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실한 애향정신, 후배 작가들 문학욕 고취
하희주(河喜珠·1925~2004)는 전주 아중리에서 태어난 시인이다. 그는 상생소학교를 마치고, 해방되던 해에 5년제 전주북중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는 재학 중에 동급생들과 한글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투옥되어 한 해 더 학교를 다녔다. 곧바로 전주우체국에 취직한 그는 1947년까지 사무를 보았다. 그러나 적성에 맞지 않았던지 그는 그해 12월 국민학교 교사 자격시험에 합격하고 나서 동국대 불교학과에 입학하였다. 문학을 공부하고 싶었으나, 당시 국문학과가 설치되지 않은 탓에 진학한 것이다. 그로 인해서 그는 공부에 취미를 붙이지 못하고 이듬해에 중퇴하고 말았다.
1948년 모교인 전주북중학교 교사로 부임한 그는 1951년에 전주고로 전임하였다. 잠시 그는 김제여고로 전출하였다가 모교로 되돌아왔다. 전쟁 중에 후퇴하여 전주고등학교에 재직한 서정주와의 인연으로 그는 1955년 '현대문학'의 시 부문에서 추천을 받았다. 그는 3회 추천 제도가 대세였던 등단 제도에 따라 1958년 1월에 추천을 완료하고 시인으로 데뷔했다. 이어서 고향을 떠나 서울의 중앙고등학교로 전임하게 되어 가족을 이끌고 상경하게 됐다. 국어교사로 충실하게 근무하던 그에게 처자식뿐 아니라 동생들까지 부양할 책임이 늘어났다. 이에 그는 규칙적인 생활이 보장되나 봉급이 적은 학교를 그만두고 입시학원 강사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의 고전문학 강의는 학원가뿐 아니라 학생들의 입소문을 타고 널리 알려지게 되어 최고 대우를 받는 유명강사가 되었다.
1977년 하희주는 학원에서 물러난 뒤, 여생을 보람 있게 지냈다. 우선 그는 소유하고 있던 강남 논현동 사거리의 건물 뒤편에 자비를 들여 경로당과 시조회관을 지었다. 1983년에 지어진 이 건물은 문화 시설이 전무하던 그 시대의 형편으로 보면 매우 선구적인 사회봉사활동이었다. 그는 건축은 물론 운영비까지 부담하였다. 이때 전주의 시인 이철균을 불러 경로당에서 살도록 해주었고, 그가 숨을 거두자 장례까지 치러주었다. 일생을 불우하게 보낸 고향 친구의 애통한 순간을 지켜준 그의 우정은 주위에 자자한 칭송을 남겼다.
하희주는 과작의 시인이었다. 그는 1994년 고희를 맞아서야 첫 시집 '자화상'을 펴냈다. 세상살이에 열심이었던 그였기에, 등단 40년을 맞을 때까지 시집의 출판을 미루었던 것이다. 그는 정확히 10년 뒤에 두 번째 시집 '사바의 꽃'을 간행하였다. 이 시집을 낼 당시에 그는 지병으로 중환자실에 입원한 상태였지만, 이승에 남겨줄 마지막 선물인 줄 알고 한 땀씩 공들여 가며 교정을 보았다. 시집의 사진 속에서 그는 지팡이를 짚고 고개를 기우려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다. 마치 자신이 세상을 떠나거든 기억해달라는 듯이, 그가 운명한 다음날에 나온 시집이었다.
그의 제2시집은 독특하게 구성되어 있다. 시인은 시편의 끝마다 '붙임'을 두었다. 이것에 그는 시작하게 된 동기나 소회를 남기기도 하고, 나름대로 작품의 해설을 적었다. 또 작품마다 낱말풀이를 달아서 국어교사다운 도리를 잊지 않았다. 그는 고어나 전라도 사투리, 흔히 쓰지 않는 말 등에 자세한 토를 달아 읽는 이를 도와주려고 노력하였다. 세상 사람들과 마지막 이별을 하는 순간까지 교사로서의 직분을 잃지 않은 그의 마음 씀씀이다. 그의 노력은 '사바의 꽃'으로 남았고, 그의 시는 이생에서 살다간 아름다운 삶의 기록이었다. 평소에 시를 가리켜 "강물처럼 흐르고 바다처럼 너울거리며 치솟아 부서져 잉태한 무지개를 찬연하게 비추는 물보라 같은 율어(律語)로 피워내는 꽃 중의 꽃"이라고 했던 하희주. 그는 노경에 이르러 원숙한 시의 경지를 보여주었으며, 자재한 언어로 모국어의 운율감을 되살리려고 힘을 쏟았다. 그가 시도한 '가새짬시조'는 용어부터 생경하거니와, 이 형식을 도입한 그는 도처에서 수년간 다져진 시적 내공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예컨대 그는 시조 '꽃 소리'에서 운율과 한시의 평측법을 파격하여 변용하고 행을 들쭉날쭉하게 배치함으로써, 꽃의 소리가 초래한 파동과 파장을 시각화하여 보여주는 데 성공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은 고전문학에 조예가 깊은 그가 아니고서는 감히 꾀하지 못할 바이고, 자유시에 비해 정체되어 있는 시조의 대중화 측면에서도 각광받아야 할 터이다.
하희주는 말년에 전북 지역의 문학 발전을 위해서 '모악문학상'을 제정하고, 거액의 상금을 쾌척하였다. 1993년 시행된 첫 해의 수상자는 작고한 시인 이병훈이었다. 평생 동안 사치하지 않고 착실히 번 정재를 모아 후배 작가들의 문학욕을 고취할 만큼 고향을 사랑했던 하희주였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이 고장에서는 그의 시세계에 관한 연구조차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제라도 서둘러 그의 시적 업적을 평가하여 한국시문학사에 편입시킬 일이다. 그의 독실한 애향정신은 전북애향운동본부에서 수여한 상으로 치하되었을지 모르나, 시인에 대한 문학사적 성취는 후학들에 의해 보상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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