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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명표의 전북 작고 문인을 찾아서] (25)할말을 가슴에 묻었던 시인 정열

농촌 참모습 시로 승화시킨 정열시인

정열(雲月 鄭烈·1932~1994)은 정읍 정우면 회룡리에서 태어난 시인이다. 그의 고향은 갑오동학농민혁명의 함성이 들판을 적셨던 곳이다. 그런 탓인지 몰라도, 그의 시를 읽노라면 가슴이 먹먹해지고 속이 울울해지는 느낌을 주체할 수 없다. 그 스스로 "내 시는 어머니의 가슴속에서 영영 풀리지 못한 채 응얼진 핏덩이거나, 아니면 한밤중 반딧불 같은 호롱불 앞에서 반쯤 석불이 되어 어깨를 울먹이던 속울음이다"고 고백했듯이, 그의 시에는 한이 서려 있다. 시력 30주년을 맞아 병석에서 낸 시선집의 제목조차 '할말은 끝내 이 땅에 묻어두고'(청사·1985)였으니, 그의 시작품에 살로 배어 있는 '응얼진 핏덩이'나 '울먹이던 속울음'은 포괄적으로 한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다.

 

그는 비교적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여느 아이들처럼 천자문을 배우며 자랐다. 이런 가정 형편은 특출난 것도 아니어서 굳이 시를 쓰지 않아도 될 터이다. 그러나 그는 어려서부터 약골로 소문나는 대신에, 하늘의 허락을 얻어 시재를 부여받았다. 몸과 문학을 맞바꾼 그는 1948년 전주상고에 들어가면서부터 차근차근 수련을 시작하였다. 그는 학교의 문예부장을 맡으며 문학의 길에 본격적으로 발을 디뎠다. 이러한 경로는 시인으로 나아가는 전형적인 방법이었다.

 

1953년 '자유신문'에서 신인들의 문예작품을 공모하자 그는 시를 내어 당선되었다. 그는 자신의 시작에 자신감을 갖고 1955년 '문학예술'에서 추천을 받기 시작했다. 당시의 월간지에서는 3회까지 추천해야 완료된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그는 계속하여 작품을 제출하였다. 그러나 당선 소감문까지 보냈던 잡지가 폐간되어 버리자, 그는 등단 시기를 늦추지 않으면 안 되었다. 1959년 11월이 되어서야 그는 '사상계'에서 등단 절차를 마치고 마침내 시인이 되었다.

 

첫 시집 '원뢰'(정치문화사·1959)를 내면서 그는 본명의 정하열(鄭夏烈)에서 '여름'을 지워버리고 정열로 필명을 삼았다. 아마 '여름'이 정열(情熱)의 계절이고, '녀름'이 그 여름의 결실이라 생각하여 중첩된 의미를 삭제해버렸는지도 모른다. 혹은 게으름을 부추기거나 겨르로운 호흡을 요구하는 여름의 의미망에 부담을 가졌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그가 아호를 거의 사용하지 않은 점으로도 유추 가능하다. 이런 점에서 그의 필명은 줄임이 아니라 없앰이다. 그는 여름을 지워서 시인의 '정열'을 얻고 싶었던 것이리라.

 

정열은 1963년 국학대학을 졸업하고 고향의 태인중학교에 국어교사로 부임하였다. 이후로 그의 생은 교육 현장에서 떠난 적이 없었다. 그에게 변화라곤 통근하기 쉬운 태인기술학교를 거쳐 신태인종합고등학교로 전근한 것 외에, 평생 동안 교단에서 영재를 지도하느라 심혈을 쏟았다. 그는 교직에 종사하는 한편으로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농사도 함께 지었다. 그에게 '농민 시인'이란 칭호를 붙게 해준 것은 그로부터 연유한다.

 

사실 정열의 시집에는 농촌을 소재화한 작품들이 흔하다. 구체적으로 그의 시는 "손금마다 살아 남는 풀물"('풀물')이 듬성듬성하고, 또한 "갯도랑까지 다 메운 팥죽같은 흐레"('미꾸라지')가 질펀하다. 이런 사례를 들어서 정열을 농민시인이라 칭한다손, 크게 어긋난 평판이 아니다. 하지만 조금 더 읽어보면 "지어미 가슴속 기진한 속울음"('쑥국새 소리') 소리와 "제가 꼰 새끼줄에 제 손들 묶여"('진눈깨비')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찾아내기가 더 수월하다. 말하자면, 정열은 더불어 부대끼며 살아가던 농민들의 정서를 작품의 원경으로 삼고, 자신이 삶의 터전으로 삼고 있던 농촌의 현실을 근경으로 설정한 뒤에, 자신의 섬세한 감수성을 육화한 것이다.

 

이런 성향은 그의 무골호인에 가까운 천성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속으로는 속울음으로 범벅된 그였으나, 겉으로는 다정한 이웃 아저씨로 불리던 그였다. 그는 '할말은 끝내 이 땅에 묻어두고' 다정도 병인 양, 시작에 열중하여 농촌의 참모습과 농민들의 애환을 자신의 것으로 승화시켰다. 그가 "거덜난 일상"('흙에게')과 "하얀 백자기의 은은한 속삭임"('농악은')에 '파르르' 떠는 것도, 따지고 보면 "안으로 안으로 크나큰 강물"('여백')이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 추모하는 움직임이 일다가, 최근 이르러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은 번지르르한 시편들에 현혹된 세태를 보는 듯하다.

 

이승에 사는 동안에 "살아 남아 귀먹고 눈먼 것들을 위하여"('할말') 몸살을 앓고 가슴을 졸이던 그는 1964년 정읍과 김제, 부안 지역의 문우들과 문학회를 결성하고 동인지 '향토문학'을 발간하는 등 열심히 문단 활동에 가담하기도 했다. 그의 이런 모습은 큰 시인이 되려거든, 먼저 고향의 문학 발전에 헌신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소박한 진리를 입증한다. 성근 시재의 시인일수록 저 잘난 맛에 겨워 고향을 멀리한다. 이 점에서 죽어서도 정든 땅을 떠나지 않고 고향사람들에게 무한한 애정을 지녔던 정열의 생애는 오래 기릴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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