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신문학의 토대 구축한 선구자
우당 곽복산(牛堂 郭福山·1911~1971)은 소년운동가로 출발하여 신문학자로 변신하였다. 그는 목포에서 출생했으나, 부모를 잃고 다섯 살때부터 외가가 있는 김제에서 성장하였다. 그는 읍내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한 뒤, 사립 영신학교와 소성의숙에서 보통학교 과정을 수료하였다. 이어서 그는 통신강의록을 들으며 중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물리학교 예과에서 대학 입학 자격을 취득하였다. 그의 향학열은 계속되어 와세다대학 정경과를 2년 수료한 후에 조치(上智)대학 신문학과를 졸업하였다. 그는 학업을 마치고 귀국하여 동아일보 기자로 취직했다가, 매일신문 북경특파원으로 재직하던 중에 해방을 맞았다.
1945년 9월 곽복산은 임시정부 지지 국민대회준비회의 상임위원으로 활동하였고, 전주 출신 유엽과 함께 한국민주당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그는 동아일보, 한성일보 등에서 기자 생활을 계속하면서 조선어린이날 전국준비위원회의 준비위원으로 활동하여 소년운동의 부흥에 기여하였다. 그밖에 그는 기자 출신 경력과 전공을 활용하여 신문학의 발전을 위해 공을 쏟았다. 그는 1946년 12월 신문과학연구소를 창립하였고, 1947년에는 조선신문학원을 창설하여 대표로 취임하였다. 해방 후의 혼란기에 언론인을 양성하느라 양계장을 경영하던 그는 1959년 6월 한국신문학회를 창설하고 회장에 취임하였다. 한국 최초의 신문학 교수였던 그는 1954년 홍익대학교에 신문방송학교를 창설하고 교수로 취임하였다가 폐과되자, 중앙대학교에 같은 과를 신설하여 한국 신문학의 토대를 구축한 선구자이다.
비록 곽복산은 1930년대 이후 아동문학 작품의 발표를 중단하고 언론인과 학자로 활동하였으나, 그의 업적은 전북 지역의 아동문학과 한국아동문학사에 당당히 등재될 만큼 충분하다. 불과 열여섯 살에 신문사의 지국을 경영했던 그는 김제소년회의 집행위원으로 활동하던 중, 1927년 10월 김제소년독서회 창립총회에서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이듬해에는 김제소년회를 김제소년동맹으로 전환시키고, 전라북도연맹의 창립준비위원으로 위촉되었으며, 조선소년총연맹의 운영에도 깊숙이 관여하며 방정환 계열과 맞섰다. 그는 소년회, 동화회, 독서회 등을 지도하던 중에 필요한 독물이 부족하자 직접 작품의 생산 대열에 합류하였다. 그의 활약상은 한국의 아동문학의 형성 과정을 헤아리기에 충분한 단서이다. 그처럼 계몽담론의 세례를 받으며 성장한 소년운동가들이 독물의 창작 대열에 합류하면서 아동문학은 제도화된 것이다.
곽복산은 '꿈에라도'(조선일보, 1928. 1. 17)를 시작으로 약 15편의 동요와 동시를 발표하였다. 이 무렵 전주의 제사공장에 다니던 소녀들이 비인간적 처우와 저임금에 항의하기 위한 대책을 협의하던 중 경찰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다. 이처럼 심각한 사태는 소년운동가 곽복산에게 문학작품으로 수용하기를 유혹하고도 남았다. 하지만 그는 동요의 대상성이 지닌 특수한 조건을 뚜렷이 인식하고 문학의 본질적 요소를 저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현실적 상황을 수용했을 뿐이다. 그 대신에 곽복산은 동요에서 동시로 장르상의 변환을 도모하거나, 동화적 요소를 가미한 동화시를 써서 동요가 지닌 생리적 한계를 극복하였다. 그의 절제된 주제의식은 당시의 경제 상황에 비추어 보면 과도할 정도로 엄격하게 유지되었다.
일제에 의한 '토지조사사업'과 '산미증식계획'은 농도 전라북도를 피폐하게 만들어버렸다. 1929년 한 해에 전국적으로 발생한 389건의 소작쟁의 중에서 314건이 전북에서 일어났고, 1930년 현재 도내 농가 중에서 62.6%가 춘궁을 겪게 되었다. 이처럼 악화된 현실에서 운동가들은 지주에 대한 투쟁 등을 형상화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곽복산은 식민지의 원주민 아동들이 처한 물질적 조건과 문학적 형식을 조화시키느라 열심이었다. 그의 노력은 먹을 것을 찾아 떠도는 장애아의 일상을 묘사한 산문 '피리 부는 불구 소년'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이 글에서 소년을 외면하는 기성세대의 타락한 모습에 대한 객관적 기술에 치중했을 뿐이다. 또 곽복산은 동화 '새파란 안경'에서 모든 사람들이 열심히 일하는 평등한 세상을 꿈꾸었다. 이 작품에서도 그는 물욕에 눈먼 부자가 파멸보다는, 가난한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이 아름다운 줄 깨닫는데 초점을 맞추었다.
그의 태도가 중요한 까닭은 막 모습을 갖추어 가기 시작한 아동문학의 형식적 측면들이 외부 요인에 억압되는 것을 예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그의 문학 활동은 여느 소년운동가들의 작품과 확실히 구분된다. 그의 노력은 초창기 아동문단의 물적 토대를 윤택하게 하는데 공헌한 것은 물론, 다양한 경향의 작품들이 생산될 수 있는 거점으로 작용했다는 점에서 유의미하다. 설령 그가 해방 후에 신문학을 발전시키느라 문학 활동과 거리를 두어 생전에 한 권의 작품집도 펴내지 않았을지라도, 동요와 동화 등은 전라북도 아동문단의 초석으로 놓여 있다. 그러므로 곽복산의 작품들은 전북아동문학사를 서술하는데 유효한 자료인 동시에, 한국 소년운동과 아동문학의 긴밀한 상관관계를 살피기에 적합한 텍스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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