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부조리 소설화에 전념한 시대의 기록자
이정환(李貞桓·1930~1984)은 전주역전에서 태어난 소설가이다. 그는 책장사하는 부친을 둔 덕분에 문학에 입문한 듯하다. 나중에 혼자 혹은 동생들이랑 책방을 경영하며 호구하기도 했으니, 그는 태생부터 책으로 먹고살 팔자였는지 모른다. 그런 환경은 그를 자연스럽게 문학판으로 유혹했을 터. 그는 집에 입고되는 책들을 무차별적으로 읽어내면서 또래들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많은 독서량을 보였다. 그는 이미 학교 교사들도 따라가지 못할 만큼 상당한 수준에 도달했던 것이다. 많은 독서 체험은 그를 정신적으로도 조숙하게 만들었고, 그는 해방 후에 전주남중학교를 자퇴하고 전주농고에 들어가면서부터 습작하도록 부추겼다.
전쟁은 한 나라의 장래뿐 아니라, 개인의 삶을 송두리째 바꾼다. 이정환도 예외가 아니어서, 그는 학도병으로 입대하여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하여 국군에 복귀하였다. 그런데 그는 임시휴가를 나왔다가 모친의 병환이 위독하여 귀대일자를 넘기면서 탈영병으로 낙인찍히고 말았다. 다음해에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그는 무기형, 20년형, 7년형 등으로 감형을 받고 만기 석방되었다. 그의 방황을 눈치 챈 집안에서는 그를 서둘러 장가보낸 뒤, 가업이었던 서점을 운영하도록 하였다. 이처럼 그의 삶 자체가 한 편의 드라마틱한 소설과 다름없다. 그런 탓인지 그는 다량의 소설작품을 발표하여 가슴속의 분노와 어혈을 풀려고 매진하였다.
1969년 '월간문학'에 단편 '영기'가 당선되고 나서 그는 솔가하여 상경하였다. 그의 서울행은 궁핍한 처지를 감안하면 무모하기 짝이 없었으나, 속으로는 소설쓰기에 더 골몰하기에 서울만큼 좋은 곳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고래로 서울은 못 가진 자에게 함부로 문을 열어주지 않기로 소문난 야박한 땅이었다. 그는 동생들까지 건사할 책임에 힘겨운 나날을 보내면서도 글쓰기를 계속하였다. 마침내 '신동아'의 논픽션 공모에 당선되어 큰 액수의 상금을 받으면서 쪼들린 살림을 펼 수 있었다. 그와 아우들은 상금을 밑천삼아 서점을 내어 악착스럽게 경영한 끝에 대영서점이라는 번듯한 상호까지 내걸게 되었다.
그런 한편으로 이정환은 1973년에 발행한 '겨울나비'가 출판가에 입소문을 타면서 생활도 차차 안정되어 갔다. 특히 그가 1976년 창작과비평사에서 낸 소설집 '까치방'은 작가로서의 기반을 다져주었다. 소설가 이문구가 '이정환의 시대'를 예언한 것도 그 즈음이다. 이 소설집의 성공은 그로 하여금 문단의 주목을 받게 해주었고, 1975년 장편소설 '샛강'을 '창작과 비평'에 연재하면서부터 문단에서의 입지는 확실하게 다져졌다. 그러나 호사다마라고, 1971년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당뇨병 때문에 이정환은 1980년 실명하고 말았다.
이정환의 소설세계는 자신의 체험으로 구축되었다. 그는 자신의 투병생활을 형상화한 소설 '상놈'에서 "세상은 힘세고 건강한 사람들의 것"이라던 말투로 세상을 향한 핀잔을 작품의 행간에 숨겼다. 또 수인 생활의 경험을 살려서 교도소라는 갇힌 공간을 소재로 다루었다. 구체적으로 그는 무기수, 사형수, 투옥담, 수인간의 다툼, 간수 등을 소재화하였다. 이런 경향을 가리켜서 체험의 소산이라고 서둘러 봉합할 수도 있겠지만, 군부시대에 압살된 자유의 가치를 언표한 것이라고 보아야 맞을 것이다.
또 이정환이 즐겨 취급한 빈곤 문제도 작가의 체험과 연루된 것이다. 그의 문제작 '샛강'은 변두리 인생의 애환을 다룬 작품이다. 그것은 표제에서 예감되거니와, 산업화의 물결 속에서 재생산되었던 도시빈곤층의 문제를 정면에서 다루었다는 점에서 사회적이다. 그렇다고 그가 차가운 시선으로 사회를 응시한 것만 아니다. 그는 더러운 물이 흐르는 샛강 언덕에 정착하여 살아가는 가난한 군상들의 허물을 따뜻이 포옹해준다. 그의 넉넉한 마음을 따라 소란한 서사가 진정되고, 주제는 또렷해졌다.
이정환의 딸 이진은 "글은 아버지에게 있어 곧 병원비요 생활비며, 심지어 다섯 아이들의 학비였고, 최종적으로는 그 자신의 존재 이유이기도 했다"고 추억하였다. 그녀의 발언은 말년에 이르러 생계용 작품을 양산하여 초기의 긴밀도를 떨어뜨린 아버지를 안타깝게 바라보아야 했던 가족의 증언이다. 평생 동안 지독한 가난과 병마와 싸우면서도 문학을 놓지 않았던 그였지만, 자식들은 하나같이 효자들이었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신장을 이식시켜드리려고 기꺼이 나섰고, 조건이 맞지 않자 딸이 뒤따라 나섰다. 그 딸 이진은 작가가 되어 아버지의 문학적 업적을 현양하느라 분망하다. 자식들은 생을 마칠 때까지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잃지 않았던 아버지에게 최대의 경의를 표했던 것이다. 요즘처럼 인륜조차 파탄나는 세상에서 이정환의 자식들이 보여준 효행은 널리 인구에 회자되어야 마땅하다.
생애의 절반 이상을 병마와 싸우면서도 작가로서의 소명의식을 잃지 않았던 이정환. 비록 그는 화려한 명성을 얻은 작가는 아니었으나, 사회의 부조리를 소설화하기에 게으르지 않았던 시대의 기록자였다. 그는 가고 없으나 문학은 남아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문학의 역할과 작가의 바람직한 자세를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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