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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명표의 전북 작고 문인을 찾아서] ⑫한국 현대시의 정부, 서정주

그의 시속엔 태초의 언어가 살아있다

미당 서정주(未堂 徐廷柱·1915~2000)는 설명이 필요 없는 전북이 낳은 최고의 시인이다.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벽'이 당선되어 등단한 그는 그해 김광균, 김달진, 김동리, 함형수 등과 동인지 「시인부락」을 창간하고 주재하였다. 그가 만지거나 느끼는 것은 모두 시가 된다고 말할 정도로,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한국 현대시의 정부이다. 어떤 이는 그를 가리켜서 부족장이라고 하고, 누구는 그를 100년에 한 명 나올까말까 한 대시인이라고 추켜세운다. 한국의 시인치고 그를 사숙하지 않은 이가 없고, 한국인들 중에서 그의 시를 애송하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이니, 그는 죽어서도 국민들과 함께 살아 있다.

 

그는 고창 선운리에서 태어나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다가 줄포공립보통학교를 다녔다. 그는 상경하여 중앙고보에 보결생으로 입학하였다가, 1930년 광주학생독립운동 1주년 기념 시위를 주동한 혐의로 퇴학당하여 낙행하였다. 이후에 그는 고창고보에 편입했다가 자퇴한 뒤에 중앙불교전문학원마저 중퇴하였다. 그의 빈번한 자퇴 경력은 만주 유랑과 맞물려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라던 싯구를 고백으로 변모시킨다. 그는 방랑을 마치고 돌아온 뒤에 출판한 첫 시집 「화사집」에서 인간의 업죄와 관능을 노래하여 '한국의 보들레르'로 불리기 시작하였다. 이 시집에 묶여 있는 작품들이 저 유명한 '화사', '자화상', '문둥이' 등이니, 그는 시집 한 권으로 이미 한국시의 새로운 경지를 구축한 시인으로 우뚝 서게 되었다.

 

그가 해방 후에 펴낸 시집 「귀촉도」는 제목에서 암시된 바와 같이, 한국의 전통적 정서를 동양 사상과 결부시킨 작품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이 무렵에 잠시 그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문교부 초대 예술과장 자리를 물러나온 후, 평생 직장이었던 동국대학교로 자리를 옮겨 후진들을 양성하였다. 전쟁으로 인해 종군작가단에 배속된 그는 전주에서 잠간 머무는 동안에 전주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다. 그 뒤로 그와 전북은 별로 관련을 맺지 않았다가, 영면에 들어서야 어렸을 때 떠났던 향리로 돌아왔다.

 

그는 생전에 10여권의 시집을 출판하였다. 이러한 분량은 독자들이 그의 시세계에 마음 놓고 진입할 수 있을만한 양이다. 그 중에서도 '질마재신화'는 질박한 전라도 사투리가 낭창거리는 구어체와 결합하여 고유의 소리결과 빛깔을 빚어낸 절편들을 모은 시집이다. 그가 늙어서 노망하지 않으려고 세계의 산이름을 날마다 외운 일은 지금도 인구에 회자되지만, 그는 자신의 시를 낳아준 고향에게 마음의 빚을 갚고 싶어서 이 시집을 냈는지 모른다. 그가 노경에 접어들어 세계의 민화를 수집한 일도, 결국 어렸을 적의 처녀 선생님을 추억하며 좋아라고 웃는 모습과 진배없을 터이다. 이처럼 그는 늙으면 다 어린이가 된다는 속설을 시로 증언하였다.

 

그의 모습이 아름다운 것은 태초의 언어로 돌아왔다는 사실에 있다. 한 시인이 태를 묻고 성장하며 배운 모국어는 건조한 문어로서의 표준어가 아니라, 땀 냄새 나고 흙 묻은 구어로서의 사투리이다. 서정주는 죽음을 앞두고서야 자신이 구사한 언어들이 몸에 맞지 않는 낯선 언어인 줄 깨달았다. 혹자는 그의 언어적 귀향을 일러 천의무봉의 경지라고 예찬하지만, 그것은 과공이고 비례이다. 그는 노후에 고향어의 질감이 자신의 몸놀림을 제어하고, 자신의 시세계를 형성한 줄 안 것이다. 그로서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 안식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였으며, 마을 사람들이 그를 스스럼없이 맞아준 것도 언어적 동질감에 기반한 정서를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서정주는 한마디로 애증이 교차하는 시인이다. 그의 존재는 한국인들에게 곤혹과 당혹의 실체를 똑똑히 체험시켜주기에 충분하다. 시재상으로는 한국을 대표하는 시인이면서, 그는 친일과 군사독재정권에 협력하여 스스로 명예를 훼손하였다. 지금도 무수한 사람들이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기를 삼가는 이유도 거기에 있으니, 시인의 선택과 글쓰기가 얼마나 엄격해야 하고 동시대인들의 정서에 밀착되어야 하는지를 그는 알려준다. 그는 1992년 자신의 친일 행각을 인정하였으나, 이미 독자들은 등을 돌린 지 오래였다.

 

지금 서정주의 고향마을에는 미당 시문학관이 세워져 있다. 전국에서 몰려드는 독자들은 문학관의 전시물품에서 그의 체취를 느끼고, 바다가 보이는 산야에서 시심을 형성했던 그의 소년시절을 짐작할 수 있다. 비록 몸가짐이 일관하지 않았으나, 그는 전북이 낳은 한국 현대시의 수장이다. 해마다 그의 문학적 성과를 기리는 문학제가 열리는 문학관을 바라보며 그는 예의 버릇처럼 손등으로 입을 훔치며 너털웃음을 지을 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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