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평문 발표, 비평가로서의 명성
절산 윤규섭(節山 尹圭涉·1909~?)은 남원 운봉 출신의 비평가이다. 그는 1930년 전주고보에 다니던 중에 신간회 전북지부의 간부였던 이명수의 지시에 의해 전주여고보의 임부득, 전주농림학교의 양판권 등과 동맹휴학을 주동하였다. 그들은 전주시내 여학생 중심의 비밀결사체를 조직하고 창간호'뉴쓰' 를 등사하여 전국의 여자 중등학교에 발송하려고 모의했으며, 그 해 7월 전주교육회가 주최한 음악회에서 '식민지 노예교육 철폐' 등의 문구를 담은 격문을 배포하다가 발각되었다. 윤규섭은 이 사건의 배후자로 지목되어 검거되었는데, 마침 서울에서 발생한 고려공산당 사건과 연루된 혐의가 가중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는 치안유지법과 출판법 위반 등의 혐의로 기소되어 2년형을 언도받고 복역하였다.
출소한 뒤에 윤규섭은 서울 출신의 규수와 혼인하고, 1937년 '문단 항변'을 발표하면서 비평에 뛰어들었다. 그는 이후부터 평단의 각종 논의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였다. 특히 외국문학 전공자들에 의해 주도되던 이 시기의 평단에서 그의 평문은 국내파 비평가의 수준을 보여주기에 충분하였다. 식민지시대 그의 비평적 궤적은 '휴머니즘론 비판 - 제3의 논리 비판 - 주체재건론 비판' 등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흐름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주요 논쟁에 참여하여 비평적 견해를 표명하는 순발력을 보여주었고, 당대의 유수한 비평가들과 논전을 서슴지 않는 투지를 드러냈다. 또한 그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물론이고, '문장'과 '인문평론' 등 주요 지면을 통해 다양한 평문들을 발표하면서 비평가로서의 명성을 다졌다. 이러한 논의를 통해 그는 비평의 논리를 체계화하였고, 선배 비평가들에게 결코 지지 않는 내공을 쌓으며 후일을 도모하였다.
윤규섭의 비평은 계급주의적 시각을 바탕으로 전개된 것은 확실하지만, 사회주의 사상이 뚜렷하게 검출되지 않는다. 이러한 움직임은 그와 운동단체의 관련상이 드러나지 않은 사실에서도 확인 가능하다. 아마 그가 일제의 요시찰 인물로 낙인된 탓에 의도적으로 사상적 탄압의 단서가 될만한 빌미를 제공하지 않았는지 모른다. 그의 비평은 당대의 평단에서 문제적 평론으로 거론되는 작품에 초점을 맞추어 진행되었다. 그것은 아주 민첩한 대응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그가 발표한 평문들은 부지런한 읽기와 사유의 소산으로 제출된 것이다. 더욱이 전환기에 속하는 이 시기의 평문들은 일정한 전망을 포함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윤규섭은 시대적 특수성을 충분히 고려하여 태작에 대한 과감한 각하와 수작에 대한 애정을 표한 것이다. 그의 비평적 대응력은 카프의 해소와 일제의 지속적인 감시로 위축 상태에 놓였던 평단에서 기민한 축에 든다.
그와 견줄만한 비평가로 무주 출신의 김환태가 있다. 둘은 동시대에 활동한 비평가였다. 그들의 활동상 중에서 흥미로운 점은 김환태가 순수문학을 옹호하는 평문들을 발표하며 그와 대척점에 서 있었으나, 양인은 비평적 대립각을 노출하지 않았다. 또 연희전문 출신의 윤규섭이 경성제대 출신의 실력자 최재서의 총애를 받은데 비해, 큐슈제대 출신의 김환태는 김기림을 비롯한 일본 유학파들의 후원을 등에 업었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비평적 입점부터 판이한 극단의 두 비평가였으나, 동향 출신이란 점을 의식했던지 그들은 논쟁의 당사자로 한번도 맞서지 않았다. 두 비평가의 존재로 인해 1930년대 후반부터 평단은 전북 출신의 왕성한 활동 무대였다. 그들의 선구적 비평에 힘입어 전라북도의 평단은 형성된 것이다.
해방 후에 윤규섭은 임화가 주도하는 문단 조직에 반대하는 편에 섰다. 그의 선택은 일제시대에 임화를 비판하던 연장선상에서 단행된 것이었고, 전가족을 이끌고 월북한 후에도 계속되었다. 그는 북한에서 윤세평(尹世平)이라는 필명으로 활동하였다. 주로 그는 고전문학 연구에 공을 쏟아서 '문학 이론화 작업과 고전의 윤색 주해 작업을 통해 북한 민족문학의 기틀을 마련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가 고전문학의 체계화에 전력할 수 있었던 것은, 해방 전에 전주의 고서점에서 완판본을 대거 입수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가 월북하면서 싣고 간 완판본 자료들은 남한에서의 연구를 저해할 정도로 상당한 분량을 차지하였다. 북한 고전문학 연구의 초석을 닦은 그는 김일성대학에서 문학 강좌장을 맡을 정도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1962년 7월 천세봉에게 쓴 편지를 끝으로 문단에서 윤규섭의 이름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이 무렵은 북한의 평단에 해방 후 세대가 본격적으로 등장하여 판도를 장악한 시기였다. 그 후 황해도의 귀순자 농장으로 그가 숙청된 것으로 알려졌을 뿐, 그외의 개인사적 근황은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은 실정이다. 이로써 그는 남북한의 비평사에서 매몰되어 연구의 대상에서 누락되기에 이르렀다. 북한 연구자들에 의해 드물게나마 그의 이름이 거론되고 있지만, 정작 중요한 비평 활동이나 업적은 언급되지 않고 있다. 윤규섭의 비평세계가 온전한 모습을 드러내기까지에는 시일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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