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 가득 풀내음, 건물 가득 커피향 / 남원에 터잡은 서양화가 이정희씨 / 안숙선 명창 생가 인근 폐가 고쳐 8년간 자연 벗하며 작업
남원 산동면에 위치한 푸른 옷소매 미술관. 이곳을 찾은 건 두 번째다. 공교롭게도 두 번 다 봄의 꽃샘 추위가 막아서고 있는 봄의 길목에서 '푸른 옷소매 미술관'을 찾았다. 미술관 마당에 핀 봄 야생화를 보자 봄이 성큼 다가왔다는 걸 실감했다.
△풀·꽃 속에 핀 작은 미술관
전주에서 출발하면 이곳까지 가는 데 대략 1시간 30분 정도가 걸린다. 전북내에서 1시간 이상 되는 거리는 대전, 광주를 가는 정도의 꽤나 먼 거리다. 국도를 타고 남원에서도 더 남쪽 끝자락까지 달려 도착한 산동면 조용한 마을에 위치한 미술관. 그러나 외부 관광객들이 언뜻언뜻 보인다. 규모가 큰 미술관도, 수십 여 점에 달하는 작품이 걸린 곳도 아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33㎡(10평) 남짓하는 건물에 3.3㎡(1평) 정도되는 개인 작업실과 주거공간이 거의 전부다. 이것이 전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알음알음 이곳을 찾게 되는 매력은 무엇일까.
푸른 옷소매 미술관에 가면 나직히 피어 있는 풀·꽃들이 손님을 먼저 맞는다. 연두색, 초록색 잎이 조심스레 땅 밖으로 내밀고 있었으나 알록달록한 꽃들을 기대하기에는 좀 다소 이른 봄이다. 지난 24일 찾았을 땐 이곳을 운영하는 이정희씨(46)가 나와 있었다.
단국대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그는 고향이 천안. 그가 남원에 온지도 벌써 8년 째다. 대학 때부터 판소리에 대한 관심과 동경이 유별났고 예상치 않게 몸도 쇠약해지면서 전남 보성을 시작으로 전라도에 터를 잡았다. 장수군 번암면에서 유영혜 명창(국립민속국악원 예술감독)을 만나 안숙선 명창의 생가를 오가다 그 바로 윗집 폐가를 현재의 푸른 옷소매 미술관으로 고치게 됐다. 다 쓰러져 가는 건물에 갈색의 죽은 풀들로 뒤덮힌 이곳을 직접 꾸미고 땅을 뒤엎어 원예종, 넝쿨장미 등 심어 돌담을 쌓고 회색벽에 물고기와 새를 그리고 건물 가득 차·커피향을 담았다. 그렇게 이곳에서 8년이 흘렀고 사람들을 만나고 자연을 벗하고 그림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 땅에 그림을 그리다
"후배가 전화해서 작업 잘 하고 있느냐고 물으면 땅에 열심히 그림 그리고 있다고 대답해요." 자연도 그림일 수 있다고 말하는 그는 척박했던 시골땅에 그림을 그리듯 작약·수선화·백일홍 등을 심어가며 가드닝을 하는 데 꼬박 5년 정도가 걸렸다. 지금의 공간을 만들기까지 그림만 그리던 손에 괭이가 베고 가시에 찔리고 160cm 남짓되는 아담한 여성이 하기엔 다소 힘에 부치는 작업이었지만 붓 대신에 호미와 곡괭이를 놓지 않고 물감 대신에 화초를 심어가며 미술관 마당을 캔버스 삼아 작업을 계속했다.
그러나 작가가 값비싼 전시장을 빌려 작품을 벽면에 정돈해서 걸어두는 일 자체가 그 가치를 제대로 전달하는 것에 한계가 많다고 봤다. 작품이 판매될 때 손에 쥐어지는 경제력 보다는 마음 속 허탈함이 더 컸다. 작품은 삶 속에서 자연스레 놓여져야 하고 작가의 공간에 찾아와 삶의 연장선에 놓고 감상할 때 그 가치가 제대로 전달된다고 이야기한다. 갖춰진 공간에 작품을 놓거나 걸거나 전시하는 게 아니라 그것이 그려지고 곳, 그림이 살고 있는 곳, 그림을 그린 사람이 살고 있는 곳에 그림을 걸고 싶었다는 말에 여운이 남는다. 그의 이러한 철학은 작품에도 고스란히 담긴다. 캔버스가 아닌 여러 번의 착색에도 자연스럽고 의도하지 않은 크랙감을 주는 고재를 캔버스로 사용하고 있다. 그 위에 실경(實景)을 그리는 것이 아닌 어린 시절의 경험과 기억을 언덕, 바다, 나무, 새, 꽃 자연과 더불어 다시 꺼내놓는다.
자연과 사람과의 소통의 장소이자 작업실, 누구에게나 편안함을 안겨주는 장소인 푸른 옷소매. 문득 이름을 왜 푸른 옷소매로 짓게 되었는지 궁금해졌다.
"영국 민요에 '푸른 옷소매'라는 곡이 있어요. 그 곡도 좋아하구요. 옷이라는 글자가 사람 모양 같아서 좋기도 하구요. 시어(詩語) 같기도 한 '푸른 옷소매'라는 다섯 글자가 주는 이미지가 좋네요."
미술관을 나와 전주로 오는 길에 '푸른 옷소매'라는 영국민요 'Greensleeves'를 들었다. 어렸을 적 어디선가 들었던 귀에 익숙한 곡. 3/4박자의 편안하고 잔잔해 깊은 숨을 쉬게 하는 곡이었다.
푸른 옷소매 미술관도 그러했다. 도심에서 벗어나 꽃내음, 풀내음을 맡게 하고 자연과 사람·예술이 공존하는 삶의 가치를 생각하게 하는 곳. 푸른 옷소매는 자연의 미술관, 사람의 미술관이다.
/임진아 문화전문시민기자
(전북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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