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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쓰는 전북 기업사] ②일제강점기

군산에 정미소·양조장 세워지고 익산엔 면화공장…도내 생산액서 정미업 85% 차지

일제강점기에 도내 전체 생산액에서 정미업이 85% 를 차지했다. 사진은 일제강점기 군산의 한 정미공장에서 근로자들이 작업하는 모습. (desk@jjan.kr)

개항과 함께 우리나라에도 자본주의가 서서히 들어왔다. 하지만 일본의 식민자본주의였다. 우리 재래식 공업은 일본의 식민지공업과 함께 발전해 왔다. 문제는 일본의 서구화된 공업생산경영과 달리 재래식공업은 자본과 기술이 부족하고, 기계시설도 갖추지 못해 여전히 수공업 상태였다는 점이다.

1910년에 들어서면서 공장제 기업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일본의 한국에 대한 식민지체제 기초공작 때문에 미미했다. 당시 일제는 방직물을 일본에서 수입했다. 국내에는 방직공장을 세우지 않고 조면공장을 세웠다. 조면을 일본으로 수출, 자국 방직공장에서 고부가가치 방직물을 생산한 뒤 우리나라에 수출해 거대 이익을 챙기는 데 주력했다.

이와관련 전북대 최낙필 교수는 저서 '지방경제의 이해'에서 "일본이 1910년 회사령을 공포한 것은 일본의 국내공업과 경쟁되는 근대공업의 건설을 억제하고 경쟁되지 않는 부분의 공업 건설에 한정하여 허가한다고 하는 정책적 의도가 깔려 있었던 것"이라며 "일본의 국내공업을 위한 식량·원료를 증산시키는 방향으로 자본을 유치하려고 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1910년대 우리나라에 들어온 일본 자본은 주로 은행, 상업, 운수, 농업 부문에 주로 투입됐다. 광공업 투자는 1차대전 수요에도 불구하고 미흡했다.

 

 

사진 위 개항당시 군산항 모습. 일제 강점기 군산항을 통한 수출액의 97%이상은 쌀이었다. 사진 아래는 1907년 군산 장미동에 세워진 장기18은행. (desk@jjan.kr)

 

 

그러나 점차 식민지 지배체제가 확립되고, 경제기초가 구축되면서 식량과 원료 확보를 위한 근대적인 공장제 공장 건설에 나섰다. 1910년 후반부터 공장건설이 현저히 많아졌지만, 몇개의 제련소와 제철소를 제외하면 대부분이 정미업과 섬유공업 부문의 공장들이었다.

1919년 공업 생산액은 농업 생산액의 18.2%에 불과했다. 공장의 반수 이상이 수공업적 기술에 의존한 영세공장이었고, 동력을 사용하는 공장은 10%에 불과했다.

▲ 1913년 조선면화 이리공장 가동

당시 전북의 공업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1899년 군산항 개항, 1912년 호남선과 군산선 등 철도 개통 등으로 사회간접시설이 갖춰졌지만, 전북의 공업은 군산과 이리, 전주를 중심으로 느리게 진행됐다.

군산의 경우 1899년 개항 후 1907년 십팔은행 군산지점 등 4개의 금융기관이 1920년까지 들어섰다. 군산항을 통한 수출입물량이 계속 늘어났기 때문이다. 군산항을 통한 수출액의 97% 이상은 쌀이었고, 쌀과 관계 있는 정미소와 양조장이 들어섰다.

1899년 5월 우에노 주조장, 10월 이와모토 주조장, 1909년 12월 향원 주조장, 1917년 10월 하나오카 정미소, 1919년 7월 조선 정미소(주), 1920년 10월 군산주조(주) 등이며, 규모는 미미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1911년 인구 4000명에 불과했던 익산시는 1912년 이후 크게 팽창, 1919년 무렵에는 인구 1만명에 달하는 소비도시로 발전했다.

1913년 일본인이 조면기 32대를 설치하고 운영한 조선면화 이리공장이 당시 이 지역의 유일한 공장이었다. 해방후 익산이 쌍방울과 태창으로 대표되는 방직공장의 중심지가 될 수 있었던 기반인 셈이다.

일제시대 당시에도 전북지방은 공업화에서 크게 뒤져 있었다.

1910∼1919년 당시 우리나라 제조업 성장률이 12.9%에 달했고, 1920년 무렵 우리나라 전 산업에서 제조업이 차지하는 비율이 17.3%였지만, 전북의 제조업 비율은 1%에도 못미쳤다. 1916년 당시 도내 전체인구의 87.7%가 농업과 축산, 임업 등에 종사했지만, 광공업 종사자는 1%에 불과할 만큼 공업화에서 뒤져 있었다.

▲ 전주 동양제사 종업원 500여명 달해

1920년대를 거쳐 1930년대로 들어서면서 농업이 62.1%로 줄어들고, 제조업이 25%로 증가했다. 연평균 성장률도 농업은 2.6%에 불과한 반면 제조업은 8.4%에 달했다. 1920년대를 거치면서 공업화가 급속히 진행된 것이다.

이 당시 전북지역도 많은 변화를 보였다. 1910년대에 6개의 공장이 세워진 반면 1920년대에는 9개 공장이 설립됐다. 1920년 군산주조(주), 1923년 미호제염소, 1924년 나가타정미소, 1926년 가모석험공장·마사키조선철공소, 1927년 나카오장유양조장, 1928년 오사와조선소·조선주조(주)지점, 1929년 린켄냉장고 등이 세워졌다. 1910년대에 비해 업종이 다양해졌고, 이같은 과정을 거친 군산의 1930년 인구는 3만4556명에 달했다.

익산도 교통요충지로서 공장 설립이 활발했으며, 1925년 인구가 1만3403명으로 불어날 만큼 발전했다. 1927년 당시 문화상회 등 34개의 중소 공장이 있었고, 이리주조, 이리소주, 전북소주도 가동됐다. 당시 익산의 주요 공산품은 생사, 양말, 철 주물, 죽세공품 등이었다.

전주도 1925년 인구가 2만3000명에 달할 만큼 성장했다. 전주에는 주로 잠업과 관련된 제사, 잠종, 잠구 공장이 들어섰다. 원료구입이 용이하고, 값싼 노동력을 쉽게 얻을 수 있는 경공업이 주를 이뤄 발전한 것. 1927년 전북제사(주) 전주공장이 설립됐다. 이 공장은 공장부지 4370평, 건평 1038평, 종업원 300명에 달했다. 또 1928년 편창제사방적주식회사 전주제사소(동양제사)가 설립됐는데 공장부지가 1만2000평에 달했고, 종업원도 500명에 달하는 대규모 시설이었다.

1921년 162개였던 도내 공장수는 1930년에 195개로 33개가 증가했다. 종업원 수도 3486명에서 5266명으로 늘어났다. 하지만 여전히 정미업이 주종을 이뤘고, 제지업과 주류제조업, 신문 인쇄업 등이 뒤를 이었다. 정미업은 전체 생산액의 85%를 차지했고, 주류 제조업은 2%, 기타는 1% 미만일 정도였다.

일제 침략전쟁이 산업구조에 영향을 미쳐 1930년대 전북의 공업도 변화를 보였다. 화학공업이 전체 산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1.2%였고, 기계·기구업과 가스·전기업 등이 확대되는 추세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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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호 jhkim@jj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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