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문학 가치 재평가한 한국 문단의 큰별
눌인 김환태(訥人 金煥泰·1909~1944)는 무주 출신의 비평가이다. 그는 전주 보통학교를 마친 뒤에 상경하여 시인 김상용이 재직하던 보성고보에 진학하였다. 그는 1928년 일본으로 유학하여 쿄토의 도시샤대학 예과에 입학하여 정지용을 만났다. 그후에 후쿠오카의 쿠슈제국대학 영문과에 편입하여 메슈 아놀드와 월터 페이터에 관한 논문을 쓰고 졸업했다. 귀국해서 이광수와 안창호 등으로부터 지도를 받았다. 특히 안창호와의 친교로 인해 그는 일경의 감시를 받게 되어 경찰서에 수감되기도 하였다. 1936년 그는 박팔양, 김상용, 정지용, 이태준, 김기림, 박태원 등 당대의 쟁쟁한 작가들이 모인 구인회에 가입하였다. 이 해 6월 그는 '시문학'을 주재하던 광주 출신 시인 박용철의 누이 박봉자와 혼례를 올렸다. 김환태는 1938년 황해도 재령의 명신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가 1943년 11월 무학여중으로 근무지를 변경하면서 상경하였다.
그의 움직임을 눈여겨 살펴보노라면, 한 비평가의 행로에서 차지하는 인연의 중요성과 역할을 짐작케 해준다. 김환태가 맺은 인연은 개인적 차원에 머물지 않고, 문학적 관점을 형성하는데 큰 계기를 제공하였다. 그가 나중에 김상용이나 정지용에 관한 평문을 쓴 것을 일러 개인사적 친분의 결과라고 각하할 수 있으나, 평문에 나타난 세련된 감각과 유려한 필치는 비평의 수준을 한 단계 올려놓기에 충분하였다. 그가 주류 비평가의 반열에 올라설 수 있었던 것은 명문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사실과 함께 천부적으로 뛰어난 감수성을 살린 비평적 인식안에 힘입은 것이다. 그를 가리켜 '한국 비평문학의 효시'라거나 '순수문학의 기수'라고 칭하는 이유인즉 김환태의 비평에 아로새겨진 문학적 안목과 예리한 작품 분석 능력을 높이 샀기 때문이다.
그는 1934년 최초의 평문 '문예비평가의 태도에 대하여'를 발표하면서 문학의 순수성을 벼리로 삼은 비평적 신념을 드러내었다. 그는 문예비평을 "작품에서 예술적 의의와 심미적 효과를 획득하기 위하여 대상을 실제로 있는 그대로 보려는 인간 정신의 노력"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비평가는 "작품의 예술적 의의와 딴 성질과의 혼동에서 기인하는 모든 편견을 버리고, 순수히 작품 그것에서 얻은 인상과 감동을 충실히 표현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비평적 특징을 온전히 서술한 이 구절은 일제의 지속적인 탄압으로 카프 비평가들이 퇴각하여 공란 상태이던 비평계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그는 문학작품의 이해와 평가에서 '몰이해적 관심'으로 접근하기를 바라면서, 비평가는 누구보다도 먼저 문학 작품에 감동하고 표현하는 예술가라고 거듭 강조하였다.
이 시기에 김환태가 전대의 공리주의적 문학관을 배격하며 주창한 바는 예술의 순수성에 입각한 인상주의 비평이었다. 그의 등장으로 카프에 억눌려 열세에 놓여 있던 반카프 진영의 평단은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그는 문학의 자율성을 옹호하면서 특히 시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언어의 감각적 측면이 강렬하게 드러나는 시에 굉장한 관심을 보였다. 그가 정지용의 시에 편애에 가까운 애정을 보인 것도 그로부터 발원한 것이다. 이처럼 문학의 순수한 국면을 중시했던 그는 평소에도 공허한 관념이나 경직된 태도를 멀리 하였다. 그가 서울에서 할일 없이 노는 동안에 만나 평생지기로 삼았던 비평가 이헌구는 "지극히 낮고도 부드러운 음성과 웃을 때마다 유난히 하얗게 빛나는 고르고 고운 이빨, 크게 웃지도 않고 조용히 소리 없이 포개지는 작약처럼 수줍게 미소짓던 그 모습"을 추억한 것만 보아도, 김환태의 비평적 태도와 삶이 둘이 아닌 줄 알 수 있다. 요약하여 말하자면, 그는 문학 작품에 대한 비평가의 지극한 애정을 수시로 강조하였다. 모름지기 비평가는 작품 외적 요인에 압도당하지 말고, 자신의 고유한 안목에 의거하여 작품을 읽고 해석하여야 한다는 말이다. 그의 등장으로 평단은 문학의 형식적 요소를 포함한 본질적 논의를 진행할 수 있는 세력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문단의 바람과는 상관없이 시대 상황은 악화되어 전 부면에서 일제의 군국주의화가 심각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일제의 작가들에 대한 계속적인 압박은 더욱 강도가 높아지고 횟수가 늘어갔다. 그처럼 비문학적인 상황에 내몰린 김환태는 비평 대신에 절필하고 낙향을 선택하였다.
그는 끝내 지병이었던 폐결핵을 이기지 못하고 한창 활동할 서른 다섯의 나이에 생을 마치었다. 덕유산국립공원의 나제통문 앞에는 김환태문학비가 우뚝 솟아서 오가는 이들의 발길을 맞고 있으며, 2010년에는 고향의 유지들이 탄생 100주년 기념 문학제를 열어 그의 비평세계를 기리었다. 또 문학비를 앞장서 세운 문학사상사에서는 '김환태평론문학상'을 제정하고, 일년 동안 가장 활발히 활동한 비평가를 선발하여 그의 비평정신을 잇도록 격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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