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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동학 연구·활동가들 - 김양식 박사 "동학 배경지식 뒷받침돼야 생생한 문화콘텐츠 가능"

수탈과 저항 이분법적 투쟁사 연구 한계 / 근대화 과정·종교로서의 영향 이해 필수

▲ 지난달 28일 충북발전연구원에서 만난 역사학자 김양식씨.
올해로 2주갑을 맞은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연구는 현재진행형이다. 1주갑이었던 1954년 당시까지는 농민들의 단순한 무력투쟁 정도로 치부됐다면 그 이후 100주년이되면서 우리 근대사의 중요한 한 대목으로 평가됐다.

 

이때부터 활기를 띠기 시작한 학계 연구의 발판을 마련한 것은 80년대 반정부 민주화운동에 나섰던 역사학도들이다.

 

당시 혈기 왕성했던 이들이 차차 역사학계의 전면에 나서면서 혁명 관련 연구활동도 그 성과를 드러내게 됐다.

 

이 중 두드러진 연구성과로 학계의 기린아로 꼽히고 있는 김양식 박사(54·충북발전연구원 선임연구위원)를 만나 그동안의 연구활동과 앞으로의 연구과제 등에 대해 들어봤다.

 

- 동학농민혁명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배경은.

 

“한양대 공대에 재학 중이던 시절인 80년대 초 민주화운동이 점차 확산되고 있었습니다. 그때 저도 거리로 나가 친구들과 함께 군사정권의 타도를 외쳤습니다. 그러면서 점차 이런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던 중에 대학 동아리를 통해 여러 사회과학 서적을 접하게 됐습니다. 이때부터 민중을 계몽하는 학자의 길로 들어서고자 하는 마음이 싹 텄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민중이 주도가 된 동학혁명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고, 깊이 파고들면서 어느새 제 전문분야로 자리잡게 됐죠.”

 

- 연구활동 중 가장 주안점을 둔 분야는.

 

“근대 농민운동이 일어나게 된 배경을 보면 토지 문제가 가장 큽니다. 처음엔 이런 국유지 관련 토지분쟁을 깊이 있게 연구했습니다. 그러다가 혁명 과정에서 집강소(혁명 당시 농민자치기구)를 다룬 기존 연구에 문제점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기존 연구자들은 집강소의 역할을 너무 일률적으로 확대 해석하는 오류를 범했습니다. 또 집강소는 전주화약 당시에 설치하기로 약속한 것이 아니라 전봉준과 당시 전라감사 김학진 사이 열린 회담에서 합의된 것입니다. 이와 함께 당초 집강소의 설치 목적은 민정기능을 위한 것이 아니라 혁명 이후 흐트러진 치안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다만 농민군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그 기능이 민정기능으로까지 확대된 것일 뿐입니다. 이것도 점차 반농민군이 힘의 우위를 점하면서 다시 치안유지만을 맡는 것으로 기능이 축소됐습니다. 이처럼 혁명을 다룬 기존 연구의 오류를 바로잡는데 중점을 뒀습니다.”

 

- 그간의 다른 역사학자들의 연구활동을 평가한다면.

 

“혁명 과정에서 민중의 존재를 너무 강조하다 보니 혁명이 일어나게 된 배경에 소홀한 측면이 있습니다. 민중의 투쟁에만 천착하다보니 동학의 조직과 실체에 대한 연구는 미진했던 것 같습니다. 1주갑 이후의 연구가 투쟁사 중심이었다면 2주갑 이후는 연구의 폭을 넓혀, 동학이 농민들로부터 지지를 받게 된 배경과 동학사상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가 이뤄져야 할 것입니다.”

 

- 동학 2주갑의 역사적 의의는.

 

“21세기 한국의 운명은 시시각각 다가오는 변화의 물줄기 속에서 큰 격변에 처할 것으로 보입니다. 근대의 혁명이 자본의 혁명이었다면 최근의 혁명은 정보를 가치로 삼습니다. 일반 대중들이 정보화사회에서 정보에 소외되고 조종당하는 상황이 심화하면서 정보 빈부격차가 커지고 있습니다. 또한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들의 각축도 눈 여겨봐야 합니다. 동학혁명을 거울 삼아 당시 민중들의 고민, 시대적 상황, 지식인들이 세상을 바꾸기 위해 했던 노력들을 현재 시대에 비춰봐야 할 것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찾아야 합니다.”

 

- 2주갑을 맞이했지만 아직 일반 대중들의 관심이 미흡한 데요.

 

“대중들이 혁명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자료가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문화콘텐츠 계발이 중요한 과제로 부각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콘텐츠를 창출하기 위한 대중문화예술가들의 혁명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지기 때문에 의미 있는 콘텐츠 발굴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혁명에 대한 이미지가 수탈과 외세 침략에 대한 저항이라는 이분법적 사고에만 빠져 있어, 동학을 해석하는 관점의 폭이 좁은 것도 문제입니다. 이에 앞으로는 혁명이 발발하게 된 이면을 들여다봐야 합니다. 종교로서의 동학이 농민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으며, 이후 근대화과정에서 동학이 우리나라 국가 형성에 미친 파장에 대한 이해가 필수입니다.이런 배경지식이 뒷받침돼야 보다 생생한 문화콘텐츠가 만들어져 대중들의 관심을 끌 수 있을 것입니다.”

 

● 역사학자 김양식 씨는 공대 출신…10년 넘게 동학연구

 

충북 청주 토박이인 김양식 박사는 지역의 역사·문화에 대해 관심이 깊다. 그는 다양한 연구활동을 통해 충북 역사바로세우기를 실현해나가고 있다. 그 중심에는 충북발전연구원 부설 충북학연구소가 있다. 그는 이곳에서 충북의 역사와 문화, 민속, 사상 등을 조사·연구하고 있다.

 

특히 그는 동학농민혁명을 주전공으로 삼아 충북지역의 동학 교단의 역할, 혁명에 투신한 충북인 등 지역사회를 중심으로 한 동학 연구활동에 매진하고 있다.

 

그는 원래 이공계 출신이다. 하지만 80년대 반정부 투쟁에 나서면서 고질적인 사회문제를 개선할 필요성을 느껴 역사교육학과로 전공을 바꿨다. 그리고 단국대 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한국 근대사를 주로 연구하다가 동학의 형성과 농민혁명 전개과정에 매력을 느낀 나머지 십여년 전부터 동학을 주로 연구하고 있다.

 

주요저서로는 〈지리산에 가련다〉 〈근현대 충북의 역사와 기억〉 〈충북의 하늘위에 피어난 녹두꽃〉 〈새야 새야 파랑새야〉 등이 있다.

 

그는 연구활동을 위해 전북을 자주 찾는다. 혁명 유적지가 다수 분포된 고창과 정읍, 전주 등 역사의 현장을 직접 답사한다. 이 때문인지 그는 지인들로부터 ‘반 전북사람’이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고 한다.

 

그는 “충북과 전북은 역사적 배경이나 사람들의 성향 등 닮은 구석이 많다”면서 “연구활동을 위해 자주 찾다보니 어느새 제2의 고향처럼 느껴진다”고 말했다.

 

그는 존경하는 동학연구자를 묻는 질문에 “이이화 선생님과 문병학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사무처장이다”며 “이 분들의 연구 발자취를 더듬어가다보니 지금에 이르렀다”고 말했다.

 

동학 2주갑을 맞아 이제는 동학의 근간에 대해 좀 더 파고들고 싶다는 김양식 박사. 그는 지금도 좁은 자신의 연구실 한켠에 무더기로 쌓아놓은 각종 서적들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을 것이다.

최명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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