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기사 다음기사
UPDATE 2025-11-07 04:43 (Fri)
로그인
phone_iphone 모바일 웹
위로가기 버튼
chevron_right 주말 chevron_right 행복한 금토일
일반기사

전북의 한옥성당 - 믿음의 신비와 한옥의 아름다움 오롯이

한옥의 외양 -바실리카 양식의 교묘한 조화'눈길'           근대 역사·종교·건축의 미학 간직한 소중한 유산

▲ 나바위성당은 금강의 강변이 굽어다 보이는 익산의 화산에 서 있다. 둥근 아치형 벽돌 기둥들이 십자가가 달린 고딕식 뾰족 종탑을 하늘로 힘껏 떠받쳐 올리고 온통 발그레한 감빛으로 빛난다.

 '세상의 쾌락에서 멀리 떨어져서 그들의 초가를 내려다보는 높은 산으로 마치 울안의 땅에 갇혀 있는 듯이 둘러싸여 기도와 밭일로 일생을 보내는 이들은, 세속 사람들이라기보다는 수도자들과 비슷합니다.

 

 이 황량하고 외딴 환경에도 불구하고, 내 사랑하는 은둔소는 마음이 곧은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가 되었으니, 그들은 진리와 하늘의 길을 찾아 이리로 온 것입니다.' ('천주교 전주교구사'재인용 )

 

 1893년 어느 선교사의 말이다. 믿음의 땅으로 알려진 전북의 두메산골에서 화전민으로 살아가야 했던 천주교도들은 그 시대의 극빈자였다. 그러나 부지런하고 신실했던 그들은 은둔소(공소)를 중심으로 고단한 삶을 헤쳐 나갔다. 그들의 사랑하는 공소 가운데 한옥으로 지어진 아름다운 성당들이 지금껏 살아남아 우리에게 믿음의 신비와 한옥의 아름다움을 일깨운다. 이들 한옥성당은 역사와 종교·건축과 미학 등 어떤 기준을 놓고 보아도, 오늘날 우리가 각별히 기억하고 생명을 불어넣어야 할 유산이다.

 

△ 최초의 한옥성당, 되재성당

 

고산의 첩첩산중, 멀고도 낯선 되재마을에 한옥성당이 있다. 이 되재성당은 우리나라에서 서울 약현성당(1893)에 이어 두 번째로 세워진 성당(1895)이자 최초의 한옥성당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다. 팔작 기와지붕에 아담한 성당은 동남쪽을 바라보고 앉았는데 높직한 십자가 종탑을 앞에 두었고, 마당에는 여기가 믿음의 집이 틀림없다는 걸 알리는 성모상과 예수상이 서 있다.

 

되재성당의 첫인상은 드물게 아름다운 집이라는 것이다. 더군다나 복원한 지 4년 남짓하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더욱 놀랍다. 이렇듯 티나지 않게 쓰러져 가는 옛것을 근사하게 되살렸다는 사실에 고마움마저 인다. 성당 외양은 앞면 5칸에 옆면 10칸이지만, 내부는 앞면 3칸에 옆면 8칸의 삼랑식으로 이루어졌다. 덤벙주춧돌 위에 선 둥근 기둥 스무 개가 나란히 지붕을 떠받치고, 양쪽 6개의 방문 앞마다 툇마루가 놓이고, 벽은 어른 키 높이까지 돌과 흙으로 쌓아올리고 그 위쪽에 창문을 냈다.

 

성당 안은 겉모습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에 잠겨 있다. 앞쪽 제단을 빼고 방 한가운데는 높직한 칸막이가 방을 둘로 갈라놓았다. 예전의 세속 풍습대로 남녀의 자리를 구별하기 위해서다. 물론 드나드는 문도 달라서 남자는 동남쪽 방문을 이용했고 여자 신도는 북동쪽 문으로 드나들었다. 채광용 높은 창문에서는 바깥 빛이 스며들고, 삼각형으로 높이 솟은 천정은 대들보와 서까래를 그대로 드러내어 상승감을 주며, 길쭉한 장방형 양쪽 끝에 제대와 출입문을 멀찍이 마주 보게 하여 공간의 깊이감을 더한다. 이를테면 한옥의 측면을 한옥성당에서는 정면이 되고 한옥의 정면은 한옥성당의 측면으로 바뀌는 셈이다. 이런 내부구조를 흔히 바실리카 양식으로 불리는데, 되재성당은 한옥의 외양에 바실리카 양식의 내부 특징이 교묘히 어우러져 한옥성당 특유의 아름다움과 경건함을 갖춘 성당으로 이름 높다.

 

여러 차례 박해를 피해 되재에 모여든 교우촌은 1984년 프랑스인 비에모 신부의 주도로 성당을 짓기 시작했다. 동학혁명의 어지러운 시절이었는데, 목재는 완주 화암사와 은진 쌍계사에서 사서 옮겨오는 등 우여곡절을 끝에 이듬해 완성되었다. 400여 명이 미사를 볼 만큼 규모가 컸던 되재성당은 논산본당이 서면서 공소로 위축되고, 한국전쟁 때는 불타버렸다. 1954년 그 자리에 다시 세워졌고 얼마 전 새로이 복원되었다. 뮈텔주교의 일기와 사진자료 등을 통해 전해오는 성당의 본래 모습과는 차이가 있으나, 그럼에도 되재성당은 복원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모범으로 손색없다. 지금은 일 년에 두 차례 미사를 올려, 아쉽게도 실용적 목적보다는 상징적 가치가 더 앞선 성당이 되었다.

 

△ 김대건 신부 첫 발 내디딘 나바위성당

 

나바위성당은 금강의 강변이 굽어다 보이는 익산의 화산에 서 있다. 첫눈에 성당의 자태는 당당하다. 둥근 아치형 벽돌 기둥들이 십자가가 달린 고딕식 뾰족 종탑을 하늘로 힘껏 떠받쳐 올리고 온통 발그레한 감빛으로 빛난다.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갖게 되는 고요한 광채다. 그런데 옆으로 돌아가 바라보면 돌연 아름답고 경이로운 광경에 맞닥뜨린다. 길게 내달리는 높은 용마루와 기와지붕은 잿빛이 감돌고 기왓골은 참빗처럼 가지런하며 두 겹 지붕 사이에는 33개의 팔각 채광창이 뚫려 있다. 나무기둥 여덟 개가 아래쪽 지붕처마를 떠받쳐 회랑을 이루고 마지막 세 칸은 막혔다. 정면 5칸에 측면 10칸으로 된 한옥이다. 나바위성당은 바실리카 양식을 한옥으로 조화롭게 번역해냄으로써 완벽한 건축적 미학에 다가갔다는 평을 받는다.

 

한때 나바위성당의 교세는 전국에서 가장 컸는데, 프랑스인 베르모렐 신부는 신도들이 한 자리에 모여 미사를 볼 수 있는 성당을 짓기 위해 오래 전부터 화산에 공을 들였다. 신부는 1916년에 마침내 화산에 터를 닦고 공사를 시작하여 1907년에 완공했다. 설계는 명동성당을 설계한 프아넬 신부가 맡아서 한국인의 정서에 맞는 한옥으로 지었다. 목재는 임천 후록에서 벌목하여 끌배로 운반하고, 목수일은 주로 중국인이 맡았다. 그후 1916년에 무너져 내리는 흙벽을 벽돌로 바꾸고 용마루에 있던 종탑은 헐어냈다. 대신 성당 입구에 고딕식 종탑을 세우고 외부 마루는 회랑으로 바꾸었다. 성당 내부에는 전통적인 유교 관습에 따라 남녀 자리를 구분한 칸막이 기둥이 남아 있다. 얼마 전 창마다 한지 성화로 장식하여 성당 안의 분위기가 한결 그윽해졌다.

 

화산(華山)이라는 이름답게 성당 둘레 경관은 빼어나게 아름답다. 서북쪽 언저리는 조선인으로서 최초의 사제 김대건 신부가 1845년 10월 12일에 중국에서 사제품을 받고 입국할 때 첫 발을 디딘 곳이다. 성당 뒤쪽 언덕을 휘돌아 김대건 신부상과 화산 정상에 망금정 정자를 비롯하여 십자가의 길, 야외 미사를 볼 수 있는 터 등이 고즈넉하게 이어져 묵상하는 순례자들의 발길을 붙잡는다.

 

사실 아름다운 것은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그 자체가 모든 걸 말해주는 법이다. 그럴수록 아름다운 한옥성당과 한옥공소로 이어진 순례길은 믿음의 있고 없음을 떠나 꼭 해보아야 할 인생의 중대사가 아닐까. 아니면 즐거운 숨바꼭질 놀이가 될 수도 있겠다. 이를테면 술래가 되어 숨은 아이를 찾아가듯 산속 깊이 꼭꼭 숨은 공소들을 찾아나서는 것이다.

 

/김정겸 문화전문시민기자

 

(프리랜서 작가)

저작권자 © 전북일보 인터넷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전북일보 desk@jjan.kr
다른기사보기

개의 댓글

※ 아래 경우에는 고지 없이 삭제하겠습니다.

·음란 및 청소년 유해 정보 ·개인정보 ·명예훼손 소지가 있는 댓글 ·같은(또는 일부만 다르게 쓴) 글 2회 이상의 댓글 · 차별(비하)하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내용의 댓글 ·기타 관련 법률 및 법령에 어긋나는 댓글

0 / 4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