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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는 국민이 살아온 발자취·삶의 애환이죠"

익산역 100년 이야기 담은 사진전 연 '철우회' 익산지부 박덕권 회장

"기차표를 사기 위해 번호표를 들고 대기하던 줄이 역 대합실을 가득 메우기도 했지요."

 

익산역 개통 100주년을 맞아 6일부터 한 달간 익산역 지하보도에서 100년의 익산역 이야기를 담은 옛 사진전을 열게되는 철우회(철도청 퇴직원들의 모임) 익산지부 박덕권 회장(78)의 기억속 철도는 국민이 살아온 발자취이며, 그 시간들이 흘려놓은 삶의 애환이라고 한다.

 

익산역 지하보도에 길다랗게 펼쳐진 사진전에는 '하얀 연기 뿜으며 달리는 증기 기관차', '일제시대 익산 역사의 모습', '열차의 시대별 변천사', '6.25 총탄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옛 이리역사'등의 지난 100년간의 익산역의 모습과 그 속에서 익산역과 함께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다.

 

일제 강점기에 개통된 익산의 철도역사는 일본인들이 김제와 익산 평야에서 구확한 쌀과 농산품을 일본으로 내보내기 위한 수송선로로 활용되면서 시작됐다.

 

이를 계기로 익산역은 호남의 금융과 상업, 문화의 중심지로 성장하며, 호남지역 대표적인 철도 요충지가 됐다.

 

60년대에는 '낮에는 10만 밤에는 6만'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번화가였고, 승용차와 대중버스가 흔치 않았던 70년대까지는 호남 주민들의 유일한 교통수단이기도 했다.

 

익산역은 1912년 3월6일 호남선 강경-익산 구간개통을 시작으로 군산선 개통과 함께 문을 열었고, 역을 중심으로 익산의 도심지가 형성됐다.

 

77년 11월 이리역 폭발사고가 발생하면서 익산역은 재도약을 맞기도 했다. 폭발사고 35년이 지났지만 박 회장은 당시의 상황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박 회장은 "폭발사고 당시 역 주변은 말 그대로 아수라장에 비참할 정도로 혼란스러웠다"며 "한참 떨어진 집의 유리창도 깨져있었다"고 기억했다.

 

폭발사고는 당시 익산역에 머물던 59명의 역무원과 시민이 숨지고 1300여명이 부상을 입는 대형 참사였다.

 

사고 기록에는 이리역을 중심으로 반경 500m 이내의 가옥과 건물이 완전히 파괴됐고, 반경 4km 이내 가옥의 창문이 떨어지는 등 한마디로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고로 인한 이재민만 7800명에 달했다.

 

사고는 빠르게 복구되고, 격자형 도로망을 갖추는 계기가 됐다. 이런 재도약의 발판은 익산의 경제 발전을 30년이나 앞당겼다는 평가다.

 

그렇게 100년이 지난 익산역의 모습은 새로운 모습으로 단장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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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만 kjm5133@jj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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