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주고 나를 얻은, 가장 큰 꽃
아직은 산이 그쳐 있군요. 바람이 많이 순해지긴 했지만, 나뭇가지에 꽃눈을 내비치긴 이른 때인가 봅니다. 하지만 산은 결코 서두르지 않습니다. 꽃이 오는 때를 아는 나무는, 애써 빈 가지를 채우려 하지 않는 법이니까요. 다만 때가 되면 가장 아끼는 꽃을 세상에 내어놓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래야 열매를 얻을 수 있을 테니까 말이지요.
나를 주고 나를 얻는 방법을, 자연은 이리도 잘 알고 있네요. 해서 자연은 병이 나지 않는가 봅니다. 설령 막힌 곳이 있어 병이 들었다 하여도, 스스로 치유하는 법을 아는 것이겠지요. 자연을 잘 들여다보면 수(數)가 보입니다. 이러할 수(數) 있는지, 저러할 수(數) 있는지, 상황에 대처할 수(數) 있는 지혜가 열립니다. 자연을 보고 지혜를 얻는 것, 그것이 바로 격물치지(格物致知)겠지요.
박광수 님이 엮은 「맘 놓고 병 좀 고치게 해주세요」란 책이 있습니다. 신의(神醫) 장병두 할아버지의 삶과 의술 이야기를 구술을 통해 담아놓은 책이지요. 장병두 할아버지는 모든 '앎'을 자연에서 얻습니다. '자연을 주시하고 관찰해서 그 이치와 원리를 알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연과 인간을 분리된 존재가 아닌 전체와 부분의 관계로 파악하는 거죠. 인간을 자연의 축소판으로 보고, 육경신(六庚申)이라고 하는 지독한 정신수련으로 깨달음을 얻어 환자를 대합니다. 자연을 알면 사람의 맥이야 저절로 짚어지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모든 병은 나로부터 나옵니다. 버리지 못한 나, 비우지 못한 나로 인해 몸이 아프고 삶이 낡아갑니다. 자신을 붙들고 스스로 병을 키우던 자신 안의 자신을 놓아야 건강한 자유를 얻을 수 있지요. 나를 바꿀 수 있는 큰 기운, 그것은 바로 내 안에 있습니다. 그 힘을 일깨워주는 것이 바로 의사가 할 몫이겠지요. 그러기에 장병두 할아버지는 사람을 대함에 있어 눈앞에 드러난 병을 보지 않고, 그 마음을 들여다봅니다. 미움이나 증오, 원망이 똬리를 틀고 있다면 고를 풀 듯 풀어 없애야만 비로소 새 삶을 살 수 있는 게지요. 즉 훌륭한 의사는 타인의 한을 잘 풀어주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동양의 공부란 언뜻 보아서는 알 수 없지만, 조용히 관조하면 보입니다.
'도가도(道可道) 비상도(非常道). 도를 도라 하면 이미 도가 아니'라고 합니다. 말로 표현될 수 있는 도는 도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오랫동안 등창을 앓으면서 기른 인내심을 바탕으로 진정한 인술(仁術)을 편 장병두 할아버지. 큰 병은 큰 약을 안고 있습니다. '남자는 등창에 죽고 여자는 발치(拔齒)에 죽는다'고 할 만큼 무거운 중병이 장병두 할아버지와 같은 신의를 내었으니 말입니다. 세상이 만들어놓은 틀 밖에서 얻은 지혜라, 틀 안에서는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지만 세상 사람들은 다 알고 있습니다. 진짜 의사가 누구인지를.
역(易)은 아는 것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실천으로써만이 진리를 알 수 있다 하였습니다. 장평두 할아버지는 나를 주고 나를 얻은, 가장 큰 꽃이 아닐까 합니다. 살면서 누구나 크고 작은 병 하나쯤 없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지초(芝草)와 같은 큰 꽃 한 송이 만나는 것으로 신묘년(辛卯年) 봄을 여는 것도 좋을 듯하군요. 그쳐 있으나 매일 조금씩 그 몸을 움직이고 있는 산처럼, 자연 속에서 내내 막혀 있던 수(數)를 찾을지도 모를 일이니까요.
▲ 김형미 시인은 부안 출생으로 2000년 전북일보 신춘문예와 2003년 문학사상 신인상으로 등단했으며, 지난해 첫 시집 「산 밖의 산으로 가는 길」을 펴냈고, '제6회 불꽃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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