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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동학 연구·활동가들] 배항섭 교수 "'근대' 에만 매달리는 연구 한계…미래지향적 접근 중요"

부르주아 혁명과 얼마나 다른지 살피고 '농민전쟁' 다양하고 풍부한 의미 밝혀야

   
▲ 성균관대 연구실에서 만난 배항섭 교수.
 

“농민전쟁은……”

 

배항섭 교수(성균관대)는 1894년에 일어난 대규모 민중항쟁을 가리켜 시종 ‘농민전쟁’이라고 불렀다.

 

2004년에 동학농민혁명 특별법이 제정되면서 일단 국가적으로 공인된 명칭은 ‘동학농민혁명’이다.

 

어떤 이들은 “이 사건의 본질은 ‘민중봉기’고 ‘동학’이라는 종교의 역할은 미미했으니 ‘동학’이라는 단어를 빼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동학’이라는 조직이 갖는 의미를 폄하해서는 안 된다”며 반박하기도 한다.

 

배 교수는 ‘농민전쟁’이라는 용어를 주장했다. ‘농민이 주도한’ ‘대규모의’ 변혁 시도였다는 점에서 ‘전쟁’이라고 부를 만하다는 것이다.

 

논쟁이다. 용어 하나를 놓고서도 논쟁이 벌어진다. 단 하나의 ‘정답’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각계각층이 제 나름대로의 논리를 펴며 연구를 진전시키고 있다.

 

‘조선후기 민중운동과 동학농민전쟁의 발발’, ‘임술민란과 19세기 동아시아 민중운동’ 등의 책을 펴냈고 지금도 꾸준히 관련 논문을 발표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보이고 있는‘동학농민혁명’ 연구의 권위자 배항섭 교수를 만나 지금까지 진행된 학계의 연구와 논쟁의 흐름을 들어봤다.

 

△동학혁명 연구, 군사정권기 거쳐 80년대에 절정

   

시작은 역시 일본인들이었다. 시대적 배경이 그랬다. 조선 말기와 일제 강점기, 항쟁을 했던 농민들은 여지없이 ‘반역을 일으킨 무리’였다.

 

일본인 사학자들은 이를 식민사학에 연결시켜, “조선사회는 이만큼 부패했다. 일본이 조선을 합병한 것은 조선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는 논리를 펴나갔다.

 

동학농민혁명에 관한 ‘한국인의’ 연구가 본격적으로 이뤄지기 시작한 것은 1931년, 김제 출신의 김상기(서울대 교수 역임)가 동아일보에 ‘동학과 동학난’이라는 글을 연재하면서부터다.

 

해방 이후에는 한우근이 ‘반외세’적 성격을 상대적으로 강조하며 ‘해방 이후 세대’의 연구를 이끌었다.

 

월북 학자인 전석담은 1949년 마르크스주의 사관을 통해 동학혁명을 들여다보는 시도를 했다. 그는 동학혁명을 ‘민중항쟁’으로 높이 평가하면서도 ‘봉건적 질서를 완전히 타도하지 못하고 근대적 자유를 누리는데에는 실패했다’며 이를 ‘한계’로 꼽았다.

 

또 50년대에는 김용섭이 ‘민중의 의식 성장이 낳은 변혁운동’이라는 관점으로 연구를 진행했다. 김용섭의 이런 연구는 4.19 혁명의 경험과 맞물려 이후의 연구들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반봉건·반외세’라는 공식은 이 때 굳어지기 시작한 것.

 

5·16 쿠데타로 집권한 정권이 ‘혁명의 정당성’을 만들기 위해 동학혁명을 건드렸다. 새벽종이 울리고 새 아침이 밝아오는 ‘근대’를 향한 열망이 함께했다. 그 반대편에서는 ‘민중에 의한 사회 변혁’이라는 이상이 투영된 연구가 이뤄졌다.

 

동학농민혁명 연구는 80년대에 폭발하듯 쏟아졌다. 이이화, 정창렬, 신용하 등의 걸출한 학자들이 저마다의 연구성과를 발표했다.

 

소장학자들이 모여 만든 단체인 한국역사연구회는 연인원 50명이 투입된 ‘1894년 농민전쟁연구’라는 5권짜리 책을 내놨는데, 이들이 해온 연구의 총결산이라고 할 만한 것이었다.

 

1994년은 동학혁명 100주년이었다. 전국적으로 연구 ‘붐’이 일었고, 본보도 기획취재팀을 꾸려 자료를 발굴했다.

 

△‘100주년’ 이후 퇴조…‘잃어버린 20년’

 

“그리고 100주년이 지난 다음에는 연구들이 확 줄어버렸어요.”

 

의외였다. ‘100주년’을 계기로 더 활성화된 것이 아니라 퇴조해버렸다니, 그 이유가 뭐였을까?

 

“절차적 민주주의에서 진전이 시작됐고, 1992년에는 문민정부가 들어섰죠. 그런 과정 속에서 ‘사회 변혁’에 대한 관심이 떨어진 것이죠.”

 

여기에, 1990년대 말에는 외환위기가 찾아왔다. 신자유주의와 함께 ‘먹고사니즘’이 우리 사회의 지배이념으로 떠올랐다. ‘사회 변혁’이 세간의 관심 범위에서 벗어난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냉전이 종식되고 포스트모더니즘과 같은 새로운 사조들이 나타나면서 이념의 지형이 크게 바뀌었다.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이뤄지던 일국사 중심주의적 연구 경향도 비판을 받았다. 우리 학계는 여기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동학혁명에 대한 연구는 ‘올 스톱’에 가까운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박사학위 논문조차도 가뭄에 콩 나듯 한 상황이었다.

 

“새로운 과제에 입각한 새로운 연구가 이뤄져야 하는데, 많은 연구자들이 100주년을 기점으로 농민전쟁 연구에서 손을 놓았고, 신진 연구자들의 유입은 이뤄지지 않고, 이렇게 침체된 것이 최근 20년이었죠.”

 

△동학농민혁명은 과연 ‘근대’를 지향했는가

 

연구가 전반적으로 침체된 상황이지만, 그럼에도 학계에서 요즘 가장 ‘핫한’ 이슈는 무엇인지 물었다. 배항섭 교수는 ‘근대’에 관한 논쟁을 꼽았다.

 

재일사학자 조경달은, 농민군들이 ‘서구적 근대’를 지향했다는 주류적 견해와는 달리, 농민군들이 ‘반자본주의’와 ‘반식민주의’를 포함한 ‘다른 의미의 근대’를 지향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자본주의적 소유관계’를 ‘근대성’의 요소로 본다면, 농민군이 주장한 ‘토지의 평균분작’과 같은 것은 이에 배치된다고 봤다. 따라서 서구적 개념의 ‘근대성’과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히 전세계적으로도 ‘민중혁명’은 ‘근대적 체제’를 세우려 했던 ‘부르주아 혁명’과는 달리 ‘어떤 새로운 요소가 자신들의 삶을 위협할 때 이에 반대하는 움직임으로서’ 일어났다는 점이 근거로 제시됐다.

 

배 교수의 생각은 어떨까?

 

그는 “농민전쟁이 분명 ‘근대’를 지향하기만 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반근대’라고까지 보기는 어렵다는 입장”이라고 말했다. ‘근대’와 ‘반근대’라는 구분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매우 독자적인 영역을 세우고 있었다는 것이다.

 

△‘근대성’ 틀 벗고 다양한 의미 살려야

 

“반봉건·반외세라는 것도 서구적인 기준에 농민전쟁을 맞추는 것이죠. ‘서구적 근대화’를 ‘우리가 달성했어야 하는 것들’이라는 측면에서 바라보고, 그걸 찾아내려고 하고.”

 

교과서에서는 동학농민혁명이 ‘국제 질서의 변동과 근대 국가 수립운동’이라는 단원 아래 ‘근대적 개혁 추진 과정’이라는 부분에서 소개되고 있다.

 

식민사관의 반작용이었다. “우리도 독자적으로 근대화를 이뤘다”고 말해야 했고, 역설적으로, 그럼으로써 우리는 언제나 서구의 경험에 ‘이만큼 미달’한 상태에 놓였다.

 

“사실 환경문제 같은 것만 보더라도, 인간의 이성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근대’라는 것 자체가 회의와 비판의 대상이지 않습니까? 이런 상황에서 ‘근대’에만 매달리는 연구는 문제가 있죠.”

 

현재에 맞는 연구, 동학혁명이 내포하고 있는 다양하고 풍부한 의미를 살리는 연구. 배항섭 교수는 그런 새로운 연구 경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 사건이 서구와는 얼마나 달랐는지, 얼마나 우리의 독자성이 있었는지를 보는, 그런 미래지향적인 연구가 필요합니다.”

권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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