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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호 한국사경연구회장

"조상들이 이어온 정신예술 사경은 경건한 수행입니다"

초조대장경 판각 1000주년을 맞아 한국문화재보호재단 전시실(15~28일)에서 연 한국사경연구회의 여섯번째 회원전 '느림과 정치(精緻) 미학의 정수, 사경'에서 그는 사경에 무관심한 세태에 속상함을, 전통 사경의 맥을 이어야 한다는 책임감을 토로했다. 안봉주(bjahn@jjan.kr)

전통사경 전문가 김경호(48·한국사경연구회장)씨는 전자현미경보다 더 미세한 눈을 갖고 있다. 그는 0.1㎜ 붓끝에 금니(아교를 녹인 물에 갠 금가루)로 불경을 새겼다. 사경(寫經)을 통해 삶의 진리를 보는 또 하나의 현미경을 발견한 것. 단 1㎜에도 다섯 개 이상의 금선을 그어 정교한 우주를 담는다.

 

"사경이 일반인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불과 20여년 전입니다. 단순히 불교 경전을 베껴쓰는 게 아니에요. 조상들이 이어내려온 정신예술의 정수죠. 하지만 사경에 대한 연구는 물론 기초자료조차 제대로 정리되지 않고 있어 안타깝습니다."

 

초조대장경 판각 1000주년을 맞아 한국문화재보호재단 전시실(15~28일)에서 연 한국사경연구회의 여섯번째 회원전'느림과 정치(精緻) 미학의 정수, 사경'에서 그는 사경에 무관심한 세태에 속상함을, 전통 사경의 맥을 이어야 한다는 책임감을 토로했다. 회원 80여명이 출품한 100여 점은 예술이기에 앞서 인고의 수행으로 빚어낸 것들. 대부분이 불경 사경이지만, 유교 경전과 성경 사경도 있다.

 

그는 조선 중기 이후로 맥이 끊긴 전통 사경을 되살린 주역이다. 김제 출생인 그가 네 살 때부터 아버지에게서 서예를 배웠다. 초등학교 졸업 후에는 중학교 진학도 미룬 채 서예에만 매달렸다. 결국 중학교를 1년 늦게 진학했으나 각종 전국서예학생대회에서 최우수·우수상 등을 휩쓸어 두각을 보였다. 고등학생 시절 사경에 푹 빠져 부모 몰래 출가도 했다. 스스로 "(사경을 하게 된 게) 다 팔자 소관"이라고 이야기하는 이유다. 그렇게 간절히 원했으나 본격적으로 전통사경 공부를 시작했을 땐 "정말 깜깜했다". 사라진 것을 익히려다 보니 가르침을 구할 곳도 없었고, 전통사경 유물이 체계적으로 정리돼 있지 않아 옛 문헌을 수소문해 연구하면서 독학해왔다. 20년 넘게 외길만을 걸어온 그는 지난해 전통사경 분야의 유일한 기능전승자가 됐다.

 

"장사를 하려고 했으면 돈을 엄청 벌 수도 있었겠죠. 금으로 새기니까 대단한 것인 줄 아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게 얼마나 가겠어요? 할 거면, 제대로 해야 합니다."

 

한 작품을 완성하는데 꼬박 걸리는 시간은 3∼8개월. 일반 서예나 불화에 비해 수백 배 공력이 든다. 재료 준비와 마무리 작업에도 지극 정성이다. 아교를 중탕해서 녹힌 뒤 아교물을 종이에 발라 말려 다시 바르고 말리기를 여러 차례. 금·은가루를 여러 번 정제하고 수시로 붓을 빨아 불순물을 제거하고, 사경을 마치면 표면을 문질러 광을 낸다.

 

숨을 한 번이라도 잘못 쉬거나 눈을 깜빡여 붓이 엇나가도 낭패. 고난이도 집중력을 요하는 이 작업은 온도 35℃, 습도 90% 이상의 '찜통'일 때 가장 잘 된다. 붓 끝에 묻은 아교가 굳기까지는 3초에서 5초 사이에 불과하다. 무엇 하나라도 소홀히 되면 좋은 작품이 나올 리 없다.

 

불교미술사학자 故 장충식 동국대 교수는 그의 사경을 보고 "고려시대의 그것보다 훨씬 정교하다"며 극찬했고, 한글 궁체의 대명사로 꼽히는 이미경 선생은 "한글 궁체를 발전시키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이처럼 그의 사경이 인정받는 것은 독창적인 기법 때문이다. 최대한 원전 5종 이상을 대조하고 자구에 맞게 한글 번역을 할 것, 금니와 은니를 3회 이상 정제하는 등 100% 순도를 유지할 것. 문헌에 근거해 제작하기 위해 만들어놓은 슬라이드만 해도 수 만여 장에 이른다.

 

이번 전시에 내놓은 '감지 금니 아미타경 변상도'는 가로 21.4㎝, 세로 20.4㎝로 A4 용지보다도 더 작다. 하지만 이는 고려 불교의 특색을 가장 잘 보여주는 금니와 은니로 제작된 사경. '변상도'는 까막눈 신자들도 알 수 있도록 경전의 내용을 그림으로 그린 것이다.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성격이 강했던 변상도는 두루마리 식으로 된 권자본이나 접이식으로 된 절첩본의 맨 앞에 붙여져 사경의 내용을 압축적으로 표현됐다. 이를 완성하는 데 걸린 시간은 매일 6~8시간씩 90일. 두문불출하며 작업했던 탓에 스트레스로 앞니와 양쪽 어금니까지 잃고 난 뒤다.

 

"'변상도'는 비스듬하게 불빛에 비춰봐야 알 수 있습니다. 옅은 금색이 무수한 선으로 돼 있는 게 보이죠? 물론 원본과 비교해야 진가를 알수 있지만, 국보라고 해서 다 뛰어난 작품은 아닙니다. 엉성한 것도 많아요. 두루뭉술하던 동정·소매·옷무늬 등은 개작도 됩니다."

 

그는 인터뷰 내내 '사경 없이는 팔만대장경도 없다'는 사실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목판에 글자를 새겨 책으로 찍어내려면 붓으로 한 자 한 자 종이에 베껴 적는 작업이 필수. 우리나라는 고려 시대엔 국가기관 '사경원'을 뒀고, 원나라에 사경 전문가 수백 명을 파견해 금자·은자 대장경을 내놓을 만큼 세계 최고 수준에 이르렀다. 하나의 불경을 필사하는 데 들인 정성은 일본과 중국이 도저히 따라올 수 없는 경지였던 셈. 조선시대 억불숭유 정책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기 전까지 사경은 세계 최초의 목판인쇄물'무구정광대다라니경'과 금속활자'직지심체요절'의 '산파'였다.

 

그는 "사경 없이는 대장경이 나올 수 없지만 대장경 1000년을 기념하는 거의 모든 전시가 대장경 유물을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게 속상했다"며 "사경의 가치와 의의에 대한 인식을 다시금 일깨우고자 기획한 전시였다"라고 했다.

 

"본래 사경은 불교 경전을 옮겨 쓰는 행위와 옮겨 쓴 경권에만 국한됐지만 요즘엔 달라졌습니다. 다양한 종교와 함께 사경의 영역이 성경사경, 교전(원불교)사경, 코란사경 등으로 점차 넓혀져 가고 있죠. 일본의 경우 사경인구가 600만명에 이르고 전승도 잘 되고 있지만 한자문화권에서는 우리나라 사경이 최고 수준이라고 자부합니다. 사경의 전통 양식과 기법을 체계적으로 연구해 활용한다면 얼마든지 세계화할 수 있는 자산이죠."

 

외국에서 전시와 강연 등을 통해 전통사경의 세계화에도 앞장서왔던 그는 내년에는 뉴욕에서 초대전을 가질 계획. 사경의 가치를 알려온 그의 외로운 노력이 이제서야 결실을 맺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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