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기사 다음기사
UPDATE 2025-11-07 06:55 (Fri)
로그인
phone_iphone 모바일 웹
위로가기 버튼
chevron_right 지역 chevron_right 고창
일반기사

김소희 명창 유품 도록 출간

고창 판소리 박물관 자료 바탕 삶·예술 조명 / 생전 사용하던 소품 사진들 해설 달아 수록

고창군은 일제 강점기 때부터 우리 음악의 높은 예술성을 널리 알린 만정 김소희 명창의 유품 도록을 출간했다. 그 동안 판소리의 역사와 소리문화에 대한 도록은 제작됐지만, 명창에 대한 도록 제작은 최초 사례로 매우 의미가 크다.

 

김소희 명창은 1917년 전북 고창군 흥덕면 사포리 335번지에서 출생했다. 김소희의 선대(先代)는 “사포 후포 3개리 6개 마을(지금은 13개 마을) 경계 내의 무업(巫業)”을 담당했고, 그 다음 그 업을 물려받은 사람이 김토산이었는데, 김토산은 이날치의 계보를 이은 고창 출신의 서편제 명창이다. 희대의 명창으로 꼽히는 국창 김소희의 출현은 고창의 오랜 역사와 전통의 산물이다.

 

김소희(金素姬)의 본명은 순옥(順玉)이며, 호는 만정(晩汀)이다. 천부적인 목소리를 지닌 판소리꾼인 그녀는 성음이 청미한 애원성으로 심금을 울렸으며, 여기에 삶과 예술에 대한 자기성찰과 노력이 더해져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명창이 됐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어린 나이에 명창의 반열에 들어서며 1930년대부터 판소리 활동을 시작했다. 해방과 6·25이후 암흑기에도 꾸준히 활동을 이어가면서 후학들에게 격조 있는 판소리를 보여준 근현대사의 살아있는 사표이다.

 

이번 도록은 고창판소리박물관에서 그동안 기증과 기탁, 수집 등으로 축적한 많은 자료를 통해 만정 김소희의 생애와 예술을 실증적으로 조명 해설하고 있다.

 

먼저 도록의 ‘1부 김소희 갤러리’에서는 김소희 명창의 딸인 박윤초 명창과 제자들이 소장하고 있는 많은 사진과 해설을 통해 김소희 명창의 삶을 생생히 조망하고 있다. 2부에서는 김소희 명창의 문화재인증서, 상패, 훈장 등이 실려 김소희 선생이 평생의 예술 활동을 통해 이룩한 업적과 이에 대하여 주어진 영예를 조명했다. 3부에서는 소리북과 악기, 4부에서는 일제 강점기부터 나온 음반들을 조명하고 있는데, 만정판 판소리가 완성되기까지의 기나긴 여정을 보여준다. 5부에서는 복식과 공연소품, 6부에서는 제자들과 주고받은 편지, 7부에서는 다재다능한 소리꾼으로서의 김소희 면모 중 하나인 서예 분야에서 국선에 입선한 글씨들이 실려 있다. 8부에서는 만정 김소희 명창의 생활유품들이 소개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장에서는 김소희의 생애 연대표와 함께 만정의 생애와 예술을 망라한 해설이 실렸다.

 

고창에서 출생한 김소희는 광주로 시집가 살던 언니에게로 가서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를 다니다가 13세(1929년)에 이화중선의 협률사 공연을 접하면서 소리에 매료되어 소리꾼의 길로 접어든다.

 

14세(1930년)에 송만갑으로부터 판소리를 사사했으며 15세(1931년)에는 남원 춘향제 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1등상을 받는 두각을 나타낸다. 16세(1932)에 콜럼비아 음반을 녹음하고 당시 경성방송국에 출연하는 등 10대에 이미 유명세를 탔으며 명창 반열에 들어섰다.

 

아울러 이 시기에 판소리뿐만 아니라 풍류방 문화였던 가곡, 시조, 무용 등 다양한 예능을 배워 다재다능한 면모를 보였을 뿐만 아니라 판소리에 대한 예술관의 기초를 형성하게 된다.

 

20대에 이르러서는 명창으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해나갔으며, 무엇보다도 스승 박동실을 만나 판소리 예술가로서 지평을 확연하게 넓혔으며 당시 지식인이자 율객이었던 남편 박석기를 만나 인연을 맺으면서 소리꾼으로서 자세와 가치관을 형성하게 된다.

 

30대에는 해방기와 6·25의 고난기가 이어지는 기간이었는데, 30대 전반에는 어성국악동호회를 조직하여 활발한 공연활동을 펼쳤으며, 30대 후반에는 전쟁이 끝나고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전 민속예술원)를 설립하는 등 판소리계 기둥으로 의미 있는 교육사업을 펼쳤다.

 

40대에는 판소리에 대한 예술적 자각과 함께 자신의 소리를 완성해 나가기 시작했으며, 대한국악원, 국립국극단, 국악협회 등 중책을 맡기 시작했고, 46세에 파리국제민속예술제 참여 등을 시작으로 공연의 무대를 세계로 넓혀나갔으며,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됐다.

 

50대에 이르러서는 자신의 창악 전수소를 설립하고 국제적인 명성을 떨쳤던 미국순회공연(카네기 홀 공연) 통해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어갔고, 공을 인정받아 공로상과 동백장을 수상(1973년 57세)했다. 1974년 58세에는 그의 역작이었던 만정판 심청가를 완성하여 완판으로 녹음했다. 1977년(61세)에는 만정판 춘향가를 완판으로 녹음했다. 국내 공연뿐만 아니라 국제공연도 더욱 확대했다.

 

70대에는 88서울올림픽 폐막공연 등 기념비적인 공연들과 방일영 국악상 등 각종 국악상을 수상했고, 국악협회장을 역임하는 등 중책을 수행해 나갔으며, 마침내 1995년 향년 79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사후 금관문화훈장에 추서됐다.

저작권자 © 전북일보 인터넷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김성규 skk407@jjan.kr
다른기사보기

개의 댓글

※ 아래 경우에는 고지 없이 삭제하겠습니다.

·음란 및 청소년 유해 정보 ·개인정보 ·명예훼손 소지가 있는 댓글 ·같은(또는 일부만 다르게 쓴) 글 2회 이상의 댓글 · 차별(비하)하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내용의 댓글 ·기타 관련 법률 및 법령에 어긋나는 댓글

0 / 400
지역섹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