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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혁의 글씨로 만나는 옛 글] (41)고대사 비밀을 간직한 광개토대왕호우

고구려 위상과 문화적 독자성 보여줘…볼모로 잡혀있다 신라로 환국하는 복호에게

광개토대왕호우 명문 (desk@jjan.kr)

1946년 경북 경주시 노서동 신라고분 140호에서 각종 철기와 토기, 용과 봉황의 무늬가 있는 대도(大刀)와 함께 작은 청동합 하나가 출토되었다. 청동합의 동그란 밑면에는 4자씩 4행으로 '乙卯年國岡上廣開土地好太王壺우十'이라는 글귀가 양각되어 있다. 비록 16자에 불과하지만 그 의미는 자못 크다. 첫째, 을묘년은 서기 415년으로 광개토대왕비가 제작된 이듬해에 해당한다. 그런데 고구려에서 제조된 것으로 보이는 청동합이 어떻게 신라지역의 고분에 묻혔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둘째, 왕의 시호를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이라 하였는데 이는 비문에서는 '國岡上廣開土平安好太王'이라 하고, 모두루묘지에서는 '國岡上大開土地好太聖王'이라 한 것과 비교된다. 의미상 큰 차이는 없지만 눈여겨볼 대목이다. 셋째, 마지막의 '十'이라는 숫자는 호우가 여러 개임을 추측하게 하는데 아직까지 추가로 발견된 것이 없다는 점이 이상하다. 넷째, 글자의 상단 여백에 '井'자 모양의 표시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최근 도교와 관련된 벽사(僻邪)의 상징이라는 연구가설이 제시되었으나 확실하지 않다. 이처럼 청동호우는 짧은 명문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의문을 내포하고 있다.

 

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이 명문의 윗 부분은 거의 나란히 맞추고 그로 인해 생기는 공간에 '井'자 모양을 표시하였으며, 아래 부분은 원형의 형태에 따라 높이를 달리하였다. 호우에 양각된 명문은 비문의 서체와 매우 흡사하며, 특이하게 쓰여진 '岡'자와 '開'자도 핍진하다. 이처럼 같은 시기의 석비와 청동에 새겨진 명문의 자형이 동일하다는 점에서 당시 고구려의 공식적인 서체라는 것을 추정할 수 있다. 이와 더불어 비문과 호우가 만들어진 시기는 중국의 동진시대에 해당하며 정교한 소해(小楷)와 유려한 행초서가 유행할 때라는 것을 상기한다면, 중국 문화에 동화되지 않은 독자적인 서풍이 이미 고구려에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의 상징으로 지칭되는 호태왕비나 신라에 전해진 청동호우는 고구려의 대외적 위상과 문화적 독자성을 보여주는 귀중한 유물이다.

 

호태왕비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사실상 한반도를 지배하고 있던 고구려는 당시 군사적으로 신라를 돕고 있었다. 고구려의 청동호우가 신라의 고분에 부장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으며, 거기에는 무슨 사연을 담겨 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김용준이 제기한 흥미로운 설이 있어 요약 소개한다. 명문의 을묘년은 장수왕 즉위 3년으로 신라 실성이사금(實聖泥師今) 즉위 14년에 해당한다. 이전에 대외견제의 일환으로 고구려가 신라에게 볼모를 요구하자 내물왕은 대서지(大西知)의 아들 실성을 고구려에 보냈다. 실성은 10년 만에 환국하여 왕위에 오른 뒤, 마치 보복하듯 10세 밖에 되지 않은 내물왕의 셋째 아들 미사흔(未斯欣)을 왜에 볼모로 보내고, 11년 뒤 다시 내물왕의 둘째 아들 복호(卜好)를 고구려에 보냈다. 이 해에 광개토대왕이 승하하였다. 고구려는 장수왕 2년(갑인)에 태왕의 능을 통구로 천장(遷葬)하고 광개토호태왕비를 세웠으며, 이듬해(을묘) 청동호우를 주조하였다. 실성은 또다시 내물왕의 첫째 왕자인 눌지를 고구려에 보내 죽이려 했으나 실패하고 도리어 그에게 시해되었다. 왕권을 잡은 눌지는 먼저 볼모로 간 두 동생을 구하고자 하였는데, 이를 자원한 박제상(朴堤上)의 도움으로 418년(장수왕 6년) 마침내 복호가 환국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로 미루어, 호우를 신라로 가져온 인물은 복호일 개연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호우가 발견된 무덤의 주인 역시 복호로 추정하고 있다.

 

당시의 대외적 관계로 볼 때 고구려는 대국이었으므로 7년 간 볼모로 잡혀있다 환국하는 복호에게 고구려를 각인시킬 수 있는 하나의 상징물로 하사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호우는 고구려왕의 시호가 새겨진 청동제기라는 점에서 다분히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호우는 비록 작지만 그 역사적 의미와 서예사적 가치는 이처럼 심대하다.

 

/이은혁(전주대학교 한문교육과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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