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신력 높은 '백화' 이름으로 소주부터 포도주·위스키까지
1960년대 들어 식량난, 주세법 개정, 양곡을 원료로 하는 주류 제조 제한조치 등 어려운 경영환경 속에서도 대한양조는 월등한 품질을 앞세워 특급청주 시장을 휩쓸어 나갔다. 그러나 여전히 양곡을 원료로 하는 청주 제조에 대한 정부의 제동이 심했고, 합성청주 생산을 통해 특급청주 감산 부문의 경영상 리스크를 보완해야 했다. 정부는 식량난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양곡으로 술을 제조하는 방식에 부정적이었고, 그래서 쌀과 밀, 보리, 옥수수 등 곡류로 제조하는 청주와 증류식 소주에 대해 고율의 세율을 적용했다. 예를 들어 1961년 1월 개정된 주세법에 따르면 증류식 소주는 희석식 소주보다 세율이 3.6배 높았다. 정부는 식량난도 완화하고, 세금도 많이 거둬들이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두는 한편 법을 개정해 주정을 원료로 사용하는 합성청주와 희석식 소주 생산 쪽으로 유도하는 정책을 폈다.
이런 가운데 1963년 8월 양곡을 원료로 하는 청주 생산 중단 조치가 내려졌다. 이 때 대한양조는 희석식 소주 생산에 눈길을 돌렸다. 당시 희석식 소주 신규 제조면허는 취득할 수 없었기 때문에 1964년 3월 김제군 김제읍 신풍리에 대지 465평을 매입, 희석식 소주 제조장을 갖춘 다음 김제군 백구면 월봉리 소재 부용양조장의 희석식 소주 제조 면허를 양수했다.
▲ 희석식 소주시장 진출
대한양조가 '백화소주'상표를 내걸고 희석식 소주를 생산한 것은 1964년 6월25일이었고, 원료인 주정은 군산의 한국주정(주) 등으로부터 공급받았다. 주정 면허의 길도 자연스럽게 열렸다. 정부는 1964년 12월8일 공시한 양곡 소비 절약 지침을 통해 고구마를 원료로 한 증류식 소주 제조업자에게 주정면허를 부여했다. 또 이들이 희망하면 희석식 소주로 제조 종목을 바꿀 수 있도록 했고, 양곡을 원료로 하는 주정 및 증류식 소주 제조를 일체 금했다.
이 조치로 인해 희석식 소주의 판매가 급상승, 1965년 10만 2343ℓ, 1966년 12만 5736ℓ를 출고해 655만 5817원의 순이익을 달성했다. 또 김제 소주공장을 확장하고, 전주에 출장소를 개설했다.
대한양조는 또 희석식 소주와 합성청주 생산에 들어가는 '주정'을 직접 생산, 경영 효율을 높이기 위해 1966년 11월1일 자본금 4000만원을 투입해 주정 생산 법인 '백화산업주식회사'를 설립했다. 군산시 경암동의 대지 1600평과 건물 287평을 매입한 후 먼저 증류식 소주 제조 면허를 취득했다. 이어 가동 몇개월 후 증류식 소주 면허는 반납하고 주정 제조 면허를 취득하는 절차를 거쳤다.
하지만 희석식 소주 쪽으로 기운 정부정책에 따라 주정공장 설립이 잇따르면서 시설 과다현상이 나타났다. 1966년에만 9개가 설립되는 등 전국 주정공장이 25개에 달했고, 원료인 고구마의 절대량이 부족해지면서 주정공장 가동률이 떨어지는 문제도 나타났다.
대한양조는 소주 판매가 호조를 보이자 1967년 김제공장을 백화산업 설립 당시 매입한 백화산업 옆 군산시 대명동 5400평(후에 베리나인 공장)으로 이전했다.
이 당시 대한양조는 상호(대한양조)와 상표(백화) 통합을 추진, 소비자들에게 브랜드 이미지가 좋은 '백화'의 공신력을 높이 평가해 1967년 4월19일 상호를 백화양조주식회사로 변경했다.
▲ 상표·상호 백화로 통일
백화소주는 공장을 군산으로 이전, 계열사인 백화산업과 상호초자에서 각각 주정과 공병을 손쉽게 수급할 수 있었다. 판매도 급증했다. 군산으로 공장을 이전한 1967년 백화소주는 김제공장 시절의 15.5배에 달하는 1940㎘를 출고했다. 이어 1968년 2045㎘, 1969년 3820㎘, 1970년 5868㎘, 1971년 8014㎘ 등 급신장세를 보였다.
1971년 무렵 소주 생산 선두업체는 진로주조(점유율 21.8%)였고, 이어 삼학산업, 광림주조, 금복주, 무학주조, 대선주조, 삼학양조, 백화양조(4.3%) 등 8개사가 전체 소주 생산량의 65.7%를 점유했다.
당시 소주업체는 무려 254개에 달했다. 그러나 정부가 1970년 11월부터 소주 품질 향상과 세원 확보 용이 목적으로 업체 통폐합에 나서면서 2년 후 68개업체로 줄었다.
이 때 백화양조도 1973년 8월부터 전남 강진읍의 은하소주공사, 광주 삼천리주조장, 경남 진주소주 등의 주정 배정권을 흡수하고, 포항과 춘천, 청주, 여수, 제천, 인천, 목포, 진주, 홍성에 9개 출장소를 설치했다. 이 해 전국 판매망이 17개 출장소로 늘었다.
주정 배정권과 판매량이 늘어나면서 대량생산을 위한 자동화 설비도 서둘렀다. 1974년 4월에는 전자동 병 세척기, 전자동 타전기, 병 검사기, 상표 부착기 등을 설치했다. 이로써 백화소주는 연산 5만㎘ 소주 생산 능력을 갖췄고, 시장점유율도 9.9%로 치솟아 소주업계 2위가 됐다.
백화소주가 주정 배정권을 늘리는 것과 때를 같이 해 백화산업도 부실 주정공장 2개를 인수, 1일 주정생산 능력을 170드럼으로 확대했다. 이는 국내 14개 주정공장 중 4위였다. 전주의 서호주정은 152드럼, 이리의 보배는 100드럼 규모였다.
한편 백화양조는 1971년 1만3167㎘의 청주를 출고, 우리나라 청주 출고량의 63%를 차지했다. 전국 21개 청주 업체 중 명실공히 선두자리를 확고히 굳힌 것. 백화 뒤를 이어 삼학산업(2468㎘), 보해양조(1069㎘), 매화양조(758㎘), 삼학양조(602㎘), 백광양조(430㎘)를 출고했지만, 이들 5개 업체 총 출고량은 백화의 39%에 불과했다.
▲ 최초 국산양주 죠지 드레이크 인기 폭발
1970년대 정부는 주류 수입에 따른 외화낭비를 줄이기 위해 과실주 개발과 브랜디 위스키류의 국산화 정책을 펼쳤다. 또 우리 토산물인 인삼을 이용한 차와 치약, 담배 등 인삼제품의 개발 및 수출을 유도했다. 백화양조는 이같은 정부시책에 호응, 1972년 기타 재제주인 인삼주와 포도주 공장을 병설해 사업을 개시했다. 원액 20%에 주정 등을 가미한 제품이었다. 정부는 1972년 백화양조와 진로주조를 인삼주 수출업체로 지정했고, 백화양조는 그해 11월부터 인삼주와 포도주를 생산했다. 1973 회계연도(1972.10.1∼1973.9.30)에는 인삼주 0.7ℓ짜리 12만 4445병, 0.18ℓ들이 2만 6120병 등 총 9만 1813ℓ를 출고, 이의 48.7%인 4만 4726ℓ를 수출했다. 포도주는 총 5만474ℓ를 출고해 15.2%인 7680ℓ를 수출했다. '백화 고려 인삼주'의 첫 수출국은 홍콩이었다.
이어 1973년에는 위스키와 브랜디 원액을 혼합한 인삼주 개발을 추진, 정부로부터 수출 조건부로 브랜디 및 위스키 원액 수입을 허가받았고, 이어 '진셍 브랜디'와'진셍 위스키'를 생산해 수출했다. 1974년 회계연도에 60만 6000달러 어치를 미국에 수출했지만 기대에 못미치는 실적이었다. 그러나 동남아 시장에서는 인기를 끌어고, 인삼이 영약이라는 사실이 국제사회에 알려지면서 독일·프랑스 등 세계 22개국으로 수출됐다.
이 과정에서 백화양조는 국민소득 증가로 음주 기호가 고급화되는 추세를 반영, 양주 시장에 관심을 기울였다. 먼저 진셍 브랜디와 진셍 위스키의 국내 시판 허가를 받아 1974년 9월부터 판매에 들어가는 한편 새로운 국산 양주 개발에 주력했다.
백화양조의 첫 양주는 1975년 12월 31일부터 시판된 국내 최초 국산 양주 '죠지 드레이크'였다. 원액 함량 19.9%이 기타 재제주인 죠지 드레이크는 인삼을 첨가하지 않은 순수한 양주 스타일 위스키였으며, 처음부터 폭발적 인기 속에서 판매됐다. 베리나인 골드 탄생을 알리는 서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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