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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향에서] 그들 속의 목계

허미숙(전 CBS TV 본부장)

몇 해 전 고향에 있는 지인의 집무실에서 '목계(木鷄)'를 처음 봤다. 글자 그대로 나무로 만든 닭이다. 미동도 없이 늠름한 자세로 서 있는 그 수탉은 금방이라도 홰를 치며 숨을 쉴 듯 생생해 한참을 살펴본 기억이 난다. 짧은 기간에 규모의 기업을 일궈낸 그 젊은 경영자는 집무실에서 나무닭을 보며, 스스로의 혈기와 교만함을 경계했을 것이다. 장자(莊子) 달생편에 이 목계 이야기가 나온다.

 

주나라 임금 선왕은 닭싸움을 좋아했던 것 같다. 쓸 만한 투계 한 마리가 생기자 기성자라는 당대 제일의 조련사에게 최고의 싸움닭으로 키워달라고 부탁했다. 열흘이 지나 어떠냐고 묻자, 기성자는 고개를 저었다. "교만해서, 자기가 최고인 줄 알고 마구 덤비려고 합니다." 열흘 후 다시 물었다. "교만한 건 버렸지만 상대방의 소리나 그림자만 봐도 싸우려고 반응합니다." 열흘 후 왕이 또 물었다. "아직 아닙니다. 상대방을 노려보는 눈초리에 살기가 남아 있습니다." 열흘이 더 지난 다음에야 기성자가 대답했다. "이제 된 것 같습니다. 상대방이 아무리 소리를 지르고 덤벼도 반응이 없습니다. 마치 나무로 깎아놓은 '목계'같습니다. 이제 마음의 평정을 찾았습니다. 덕이 충만해서 그 모습만 봐도 싸우지 않고 도망갈 것입니다." 싸움닭인 투계가 싸우지 않고 상대를 제압하는 경지에 이른 것이다.

 

국내 굴지의 대기업을 창업자가 아들에게 목계의 故事를 예로 들며 '경청'과 '몰입'이라는 경영철학을 물려줬다는 얘기는 유명하다. 투계 조련사의 의견을 귀 기우려 듣고 네 번의 기회를 준 임금의 경청 리더십과, 여기에 호응해 목계라는 최고의 명작을 만들어낸 장인의 자발적인 몰입을 통하면, 기업은 최고의 성과물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핵심이다. 최근에는 사내 인트라넷 화면에 두뇌게임 '아나그램'을 띄워놓고 'L I S T E N' - 경청과, 이 단어를 재배열한 새로운 단어 만들기의 정답 'S I L E N T' - 침묵을 강조하며, 경쟁심을 초월하라고 말하고 있다.

 

고향집을 지키며 희수(喜壽)를 넘기신 둘째 형님이 요즘, 갑자기 아주 사소한 것에 마음의 평정이 흔들린다며 자기검열을 하신다. 어제도 텃밭을 다듬다가 채소에 약을 쳐야겠네, 혼잣말을 했더니 형부가 '거름을 줘야지, 알지도 못하고...' 한 것뿐인데, 그 말이 섭섭해 마슴에 잔물결이 지나간다고 웃으신다. 스무 살에 대청마루 넓은 댁 며느리로 시집간 형님은 시부모님과 외조모님을 함께 모시는 맏며느리로 살면서, 손아래 다섯 시동생과 당신의 여섯 자녀를 키워내며 57년을 현장 지휘관으로 사셨다. 내 기억으로는 그 얼굴에서 미소가 떠난 적이 없지만, 격변기를 사시며 대소가에 번다한 일이 많았던 생애를 짐작해보면, 고비마다 그 풍랑을 어떻게 그리 고요히 견뎠을까 싶어 물었더니, 마음속 깊은 곳에 싸움닭 한 마리가 살았단다. 그 많은 내전을 치르고도 이렇게 상처 없이 승자가 된 형님을 보면, 아마도 그가 평생 가슴에 키워온 것은 투계가 아니라 장자의 목계였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뛰어난 투계는 많지만 목계를 만나기가 쉽지 않은 세상이다. 쌈닭은 한쪽이 죽을 때까지 쪼고 뜯지만 결국 이긴 닭도 오래 살지는 못한다. 사리사욕을 위해 온갖 싸움의 기술을 가르치는 세상에서, 승패에 집착하지 않는 사람만이 무적의 강자이며, 무념무심이 최대의 무기라니, 칠순의 형님처럼 마음속에 목계 한 마리 키워낸 어른들의 지혜가 빛나는 가을이다.

 

/ 허미숙(전 CBS TV 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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