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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혁의 글씨로 만나는 옛 글] (37)고구려의 상징 광개토호태왕비②

대내외적 위상·민족적 포용력이 '비문의 핵심'

광개토호태왕비 (desk@jjan.kr)

 

우리는 흔히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지 않고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라는 가정을 하며 역사를 추정한다. 여기에는 두 가지 견해가 내재해 있다. 하나는 외세의 힘을 빌어 삼국을 통일한 신라가 자주적 통일을 이루지 못했다는 아쉬움이고, 또 하나는 고구려에 대한 역사적 기대이다. 통일신라를 배워온 필자로서도 가끔 그런 담론을 하곤 하였다. 그러나 광개토호태왕비의 내용을 면밀히 검토해보면 고구려가 이미 5세기에 한반도의 삼국을 사실상 지배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비문의 내용 중에 '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라는 구절이 있다. 백잔과 신라는 옛날부터 고구려의 속민(屬民)으로서 조공을 바쳤다는 내용이다. 여기에서 백제를 백잔(百殘)이라 칭한 것은 「맹자」에서 이른바 "인(仁)을 해친 자를 일러 적(賊)이라 하고, 의(義)를 해친 자를 일러 잔(殘)이라 한다(賊仁者謂之賊, 賊義者謂之殘)"는 것에서 기인한다. 한반도 내에 존재하는 같은 민족임을 나타내는 일종의 동인의식을 강조한 표현일 것이다.(최영성 교수의 교시)

 

이처럼 고구려가 한반도를 사실상 지배하면서도 백제와 신라를 멸하지 않고 그들의 국가적 기반을 유지시킨 것은 역시 대제국 고구려다운 면모이다. 그러나 바다 건너에 존재하는 이민족 왜에 대해서는 분명하고 단호한 입장을 취하였다. 일본은 이처럼 숨길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을 아전인수격의 해석을 가하여 왜가 한반도 남부지역을 지배했다는 소위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며 이를 정당화하려 애썼다. 그렇게 된다면 20세기에 국치로 불리는 일제강점기 역시 정당성을 얻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구려 광개토호태왕비의 주체는 고구려이다. 비문 중 가장 문제가 되었던 곳은 비문의 신묘년 조이다. 잠시 여기에 소개하면 이렇다. '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破百殘□□新羅以爲臣民'. 비의 탁본을 연구하여 석문하고 해독하여 발표를 선점한 일본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잔과 신라를 파하고 신민(臣民)으로 삼았다"고 해석하였다. 역사적 사실과 맞지 않는 논리이지만 판독된 문자의 해독으로만 본다면 가능한 해석이다. 이에 대하여 재일사학자 이진희씨는 급기야 비문이 조작되었다고 발표하였고, 그 증거로 비문에 덧칠해진 석회를 지목하였다. 그러나 중국의 왕건군은 석회를 바른 것은 탁본을 깨끗하게 뜨기 위해 탁공들이 취한 조치이며 비문조작은 없었다는 반론을 제기하였다. 그때까지의 주요 쟁점은 일본인들의 비문조작 문제였다. 그러나 이후에는 비문의 조작문제보다 해석의 문제로 전환되었다. 즉 위의 문장에서 주어에 해당하는 '고구려'가 생략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그러할 경우 해석은 전혀 달라진다. 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신라를 파하고 신민으로 삼은 것이 아니라, "(고구려는) 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신라를 파하고 신민으로 삼으려 하므로"라고 해석하는 것이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고 문맥상 타당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물론 그동안 한중일에서 수많은 학자들이 이 기사에 대해 각자의 의견을 주장하였지만, 전체 비문의 핵심은 고구려의 대내외적 위상과 민족적 포용력이다. 비록 의를 해친 백제였지만 동일 민족이라는 사실만은 부정하지 않았다.

 

최근 류승국 교수는 100여 년의 논쟁을 검토한 연구를 발표하여 학계의 공감을 얻었는데, 그 역시 비문의 변조설을 주장하는 사람 중 하나이다. 아래에 신묘년 조에 대한 해석을 소개한다. "백제와 신라는 본시 고구려의 속민(屬民)으로서 옛적부터 조공을 바쳐 왔다. 왜가 신묘년 이래로 매양 바다를 건너 백잔(百殘)과 □□ 신라를 파(破)하여 신민(臣民)을 삼으려고 하므로, 그래서 영락 6년 병신년에 광개토대왕은 친히 수군(水軍)을 거느리고 왜적과 잔국(殘國 : 백제)을 토벌함에 고구려 광개토왕 군대가 왜적의 과구(소굴)에 이르러 공격하여 열 여덟 개의 성을 취하였다."

 

/이은혁(한국서예문화연구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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