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진 농촌 공동체의 윤리에 고뇌
우관 이근영(牛觀 李根榮·1909~?)은 옥구 임피 출신의 소설가이다. 그는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어머니는 자식 교육에 높은 관심을 지녀 아들이 함라의 소학교를 마치자, 상경을 감행하여 아들의 뒷바라지에 매달렸다. 그의 어머니는 가난한 형편을 고려하여 장남을 큰집에 양자로 보낼 정도였으며, 이근영의 학비를 마련하고자 친척집에서 침노일 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 역시 그 집에서 가정교사로 일하면서 중동중학을 다니다가 보성전문학교 법학부에 입학하였다. 그는 재학 중에 숙명여전에 다니던 김창열과 장안이 떠들썩하게 연애하다가 결혼하였다. 1934년 대학을 마친 이근영은 동아일보사에 입사하여 언론인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딛었다.
그는 생전에 소설을 비롯하여 수필, 동화, 평론 등의 여러 갈래에 걸쳐 작품을 남겼다. 1935년 '신가정' 10월호에 그는 소설 '금송아지'를 발표하면서 대략 40년에 가까운 작품 활동에 나섰다. 이 작품은 당시에 사회적으로 크게 문제되었던 신여성들의 허영심리를 포착한 단편이다. 그는 식민자본주의의 이식으로 물신화되어 가는 세태를 묘사하면서도 인간의 보편적 윤리를 작품의 저변에 깔고 있다. 말하자면 그는 사회의 부정적 단면을 소설화하면서도, 인간에 대한 신뢰를 저버리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그의 작품 세계에 두드러지는 바 그로 하여금 작가적 양심에 입각하여 식민지의 농촌 현실을 응시하는 심급으로 작동하였다. 그의 소설적 평가들이 대부분 긍정적 입장에 치우치는 까닭도, 따지고 보면 그의 치열한 사회의식과 남다른 작가의식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근영의 '최고집 선생'은 청빈을 생활 덕목으로 삼은 최하원 영감의 얘기이다. 동네에 소문난 가난뱅이 외골수 최 영감은 전통적인 지식인에 속한다. 그는 면장 따위의 감투도 마다한 채 농사를 지으며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큰아들이 지주의 첩과 바람을 피우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에 그는 얼굴을 들 수 없는 수치심에 고향땅을 떠난다. 그의 만주행은 실낱같은 벼리조차 지켜낼 수 없는 지식인의 나약한 모습을 초래한 가난의 결과이다. 이근영은 일제의 농지 수탈이 농민들에게 궁핍을 강요한 데 그친 것이 아니라, 최소한도의 윤리마저 훼손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이처럼 그는 자신의 소설들을 논의하기 수월하게 농민문학의 범주에 묶어버리는 연구자들의 편의주의적 속성을 나무란다. 그처럼 식민지 사회의 자잘한 모순까지 행간에 마련해 둔 작가를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그의 다른 소설 중에서 이채로운 작품은 '소년'이다. 그는 이 작품에서 바이올린에 천재적 소질을 가진 한 소년을 다루었다. 소년은 인력거를 끌고 직공 노릇을 하면서도 예술적 성공을 이루기 위한 꿈을 갖고 있다. 그는 회사가 자본을 앞세워 회유하자 단호하게 거절한다. 이근영은 소년의 과단성 있는 거부 의사를 통해서 식민자본주의의 폐해가 예술적 꿈까지 파멸시키고 있는 비극적 현실과 자본의 도움이 없다면 소중한 희망조차 철회하지 않으면 안 되는 개인의 허약한 상황을 드러내었다. 이러한 모습은 그의 작가적 책임감이 예정한 결과이다. 그의 주제의식은 포악하고 교묘한 일제의 기만적인 술책에 여지없이 무너져가던 당대의 예술가들을 향한 날선 꾸짖음이었고, 미국에 자신이 직면할지도 모를 절망감과 패배주의로부터 스스로를 지켜내기 위한 소설적 결의였다.
이와 같이 이근영 소설의 근저에는 도저한 윤리의식이 흐르고 있다. 그 점을 앞서 알아차린 평자들은 그의 작품을 함부로 재단하지 않는다. 그는 한국문학사에 무수한 농민작가들처럼 농촌 현실이나 소박한 농민들의 심리를 그리는데 만족한 작가가 결코 아니다. 그 점은 그가 '고향사람들'에서 일제의 토지 수탈과 그로 인한 이농현상을 서술하면서도, 결말부에서 농민들끼리 장래를 걱정하는 대목을 준비한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일제의 간교한 이간과 흉포한 억압이 지속될지라도, 민족간에 염려하며 다독거리는 한 광복은 멀지 않았다는 것이다. 작가는 이처럼 하찮아서 가장 잊어버리기 쉬운 대동의 실천을 강조한 셈이다. 그 작은 덕목은 식민지 말기가 가까울수록 작가나 독자에게 공히 요구되는 것이었다.
1941년 이근영은 영창서관에서 단편집 '고향 사람들'을 펴냈다. 이 작품집은 그가 월북하기 전에 낸 것이어서 전작품을 수록한 것이 아니다. 아직까지 그의 전집이 발간되지 못한 이유 중에서 그가 전쟁 통에 가족들을 데리고 월북한 탓이 크다. 그는 해방 후에 조선문학가동맹의 농민문학위원회 사무장을 맡았으며, '해방일보' 기자로 재직하였다. 그는 북한에서 활발히 작품을 발표한 것으로 보이나, 1973년 이후의 행적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북한 연구자들은 그가 1990년대 중반에 사망한 것으로 단정하고 있지만, 북한에서의 활동상과 함께 그조차 확실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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