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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명표의 전북 작고 문인을 찾아서] ⑦태양의 시인 김해강

조국 해방 열망하며 태양을 노래하다

해강 김대준(海剛 金大駿, 1903~1987)은 전주 출신의 시인이자 교육자였다. 그는 가친이 학감으로 재직하던 천도교단의 창동학교를 마치고 서울의 보성고보에 진학하였다. 당시 고모부 최린의 집에 기거하던 그는 명망가들이 자신의 책상을 가운데 두고 기미독립만세운동을 사전 협의하던 광경을 목도하고, 독립만세운동에 가담하였다가 일경의 피검을 피하여 귀향하였다. 그 사건으로 인해 상경하지 못한 그는 전주의 신흥학교와 전주사범학교를 마치고, 1925년 진안에서 교편을 잡으면서부터 신문 지상에 시를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마침내 그는 192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새날의 기원'이 당선되었고, 11월에는 「신문예」의 작품 공모에 시 '흰모래 위를 걷는 처녀의 마음'이 당선되었다. 또 부인의 이름으로 공모한 '문자보급가'가 1931년 조선일보에 당선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화려하게 문단에 등장한 그는 식민지 현실을 굵은 톤으로 비판하면서 일거에 중견시인으로 발돋움하였다. 당시 문단을 주도하던 카프가 그의 시를 주목하여 동반자작가의 반열에 편입한 사실이나, 당대의 평론가들이 고평한 사실들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는 이웃의 시인 김창술과 연배가 비슷하고 시적 성향이 유사하여 잘 어울렸다. 두 사람은 조국의 현실에 분노하면서 서로 도우며 전북 시단을 주도하였다. 김해강은 시편들을 활발히 발표하는 한편, 지역의 청년운동에도 힘을 기울였다. 천도교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천도교청년회 전주지회의 간부로 활동하면서 도내 전역을 순회하며 강연하였다.

 

1935년부터 그는 시전문지 「시건설」을 주재하였다. 중강진의 남인 김익부가 재정을 담당하고, 작품의 선고나 편집은 그가 맡았다. 이 잡지는 일제의 탄압으로 잡지 발간조차 순조롭지 못하던 시기에 유수 시인이나 신인들이 작품을 발표하는 장이었다. 훗날 대시인이 된 서정주가 자발적으로 투고할 정도로 이 잡지의 명성은 전국에 자자했다. 이 무렵 그는 김남인의 초청을 받아 금강산과 만주 일대를 여행하며 이국정조에 관심을 가지면서 서정적 경향의 작품을 쓰기 시작하였다.

 

김해강은 단적으로 말하여 '태양의 시인'이다. 그는 시단에 나온 후로 줄곧 식민지 상태의 해체를 노래하였다. 그의 웅건한 음성은 1920년대 시단에 유행하던 장시 형식으로 각종 지면을 장식하였다. 예를 들어 그의 시 '용광로'는 인간을 억압하는 모든 것들을 녹여버리자는 무정부주의적 사상을 시화한 작품이고, 시 '지주망'은 전국에 걸쳐 감시망을 친 일제의 잔악한 통치방식을 우유한 것이다. 시 '폭치시대'는 1920년대 말부터 식민지 도시인들을 감염시켰던 성적 타락을 폭로한 작품이고, '물레방아'는 일제에게 농작물을 수탈당하는 농민들의 애환을 담은 작품이다. 또 '오오 나의 옛 요람이어'는 전주의 화려한 과거를 회상한 작품이고, 한때 중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수록되었던 유명한 '가던 길 멈추고' 등은 금강산 8경을 노래한 서정시편이다. 이와 같이 그의 시가 거느리는 음역은 광활하다. 또 김해강은 '별나라'에 동요를 발표하였고, 1940년에는 전주에서 발행되던 동광신문에 소설 '장설라'와 '사랑의 여명' 등을 연재하기도 하였다.

 

해방이 되자 모교인 전주사범학교 교사로 자리를 잡은 그는 이병기를 도와 1947년 전라북도문화인연맹을 창설하는 등 도내의 문단을 바로세우는 일에 앞장섰다. 또 1959년에 그는 전주문학회를 해체하고 신석정 등과 문인의 집을 발족시켰다. 그리고 1962년에는 시력 60년 동안 한번도 고향을 떠나지 않고 도내의 문학 발전을 위해 헌신한 공로를 인정받아 회원들의 추대로 초대 예총 전라북도지부장을 맡았다.

 

김해강은 교육자로서 한국전쟁 중에 전주고등학교를 자리를 옮긴 후 정년퇴직할 때까지 재직하며 숱한 인재들을 길러냈다. 학생들과 교직원들은 1968년 퇴임하는 그를 향한 경의의 표시로 성금을 모아 시선집 「동방서곡」을 봉정하였다. 1984년 그는 제자 육기창의 도움으로 「기도하는 마음으로」를 발간하여 생전에 두 권의 시집을 갖게 되었다. 1930년 「기관차」를 발간하려다가 검열에 걸려 실패하고, 1942년 「동방서곡」과 「아름다운 태양」을 발간하려다가 좌절되었던 그의 바람이 제자들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이 밖에 그는 '전북의 노래'를 비롯하여 '전주시민의 노래'와 '춘향의 노래' 등을 작사하였다. 한때 초등학교 운동회 때마다 시끄럽게 들었던 "모교의 영예를 한 몸에 모아 / 당당히 출전한 우리 선수들"로 시작되는 응원가도 그의 작사에 황덕철이 곡을 붙인 것이다. 또 김해강은 도내 여러 각급학교의 교가를 작사해 주었다. 이 점은 그가 도내에서 존경받는 대시인이었던 사실을 단적으로 증거해준다.

 

생전에 조국의 해방을 열망하며 태양을 노래하던 김해강은 이상스럽게 그보다 못하고, 시대에 따라 신념도 없이 모호한 행적을 보인 시인들보다 각광받지 못한 편이다. 차라리 그가 남긴 족적이 너무 넓어서 접근하기 어렵다고 하는 게 정직할 텐데, 덕진공원에 시비만 덜렁 남아 시인의 위업을 증언하니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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