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기사 다음기사
UPDATE 2025-11-08 05:48 (Sat)
로그인
phone_iphone 모바일 웹
위로가기 버튼
일반기사

(19) 동학 연구·활동가들 - 신명국 이사장 "공동체 의식 되살릴 수 있는 기념사업 고민해야"

1992년 100주년 기념사업회 출범·활성화 일조 / 연구영역 전국 확대, 세계사적 의미 조명 필요 / 느낌 있는 기념물·상징적 대표 공간 만들어야

▲ 2011년 5월 21일 열린 ‘동학농민혁명 기념일 제정을 위한 추진위원회’ 출범식에서 위원장으로 선출된 신명국 이사장이 인사말을 하고 있는 모습.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을 전후해 당시 사건을 새롭게 조명하고 기리는 작업들이 민간차원에서 활발히 이루어졌다. 그 선봉에 섰던 곳이 사단법인 동학농민혁명백주년기념사업회(이사장 이영호, 약칭 동백사)다. 100주년을 앞두고 1992년 창립된 이 단체는 학술·출판사업, 문화예술사업, 기념조형물 건립사업 등을 통해 갑오년의 역사를 곧추 세우고 대중들과 호흡해왔다.

 

학계 전문가·언론인·시민활동가·종교인 등이 모여 탄생시킨 동백사는 20여년간 시민사회단체 활동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했으며, 현재 전국 각지의 동학 관련 20여개 단체가 태동할 수 있는 기폭제 역할을 했다. 실제 동백사에서 작업했던 그간의 편찬 자료와 기념조형물, 문화예술사업들은 100주년 이후 지금까지도 학계의 연구와 기념사업의 교과서가 되고 있다는 평을 받는다.

 

동백사의 중심에 섰던 대표적 인사 중 한 분이 신명국 원광학원 이사장(63,옛 이름 신순철)이다. 그는 동백사 출범의 산파역이었으며, 10여년간 사무처장·사무총장 등으로 활동했고, 현재도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학계와 현장을 아우르며 20여년간 ‘동학’을 사랑해온 신 이사장을 지난 8일 만나 동학농민혁명을 기리는 일이 왜 중요하고, 어떻게 기려야 하는지 들어보았다.

 

신 이사장은 이날 인터뷰에서 동학농민혁명의 그림을 바꾸고, 기념사업의 상징적 공간을 만들자는 데 힘을 줬다. 또 민간차원에서 기념사업의 중심적 역할을 해왔던 동백사의 해체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100주년기념사업회가 어떻게 발족됐습니까.

 

“1989년은 프랑스혁명 200주년이 되던 해입니다. 당시 국내에서 이를 기념하는 기념사업추진위원회가 결성됐습니다. 80년대 중반부터 준비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정작 전북에서 한국근대사의 분수령이 됐던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을 기리는 움직임이 없었습니다. 〈문화저널〉에 ‘동학농민혁명 백주년을 준비하자’는 기고를 했으며, 전북대 호남사회연구회가 정읍에서 세미나를 가지며 분위기가 조성됐어요. 이후 91년 문화계·언론계 인사들을 중심으로 기념사업회 발기인 모임이 결성됐고, 이듬해 준비위원회 발족을 거쳐 창립대회를 가졌습니다. 한승헌 변호사·조용술 목사·김삼룡 전 원광대 총장이 공동 대표를 맡아주셨습니다.”

 

-개인적으로 동학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 혹은 배경이 있다면.

 

“87년 민주화운동으로 이룬 정치적 민주화가 우리사회를 변화시킬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원불교 전공자로서 원불교 대종상이 추구하는 개벽으로 연결될 것이라는 믿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희망과 기대는 대선에서 여지없이 깨졌고, 며칠간 울었습니다. 사회구조의 변화가 그리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과 인간으로서 한계를 느꼈습니다. 학교 강의만 할 수 없어 ‘동학’으로 도망을 간 겁니다.”

 

-10여년간 동백사 사무처장, 사무총장 등을 맡으며 여러 활동을 주도하셨는데, 동백사의 성과를 꼽는다면.

 

“제가 학교 다닐 때만 해도 동학란으로 배웠습니다. 5.16혁명 이후 동학혁명으로 정리됐지만, 정부는 국가사업으로 키우지 않고 정읍사건으로 묶었습니다. 동백사 발족 당시 기업들은 협찬을 꺼렸고, 교수들 조차도 발기인 참여를 꺼려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반정부운동으로 보고 뒷감당이 어렵다는 이유에서였죠. 동백사만의 역할은 아니지만, 시민운동 차원으로의 확대와 특별법 제정을 통해 이런 의식들을 불식시키는 데 일조했다고 봅니다. 또 연구사업을 많이 했습니다. 당시 내부적으로 연구분야에 편중되는 것 아니냐는 비판도 있었지만, 국내외 학술대회 개최와 동백사에서 펴낸 여러 권의 책들은 동학 연구에 큰 자산이 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활동과 성과에도 불구하고 동백사의 발전적 해체를 제안했다고 들었습니다.

 

“이사회에서 제안했는데, 농담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러나 진지하게 고민하고 검토할 필요가 있습니다.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이 설립된 만큼 재단으로 힘을 모아줄 필요가 있습니다. 정부의 돈으로 기념사업을 할 경우 방향성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시각도 있습니다. 그러나 국가가 기념하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고, 방향을 잘못 잡더라도 시간이 흐르면서, 혹은 견제를 통해 바로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재단에서 잘 해야하고, 그래야 통합효과가 있겠지요.”

 

-2주갑, 어떻게 기려야 하겠습니까. 우선 연구부문을 짚어주시죠.

 

“동학농민혁명 2주갑은 연구 쪽에서도 의미있는 해가 돼야 합니다. 그동안 연구가 전봉준 중심의 호남 주력부대 위주로 연구됐습니다. 이 부문은 어느 정도 다 밝혀졌습니다. 그러나 동학농민혁명이 전국적인 봉기인 데, 다른 지역의 연구는 아직도 초보적 수준입니다. 황해도에서는 전북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동원됐고, 서산·태인 홍성 등 충청 내포지구 역시 주력 못지 않게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곳입니다. 호남의 주력들이 체포된 후에도 전남 장흥, 경북 영해단, 충북 청주 등에서 이듬해 7월까지 싸운 기록이 나옵니다. 북한지역의 연구는 미답지 입니다. 지역연구로 혁명의 그림이 덧붙여져야 합니다. 그래서 1930년대 김상기 박사가 고부봉기에서부터 우금치 패퇴로 끝낸 혁명의 그림을 다시 그려야 합니다. 박정희 정권에서 호남 사건으로 묶은 혁명의 원판을 복원해야 합니다. 지역 연구로의 확대와 함께, 세계사적 의미를 조명해야 합니다. 중일관계 혹은 대국사만이 아닌, 아일랜드·필리핀 등 작은 국가들의 농민전쟁과 비교하는 등 세계사적 안목에서의 시야 확대가 필요합니다. 세계사에서 농민이 중심이 돼 근대화를 이룬 국가는 없었습니다. 동학이 그랬다면 우리의 오늘은 어땠을까 생각해봅니다.”

 

-기념사업이 왜 필요하며, 어떤 방향으로 진행되는 게 바람직한지.

 

“자라나는 후배들에게 어떻게 보여줘야 하느냐가 기념사업입니다. 그것은 교육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교육은 어떻습니까. 가정에서부터 경쟁으로 가고, 친구도 경쟁 상대인 데, 어떻게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쳐라고 할 수 있으며, 친구에게 구명조끼를 벗어줄 수 있겠습니까. 공동체 의식을 되살릴 수 있는 기념사업이 되도록 고민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기념조형물, 역사기념물만 하더라도 몇 m올리느냐 경쟁을 합니다. 느낌이 있는 기념물을 만들어야 합니다. 모든 기념사업이 새로운 방향에서 진행돼야 합니다. 특히 관련 대표적 공간이 필요합니다. 다행이 정읍에 기념공원조성이 추진되고 있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느낌이 있는 공간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 신명국 이사장의 못다한 이야기 "동학농민혁명 원인은 사회구조적 문제"

 

신명국 이사장은 안동이 고향으로, 전북과의 연고는 원광대 원불교 학과에 진학하면서다. 애초 사업회 사무처장에 전북대 이종민(영문과)·하우봉 교수(사학과)가 거명됐으나 두 분이 고사하는 바람에 맡게 됐단다. 익산을 오가면서 사업회 일을 맡는 게 버거웠으나 10년 가까이 사무처장 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사무처장을 그만둘 수 있었던 것은 1998년 갑상선암(4기) 수술을 받고 병실에 누우면서다. 그럼에도 한승헌 이사장이 처장직 사퇴를 받아주지 않아 간절한 심정을 담은 편지로 한 이사장을 감동(?)시켜 얻어냈다.

 

별도의 외부 지원을 받지 않고 회원들 회비에 의존하던 현실에서 사무처 직원들 월급을 감당하지 못해 이종민 교수와 함께 각각 1000만원씩 개인 대출을 받을 만큼 사업회의 사정은 어려웠다. 그럼에도 많을 때는 500명의 회원이 있어 든든한 힘이 됐단다.

 

학자 개인으로서는 연구분야에서 많은 것을 잃었다. 사업회에서 여러 권의 책을 냈지만, 그 자신의 이름이나 자신이 소속한 대학(원광대 사학과)으로 욕심을 내지 않았다. 사무처장을 맡은 관계로, 주요 학술대회 등에서도 사회나 토론을 주로 맡아 주제발표에서 멀어졌다.

 

현재 쟁점이 되고 있는 기념일 제정과 관련, 그는 논란 자체가 불명예라고 했다. 기념일을 제정하지 못한 것 자체가 ‘그 분’들에게 불효며, 안에서 치고 받고 싸우더라도 사회적 이슈로 떠오른 것은 문제라고 했다. 그는 또 동학농민혁명의 원인을 사회구조적인 문제로 보지 않고 조병갑의 삼정문란으로 몰고 간 당시 상황과, 세월호 사건을 유병언이라는 개인 책임으로 몰고 가는 현상도 100년을 뛰어넘어 맥락을 같이 하는 것으로 보았다.

저작권자 © 전북일보 인터넷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김원용 kimwy@jjan.kr
다른기사보기

개의 댓글

※ 아래 경우에는 고지 없이 삭제하겠습니다.

·음란 및 청소년 유해 정보 ·개인정보 ·명예훼손 소지가 있는 댓글 ·같은(또는 일부만 다르게 쓴) 글 2회 이상의 댓글 · 차별(비하)하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내용의 댓글 ·기타 관련 법률 및 법령에 어긋나는 댓글

0 / 400
기획섹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