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장근 군산대 사학과 교수
남원 실상사는 구산선문 최초로 문을 연 실상산파의 본사로 흥덕왕 3년(828) 당나라에서 귀국한 홍척에 의해 창건된 사찰이다. 흥덕왕은 김헌창의 난 때 동조세력이 많았던 남원의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홍척을 국사로 삼고 실상사의 창건을 후원했다. 840년 홍척국사 입적 이후 제자 수철화상이 실상산문의 2대조에 올랐고, 문성왕의 후원으로 실상사의 사역을 확장하는 과정에 철불이 조성됐다는 것이다. 신라하대의 철불 중 가장 이른 시기에 철조여래좌상이 만들어져 우리나라에서 철불의 첫 장을 열었다. 그리하여 남원 실상사가 철불의 본향이다.
실상사 철불은 옆으로 뻗은 눈과 짧은 코, 두툼한 입술, 길게 늘어진 귀에 신라하대의 불상양식이 잘 표현되어 있다. 신라하대의 아담한 체구의 돌로 만든 불상과 달리 분할주조법으로 제작된 높이 273cm의 대형 불상이다. 천 년 넘게 사바세계 중생들의 고통과 괴로움을 덜어 준 부처님의 한없는 자비로움이 넘친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측량조사를 실시하여 철조여래좌상의 외형이 40개 이상의 조각으로 분할되어 주조됐음이 밝혀졌다.
철조여래좌상의 이름에 대해서는 약사불설, 아미타불설, 노사나불설이 있다. 이번에 주목을 받았던 노사나불설은, 철조여래좌상이 시무외·여원인의 노사나불이며, 실상사 창건 당시의 금당인 보광전에 봉안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가지산문의 보림사와 성주산문의 성주사 등 신라하대 선종사찰에서 노사나불을 주존으로 봉안했던 예를 그 근거로 들었다. 어떤 불상을 주존으로 봉안하느냐에 따라 법당의 이름이 결정된다. 노사나불을 주존으로 봉안한 법당을 보광전이라고 부르는 것도 노사나불설에 힘을 실어줬다.
실상사에서 철불이 최초로 만들어진 역사적인 배경과 관련해서는 운봉고원의 외부에서만 그 요인을 찾았다. 해상왕 장보고의 해상활동에 힘입어 신라 유학승들이 당나라에서 귀국하면서 불상 재료에 대한 인식변화로 철불이 제작됐다는 것이다. 당시 널리 유행했던 풍수지리나 비보사상에 바탕을 두고 철불을 봉안함으로써 사찰을 지키고 보호하려는 목적도 빼놓을 수 없다. 이처럼 신라하대의 사회·경제·사상적인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철불이 실상사에서 처음 등장한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운봉고원이 '철의 왕국'이라는 내용이 다루어지지 않아 향후 과제로 남게 됐다.
1996년부터 시작된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의 학술발굴에서 보광전의 최하층에서 철불을 모신 것으로 추정되는 신라하대의 건물지가 확인됐다. 이 건물지는 정면 5칸, 측면 4칸으로 내부 면적이 99평에 달한다. 본래 보광전에 주존으로 봉안된 철조여래좌상은 1680년 실상사를 중창하는 과정에 현재의 약사전으로 옮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현존하는 50여 체의 철불 중 최고의 걸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는 실상사 철조여래좌상이 제자리를 찾아 호국사찰인 실상사가 더욱 융성하길 기원해 본다.
※곽 교수는 전북대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가야계 왕국인 운봉가야와 장수가야에 관심을 두고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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