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기사 다음기사
UPDATE 2025-11-07 04:50 (Fri)
로그인
phone_iphone 모바일 웹
위로가기 버튼
chevron_right 주말 chevron_right 행복한 금토일
일반기사

세계문화유산 등재 기다리는 도내 한옥공소 3곳, 박해 견뎌낸 한국 천주교회의 모태

▲ 사진 위에서부터 경당으로 쓰이는 옛 4칸의 사제관과 이엉으로 지붕을 올린 6칸의 사랑채 검붉은 녹을 뒤집어쓴 종탑만 남아 있는 '정읍 신성공소', 섬진강과 금강이 시작되는 깊은 산골마을에 자리한 '장수 수분공소', 붉은 빛이 도는 점판암 돌너와를 지붕에 올린 '진안 어은공소'.

 지난해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가 천주교 관련 한국의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 29건을 내놓았는데, 그 가운데 전북지역의 유산은 7건으로 가장 많았다. 앞서 설명한 완주 되재성당과 익산 나바위성당을 비롯해 전주 전동성당과 치명자산 순교자묘, 정읍 신성공소, 진안 어은공소, 장수 수분공소 등이다.

 

 100년 남짓 박해를 치르는 동안 천주교도들은 목숨을 잃고 믿음을 지키기 위해 남부여대하며 깊은 산속으로 숨어 들어가 교우촌을 이루고 살았다. 이들 교우촌을 공소라고 불렀다. 여기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세 한옥공소를 찾아 한국천주교회 어머니 노릇을 했던 공소의 어제와 오늘을 둘러보았다.

 

신성공소는 꼬불꼬불한 들길과 산길 끝에 견고한 돌성벽에 둘러싸여 있다. 보천교의 돌담을 사다가 쌓았는데, 관군의 급습을 경계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1886년 병인박해를 피해 모여든 교우들은 산허리에 화전을 일궈 담배농사를 지으며 생계를 잇고 믿음을 지켰다. 1907년 미알롱 신부의 지휘 아래 철옹성 같은 성벽을 쌓고 가까이에 기와를 굽는 공장까지 마련하여 성당과 사제관, 사랑채를 지었다.

 

8칸의 성당은 바실리카 양식을 한옥 안에 접목시킨 경건한 집이었다. 그러나 성당은 1936년 교우들의 눈물어린 반대를 무릅쓰고 정읍 본당의 공사비를 충당하기 위해 매각되어 어느 문중의 제각으로 팔려 사라졌다. 지금은 공소 경당으로 쓰이는 옛 4칸의 사제관과 이엉으로 지붕을 올린 6칸의 사랑채, 검붉은 녹을 뒤집어쓴 종탑만 남아 있다. 오디 수확을 하다 달려온 임춘남(베드로) 공소회장은 한 달에 한 번 첫째주 목요일에 신부님이 방문하여 미사를 올린다는 말끝에 헐린 성당이 꼭 제 모습을 되찾기를 소원한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어은공소 역시 병인박해를 피해온 교우촌에서 비롯되었다. 산속 막다른 길에서 붉은 빛이 도는 점판암 돌너와를 지붕에 올린 어은공소를 보는 순간, 순정한 믿음을 동경하는 마음이 되고 만다. 민도리 홑처마에 팔작지붕에 亞자형으로 이루어진 성당은 어디 하나 화려하거나 밉보이는 것이 없이 소박하다. 내부는 한옥성당 특유의 바실리카 양식으로 되어 있다.

 

어은성당은 1900년에 전주 성당에서 분가하여 본당이 되었고, 1904년에 김양홍 신부의 진두지휘 아래 세워졌다. 목재는 머우내 앞산과 오리골 뒷산에서 벌목해 지게로 운반하고 기둥은 헌 목재를 사다가 지었으며 무거운 돌너와는 백운 백암마을에서 지게로 날랐다. 이렇게 공들여 지은 성당은 1921년 한들본당과 1952년 진안본당으로 본당 자리를 넘겨주고 공소로 물러났다. 이제는 30여 가구가 산비탈에 고랭지 채소를 심거나 한봉을 치며 한 달에 한 번 방문하는 신부를 맞아 미사를 올리며 믿음의 끈을 놓지 않고 살아간다.

 

섬진강과 금강이 시작되는 깊은 산골마을에 자리한 수분공소는 얼핏 보면 초라하고 어설프기만 하다. 주황색 칠이 벗겨진 함석지붕에 무너지려는 벽기둥을 떠받친 통나무, 휑하게 빈 내부 등 근대문화유산등록 문화재라는 팻말이 무색하다. 그러나 겉모양은 이리 허술해도 수분공소는 병인박해 훨씬 이전부터 교우들이 모여 살았던, 아주 특별하고 유서 깊은 곳이다. 1840년과 1850년대 최양업 신부와 다블뤼 신부가 공소를 세웠으니 170여 년 전이다.

 

1921년 부실한 공소를 대대적으로 보수했는데, 이때 함양의 기와공장에서 등짐으로 기와를 나르고 번암에서 나무와 돌을 메어 와 성당을 지었다. 1954년 장계성당이 생길 때까지 본당 노릇을 하며 성당에 딸린 소화학원에서 아이 어른들에게 글을 깨우쳐 주었고, 한창 때인 1935년에는 무려 1300여 명의 교우가 신심을 덥힌 성전이었다. 지금은 50여 명의 교우들이 어서 빨리 번듯하게 복원되어 붉은 신심을 이어갈 수 있기를 서원하고 있다.

 

김정겸 문화전문시민(프리랜서 작가)

저작권자 © 전북일보 인터넷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전북일보 desk@jjan.kr
다른기사보기

개의 댓글

※ 아래 경우에는 고지 없이 삭제하겠습니다.

·음란 및 청소년 유해 정보 ·개인정보 ·명예훼손 소지가 있는 댓글 ·같은(또는 일부만 다르게 쓴) 글 2회 이상의 댓글 · 차별(비하)하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내용의 댓글 ·기타 관련 법률 및 법령에 어긋나는 댓글

0 / 4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