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전 고대사 비밀 간직한 최초 석비
근래 역사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면서 우리의 고대사가 일부 조작되었다는 주장들이 학계에서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그 중에서도 낙랑시대의 유물로 알려진 점제현 신사비는 내용이 아닌 출토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우선 비는 점제현 신사비라고 알려져 있으나 염제현 신사비 혹은 점선현 신사비 등으로 지칭되기도 하며, 축약하여 점제비라고 일컫는다.
최초의 발견 경위에 대해서는, 일본인 고고학자 세키노 타다시(關野貞)와 역사학자 이마니시 류(今西龍)가 1913년 평안남도 용강군(현 온천군) 성현리 토성의 서남쪽 약 485m 지점의 밭에서 발견했다고 전해진다. (사진참조)
이것이 어떻게 그들에 의해 발견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현재 학계에서의 논쟁은 발견된 지점이 애초에 입비된 자리가 아니라 역사조작을 위해 한반도로 이치된 것이며, 원래는 중국 하북성 갈석산에 있던 것이라고 한다. 여러 연구 결과를 종합해 볼 때 이러한 주장은 충분한 정황적 근거와 과학적 분석을 토대로 하고 있어 설득력이 있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역사조작을 자행했을까. 조작설을 주장하는 연구자들에 따르면, 한나라가 고조선을 점령하고 그 영역 안에 사군(四郡)을 설치하였는데 이 비의 발견처가 바로 그 중 하나인 낙랑지역이라는 근거로 삼기 위한 것이라는 설명이다. 고조선의 활동무대를 대폭 축소함으로써 약소민족국가로 전락시키고자 한 것이다.
일부에서는 당시 중국 한나라에서 일종의 교화를 명분으로 문화를 외부에 전파하려는 의도가 다분하였는데, 그 증거로서 중원보다도 오히려 중국의 주변에서 역사적 증거들이 출토되고 있으며, 장제(章帝) 원화(元和) 2년(85)에 세워진 점제현 신사비도 이와 다름 아니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이처럼 점제현신사비는 우리 민족의 2000년 역사를 증명하는 중요한 역사적 산물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오늘날 이 시점에서 역사적 논쟁이 된 점제현신사비를 서예사적 입장에서 점검할 필요가 있다. 아직까지 정교한 비석의 사진과 탁본을 확보하지 못했지만 일본인들이 제시한 발견 당시의 사진과 중국의 고고학자 나진옥(羅振玉 : 1866~1940)의 낙관이 있는 희미한 탁본사진으로 볼 때, 중국 한대(漢代)의 비와는 상당히 다른 특이한 풍모를 보이고 있다. 종선으로 계선이 있고 정방형에 가까운 예서가 전서형 필의로 쓰여져 있다. 일부가 파손되어 현재 판독이 가능한 글자는 80여 자에 불과하지만 그 내용으로 보아 점제현과 관련이 있고 제사와 관련이 있다는 점에서 점제현 신사비로 명명하였다고 한다. 현존하는 탁본에는 '한점제평산신사비'라고 되어 있다. 서체면에서 볼 때 상당히 정제된 자형을 보이고 있으며, 이후에 보이는 광개토호태왕비와 같은 고예(古隸) 보다 단정한 느낌이 있다. 전서에서 예서로 이행되어 가는 과도기적 서체로 보아도 무방하며, 우리나라 초기 석비 형식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라 할 수 있다. 이후에도 서술하겠지만 당시 한나라의 고예와 대비가 되며, 한편으로는 고구려 광개토호태왕비와도 일맥 상통하는 점이 있다는 점에서 그 서예사적 의의는 자못 크다. 그것이 한의 역사 속에서 한의 문화를 대변한 것이 아니라 한의 문화를 수용한 우리의 심의식과 미의식을 우리 식으로 발현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후 역사적 주목을 받게 되는 광개토호태왕비와 동질성을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게 느껴진다.
/이은혁(한국서예문화연구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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