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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땅속서 사라져가 더 늦기전에 발굴을 - 조법종

조법종(우석대 사회교육과 교수)

 

 

조선왕조의 발상지 전주에 태조 이성계의 어진(초상)이 모셔진지 올해로 600주년이 되었다. 태종은 왕위에 오른지 10년이 되는 1410년 9월 28일에 부친의 어진을 모셨고, 그 어진은 전국토가 유린된 임진왜란의 참화속에서 조선왕조 실록과 함께 유일하게 지켜져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전주의 태조어진은 유일하게 1872년 그 당시까지 400여년동안 보존되면서 낡은 어진을 새롭게 그려 모신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즉, 1872년 정초에 고종은 서울 영희전에 모셔진 태조어진이 낡은 사실을 확인하고 전주 경기전의 어진과 함께 새로 어진을 그려 봉안하게 하였다. 그때 새로 그려진 신본어진은 1872년 9월 27일 전주에 모셔졌고 기존의 구본어진은 '세초매안(洗?埋安)'하여 경기전 뒤쪽에 묻게 하였다. 따라서 현재 경기전에 모셔진 태조어진은 1410년에 모신 어진이 아닌 1872년에 모신 신본어진이었다.

 

그런데 앞서 언급한 것처럼 태조어진의 신본을 모시는 과정에서 세초매안한 구본의 존재에 대한 의문이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다. 즉, 한자적 표현대로라면 이는 "비단에 그려진 초상을 물로 씻어 땅에 묻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최근의 관련 기록에는 어진을 "태워서 묻었다."는 내용으로 전해져 구본어진은 이미 사라진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어진을 태운다는 것은 당시의 법도에서는 상상키 어렵다는 입장에서 관련 기록을 검토해보니 이같은 오류는 1943년 일본인들이 만든 「전주부사」에서 시작되었음이 확인되었다. 즉,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화장풍습대로 구본어진을 땅에 태워묻었다고 서술하여 이후 이를 답습한 기록들에 의해 구본어진이 태워졌다고 굳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최근 1872년 어진을 새로 그려 전주로 봉안하고 구본과 신본을 교체한 모든 과정을 기록한 「어진이모도감청의궤」를 검토한 결과 이는 명백한 오류임이 밝혀졌다. 즉, 의궤에는 구본을 세초매안할때 구본어진을 "물로 씻어낸 후 겹쳐 접어" 백자항아리에 넣어 땅에 매립하였음을 기록하고 있다.

 

이 같은 사실을 바탕으로 최근 전주시에서는 문화재청에 구본어진 발굴을 신청하였다. 그러나 문화재위원들은 어진발굴에 대한 찬반토론까지 진행한 후 결국 발굴을 불허하는 입장으로 결론을 내렸다. 전해진 이유는 '신성하게 모셔야할 것'이란 의견이 조금 더 우세했다는 것이다. 물론 그같은 입장도 의미있고 존중되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구본 어진발굴은 지하에 묻힌 왕의 시신을 발굴하자는 것이 아니라 600여년의 역사를 증거하는 유일한 태조 어진의 원형을 후세에 길이 보존하기 위해 땅속에서 사라져가고 있는 어진을 보호하기 위한 최선의 방안으로 더 늦기전에 발굴하자는 것이었다. 현재 문화재위원회의 결정은 존중되어야 하지만 태조 어진을 600년동안 지켜온 전주의 보존노력과 어진관련 역사를 총괄적으로 유지 보존하기 위한 유일한 구본어진이 사라지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을 보다 직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태조어진 구본 발굴에 대한 문화재위원회의 입장과 결정은 재고되어 새롭게 논의가 진행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길 고대한다.

 

/조법종(우석대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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