다. 베토벤의 전기 작가 쉰들러에 의하면 베토벤은 그런 곡들이 잊혀지기를 바랬었다고 한다.

 

또 한 얘기. 나폴레옹이 1804년 스스로 황제가 되자 나폴레옹을 칭송하여 작곡했던 교향곡 3번(영웅 교향곡)의 표제에 썼던 '보나파르트'를 지워버렸다고 알려진 얘기. 그러나 베토벤은 그 해 8월 출판업자에게 보낸 편지에서 교향곡 제목이 '보나파르트'이었다고 했고 1809년 보나파르트가 참석한 빈 콘서트에서는 그 교향곡을 지휘했으며 1810년에는 미사곡 C장조(작품 86)를 나폴레옹에게 헌정하려고 했었다고 알려지고 있다. 자세한 내용을 어떻게 알 수 있으리. 사람이기에 실수는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누가 뭐래도 베토벤은 만인의 사랑을 받는 불멸의 대음악가인 것이다. 자유, 평등의 혁명적 이념을 전 유럽에 전파시킨 나폴레옹은 프랑스 오페라를 후원하였지만 동시에 파리에서 단지 세 극장에서만 오페라를 공연할 수 있도록 하며 그 오페라에서 본인의 치적을 홍보했던 것이다.

 

빈 고전파 시대의 절대음악(Absolute Music) 개념도 사실은 정치의 산물이다. 고전시대의 미학적인 개념, 절대음악의 중심은 당시의 강대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었고 제국은 오스트리아, 헝가리, 체코, 세르비아 들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게르만족, 마쟈르족, 슬라브족의 여러 민족이 한 나라 안에 공존했다. 따라서 민족적 경향의 음악은 자칫 독립정신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제국의 정치는 음악자체의 아름다움만을 추구하는 순수음악, 절대음악의 개념으로 유도하는 것이다. 제국의 수도 빈은 지리적으로도 동서남북 유럽의 교차점이었고 여러 민족들의 음악이 용해되어 하나가 되는 범-세계적인 음악, 즉 절대음악의 중심이었던 것이다. 정치가이자 외교관인 제국의 권력가 메테르니히는 제국의 정치이념을 클래식에도 투영한 것이다.

 

이탈리아 정치가 카불은 야당의 공세를 약화시키기 위해 오페라 작곡가로서 국민의 사랑을 듬뿍 받던 베르디에게 국회의원 출마를 권했고 카불을 존경하던 베르디는 권유를 받아들여 당선되었으니 베르디의 예는 클래식 음악가가 직접 정치에 참여한 예일까? 베르디는 의원직을 곧 그만 두었다니 그의 생리에는 정치가 안 맞았었나보다. 그러나 베르디는 이탈리아 통일에 큰 공헌을 했다. 이탈리아 애국자들에게 '비바 베르디!'라는 구호는 '이탈리아의 왕 비토리오 에마뉴엘 만세!(Viva Vittoria Emanuele Red'ltalia!)'의 첫 글자들을 조합한 의미 'Viva Verdi!'로 상징되어 도시국가로 나뉘어 응집력이 약했던 이탈리아가 한 국가로 통일되어 큰 힘을 갖는데 큰 공헌을 한 것이다.

 

모차르트, 마이어베어, 바그너, 엘가 등 정치와 관계되는 클래식을 얘기하자면 끝이 없다. 정치가 클래식 음악에 직접 관여하고 통제한 대표적인 예는 독일의 나치 정권과 소련의 스탈린 정권일 것이다. 글 몇 줄로는 도저히 살펴볼 수 없는 얘기들! 후일 기회 있으면 다시 이야기하기로 하겠다. 독일 음악학자 게오르그 크네플러가 "재능있는 위대한 음악가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정치적 흐름을 잘 간파했다."고 말한 것처럼 클래식 음악은 정치와 아주 가까운 것이다.

 

/신상호(전북대 음악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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