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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동학농민군 지도자의 후손- 최경선 장군] '생묘' 남긴 선봉장…후손들 "농민군 국가유공자 대접을"

부농의 아들로 전봉준과 함께 혁명 주도 / 친형이 시신 수습, 산길로 며칠 걸쳐 운구 / 손자 최명언 씨 '참여자 유족' 지위에 섭섭

▲ 최경선

“마님, 더는 못 가겠습니다요. 조금 쉬었다 가시지요.”

 

지게를 진 장정이 숨을 몰아쉬며 힘겹게 말했다. 다 떨어진 짚신, 여기저기 때가 묻은 남루한 옷, 눈 밑의 짙은 그늘. 마치 전쟁이라도 치르고 온 것 같은 모양새였다.

 

하지만 ‘마님’은 고개를 저었다. 한 시라도 빨리 고향 땅에 당도해 일을 마무리해야 속이 풀릴 것 같았다. 오히려 그는 호통을 쳤다.

 

“지금 때가 어느 땐데 엄살을 부리느냐? 지체할 시간이 없다. 빨리 가자.”

 

주저앉았던 장정은 아무 말 못하고 슬금슬금 다시 일어섰다. 주저앉아 쉬는 것도 다 때가 있는 법이고, 지금은 그 때가 아니었다. 장정이 짊어진 것은 사람의 주검이었다. 그들은 반역죄로 처형당한 주검을, 위험을 무릅쓰고 간신히 수습해서 고향 땅 태인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때는 1895년 을미년, 동학혁명군 영솔장 최경선은 그렇게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5대 장군’ 중 유일하게 생묘 남겨

▲ 최경선 장군 묘역을 찾은 손자 최명언 씨. 묘 뒤에는 조각가 김운성이 죽창 든 농민군을 형상화해 만든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여기가 축현마을이에요. 저기 왼쪽에 보이는 산이 조왕곡이라는 덴데, 최경선 장군 묘역이 저기 있어요.”

 

정읍 시내에서 제3산업단지를 끼고 동쪽으로 달리다 들어선 길에서, 최경선의 손자인 최명언 정읍유족회 회장이 산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원래는 더 높은 곳에 있었는데, 묘역을 조성하면서 접근성을 높이려고 이장했어요. 동학 연구자나 학생들이 찾아오곤 하니까.”

 

묘역 가는 길은 콘크리트로 단단히 포장돼있었다. 이 묘역은 1996년에 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가 성금을 모아 조성했다.

 

지자체의 외면 속에서도 유족회, 시민단체, 개인 등으로부터 약 5000만원을 모아 뗏장을 덮고 묘비를 세웠다. 민예총 소속 조각가 김운성에게 의뢰해, 죽창 든 농민군을 형상화한 조형물도 세웠다.

 

“조형물이 총 11개인데, 우리는 12개라고 말해요. 사실 묘역에 두는 조형물을 홀수로 세우는 경우는 없거든요. 그건 일부러 그런 거예요. 나머지 하나는 바로 우리들 마음속에 있는 혁명정신이라는 거죠.”

 

이갑상 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 이사장은 이렇게 말하며 웃었다.

 

그런데 최경선 묘역만 이렇게 잘 정돈돼 있는 이유가 뭘까?

 

이 이사장은 “묘역을 처음 조성할 때에도 그런 질문을 많이 받았다”고 말했다. 특히 동학혁명을 주도했던 다른 인물의 유족들이 항의를 많이 했다고 한다.

 

이 이사장이 그들을 납득시킨 단 한 가지 근거는 바로 ‘생묘’라는 점이었다.

 

“당시에는 혁명에 가담한 사람들은 다 역적이었고, 그래서 다들 무서워서 시신을 제대로 수습을 못했죠. 그런데 최경선 장군의 시신만은 성균관 진사를 지낸 형님이 하인들을 대동해서 모시고 온 겁니다.”

 

최경선의 형 영대는 산길로만 며칠에 걸쳐 시신을 운반해온 뒤 몰래 묻었다. 그리고 그 위치에 대해서는 철저히 함구했다. 오로지 족보에만 한 줄 적어 넣었을 뿐이었다.

 

최명언 회장조차 직접적으로 전해들은 바가 전혀 없었다. 그가 조상의 묘소를 찾은 것은 한참 세월이 지난 뒤, 족보에 적힌 위치를 직접 찾아본 뒤였다.

 

△사발통문 작성부터 함께했던 핵심 인물

▲ 최명언 씨가 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 사무실 한 쪽 벽에 걸린 최경선 장군 그림을 가리키고 있다. 최경선 장군의 사진은 남아있지 않고, 프랑스 신부가 그렸다는 이 그림 한 점만 남아있다.

1859년에 태인에서 홍문관 대제학을 지낸 최성룡의 셋째 아들로 태어난 최경선은 ‘밑바닥 계층’으로서의 ‘농민’과는 거리가 멀었다.

 

당시 태인의 전주 최씨 집안은 상당한 부호였다. 맏형 영대는 성균관 진사였고, 최경선은 벼슬길에 오르지는 않았지만 상당한 학식을 갖춘 엘리트였다.

 

그랬던 그가 혁명에 가담한 이유는 명확하게 드러나 있지는 않다. 다만 1889~1890년 사이에 전봉준과 만나 교류하기 시작하면서부터 혁명에 대한 생각을 품어왔다고 추정할 수는 있다.

 

1895년에 이루어진 재판의 기록물인 전봉준 공초에는 “너는 최경선과 친한 것이 몇 년이나 되는가?”라는 질문에 전봉준이 “동향이므로 서로 친한 것이 5~6년이 된다”고 대답한 대목이 있다.

 

또 최경선에 대한 판결을 적은 제30호 판결선언서에는 “전봉준의 모주(謨主·음모를 꾀한 주체), 고굉(股肱·팔과 다리)이 되어 종시기사(終時其事)에 참여”라는 표현이 나온다.

 

이로 미루어볼 때, 최경선은 거사를 구상하는 단계에서부터 전봉준과 함께했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당시 다른 양반 지주층이 기회주의적으로 행동하거나 아예 반농민군 활동을 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사발통문에도 이름을 올린 그는 태인 지역에서 동학 교인들을 모아 전봉준과 함께 1894년 1월 10일(음력) 고부봉기를 일으켰다.

 

3월 백산봉기 이후에는 영솔장(군사를 직접 거느리며 지휘하는 선봉장)으로서 농민군을 이끌었다. 황토현에서의 승전을 시작으로 전주성 점령에 이르기까지 농민군 진격의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2차 봉기 때, 전봉준의 주력부대가 공주 방면으로 북상하자 최경선은 휘하 부대를 이끌고 손화중과 함께 광주로 향했다.

 

나주에서 수성군과 공방전을 벌이던 그는, 전봉준 부대가 우금치, 태인에서 연패하고 해산한 뒤에도 동복, 남평 등지를 누비며 혁명의 마지막 불꽃을 태웠다.

 

그러나 결국 동복 벽성리에서 밀고로 붙잡혀, 전봉준, 손화중과 함께 서울로 끌려가 재판을 받고 처형됐다.

 

최경선에게는 후사가 없었다. 아들이 있었지만 어려서 사망했고, 딸도 있었지만 그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그의 시신을 수습한 형 영대는 그의 여섯째 아들 종식(족보상 이름은 헌규)을 장군의 양자로 들여 후사를 잇게 했다. 최명언 유족회장은 바로 그의 아들이다.

 

△남은 자의 섭섭함

 

최경선은 이렇게 동학혁명의 전 과정에 주도적으로 참여했고, 동학사를 정리한 오지영이 ‘5대 장군’으로 평가했던 인물임에도 세간의 인지도는 높지 않다.

 

교과서에도 전봉준이나 손화중, 김개남에 대한 언급은 있지만 최경선에 대한 언급은 없다.

 

최명언 회장은 “물론 섭섭하다”고 답했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그는 “국가가 대우하는 것부터가 미흡하다”고 말했다. 2004년에 제정된 특별법에 의해 ‘참여자’라는 지위는 받았지만, 여전히 ‘국가유공자’로서는 인정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기념일 제정 논의가 지지부진한 것도 이들에게는 섭섭한 일이다. 동학농민혁명 기념일을 제정하자는 논의가 시작된 지는 오래됐지만, 혁명정신을 제대로 기리자는 뜻이 지자체 간의 자존심 싸움으로 번지면서, 논의 자체가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고 있다.

 

“이렇게는 안 되는데…….”

 

다시 갑오년을 맞은 감회를 묻자 그는 “동학혁명이 잘 알려져야 하는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남은 자’의 섭섭함이 진하게 배 나오는 목소리였다.

권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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