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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메아리] "그저 면장님께 맡깁니다" - 허소라

허소라(시인·군산대 명예교수)

 

주지하다시피 지금은 아들이나 손자세대로 대변되는 수평문화권 앞에 할아버지로 상징되는 수직문화권은 어쩔 수 없이 백기를 든 채 중원을 내준지 오래다. 따라서 그 옛날 우리가 자랑처럼 배달민족, 단일민족을 내 세울 때마다 서구인들이 킬킬대던 까닭도 이즈막에와선 알 듯하다.

 

그러나 꼼꼼히 들여다보면 하잘 것 없어보이는 할아버지문화의 질화로 속에서 아직도 꺼지지 않고 있는 불씨가 보인다. 그 어느 계층에서도 감히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애국가의 한 소절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처럼 온존하고 있는 그 불씨가 보인다. 우리는 항용 이를 전통이라 일컬어오고 있다. 그리하여 아무리 시대가 변해도 이 불씨만은 살려나가야 한다는 운동이 멀리서는 영국의 변경문화로부터 정신을 차리기 시작한 프랑스, 가까이는 이웃 일본이 이른바 '역 수직화' 라는 이름으로 자국 문화의 지평을 넓혀간 것이다.

 

각설하고, 우리도 나날이 좁혀지고 있는 이 지구 안에서 가장 한국적인 것이 무엇인지 그 불씨를 역 수직화의 밑천으로 삼지 않는다면 자칫 문화식민의 수렁으로 빠지고야 만다. 아마도 그 불씨 중의 하나가 마음만 먹으면 기어이 해내는 '상향의식(上向意識)' 이 아닌가 한다. 물론 세계 어느 민족엔들 이런 성취욕이 없으랴마는 유독 우리가 강한 것은 오랜 농경사회로부터 가족적으로 다져온 일개미정신 때문이다. '가족'이 뭉칠 때 가장 양질의 노동력이 창출된다. 서양에선 한 주든 하루든 계약이 끝나면 그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남의 집 품앗이를 가도 바로 자기집 일로 여긴다. 밤늦게라도 타작마당이 덜 끝나면 전깃줄을 끌어내어 기어이 끝내주고 씻는다.

 

우리가 경제적으로 힘들었던 저 6~70년대에 서독 광부와 간호사들이 그토록 환영받았던 것도 그들과는 달리 일터를 내 가정으로, 환자를 내 가족으로 여기고 최선을 다 했기 때문이다. 어찌 그뿐이랴, 우리 건설업체가 처음 중동지역에 진출했을 때 다른 나라에서 3개월 걸리는 다리공사를 우리가 밤을 새워 그 절반으로 공기를 줄이자, 감탄한 그들로부터 엄청난 공사 수주가 밀려오지 않았던가. 그 무렵 국내에선 구로공단의 여공들이 어느 설문지조사에 점심을 거른다는 응답이 60%가 넘게 나온 바가 있었는데 이 역시 시골에서 농사짓는 부모와 동생들의 학비 등 가족을 위한 희생정신 때문이었다.

 

어쩌다 자식이 면서기에 취직이라도 되면 두루마기를 입은 아버지가 자식을 앞세우고 면사무소를 향한다. 면장님을 뵙자 아버지는 연신 허리를 굽히며 "아직도 부족한게 많습니다. 그저 면장님께 맡깁니다. 모든 걸 가르쳐 주서요" 라고 극진히 인사를 올린다. 아버지의 이 허리굽힘은 자식의 직장이 단순히 월급타고 승진이나 하는 곳이 아닌, 또 하나의 가정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면장님 또한 단순한 직장의 상사라기보다 또하나의 가족 공동체의 어르신으로서 자식의 전인적(全人的)인격까지를 맡아주실 분으로 믿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 '상향 추구'에 있어 서구에선 다소 완만할지라도 '인격적,' '사회적', '경제적'지위를 균형있게 획득하려는데 반해 우리는 어느 한 지위를 얻기 위해서는 나머지 두 지위를 미련없이 팽개치는 경우가 허다했던 바 앞으로 이 시행착오를 극복하는 일이 과제로 남는다.

 

바야흐로 나라 안팎 그 어디를 보아도 난세라 할 수 있는 이 때, 그 옛날 가족중심의 끈끈한 상향의지가 다시 모아진다면, 거기에 부모처럼 우러르던 그 옛날 면장님의 '에헴!'이 이곳 저곳에서 다시 살아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 때에 「복종하고 싶은 복종은 자유보다 낫다」라고 한 만해 스님의 시구에도 우담바라가 피어날 것이다.

 

/허소라(시인·군산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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