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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지역별 유적지와 기념사업 - 완주] 대둔산 '농민군 최후 항전지' 문화재 등록 팔 걷어

전봉준 2차 봉기 준비 삼례 역참 터엔 교회 건물 / 삼례봉기 역사광장 '힘-하나되어' 조형물 눈길 / 안내판 없거나 잘못 표기 유적지 관리 아쉬움도

▲ 김정호 완주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장이 대둔산 등산로 안내판에서 최후 항전지가 있는 곳을 설명하고 있다.

전주가 ‘온전한 고을’이라면, 완주는 ‘완전한 고을’이다. 이름이 그렇고, 지리적인 생김새가 그렇다. 전주를 꼭 감싸고 있는 모양새를 하고 있기 때문에, 전주에서 다른 지역으로 나가려면 완주를 거쳐야 한다.

 

완주가 꼭 감싸고 있는 것은 전주 뿐만이 아니다.

 

동학교도들 사이에서 전봉준과 같은 변혁 지향적인 세력이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 1892년 11월에 완주 삼례에서 있었던 삼례 집회였다.

 

그리고 실패로 끝난 혁명의 최후 항전이 1895년 2월, 완주 대둔산에서 있었다.

 

완주는 동학농민혁명의 역사를 그대로 꼭 감싸고 있는 곳인 셈이다.

 

△삼례 역참 터

 

석 삼 자에 예도 례 자를 쓰는 ‘삼례(參禮)’는 조선 초 회안대군 이방간이 자리잡던 곳이라 사람들이 이곳을 지날 때마다 왕족에 대한 예우로 세 번 예를 갖췄다는 이야기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사통팔달 교통이 편리하고, 특히 서울로 가는 길목이어서 지리적인 요충지로 꼽혔다. 동학 교도들이 이런 곳에서 ‘교조 신원’과 ‘포교의 자유’를 외치는 집회를 연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동학 교도들이 집회를 연 자리를 정확히 어떤 지점이라고 특정할 수는 없다. 김정호 완주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장은 “이 마을 전체가 집회 장소였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래도 한 지점을 꼽자면 대체로 삼례 역참 터를 드는데,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이병규 연구조사부장은 “역참은 중앙 관리가 파견되는 기관”이라며 “이곳에 모였다는 것으로 삼례 전체를 장악했다는 추정이 가능한 만큼, 집결장소로서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삼례 역참 터는 역사에 한 번 더 등장한다. 바로 1894년 9월이다.

 

청과 일본이 각각 조선에 군대를 파견하고 전쟁을 벌이기 시작하자, 전봉준은 이곳에서 제2차 봉기를 준비한다.

 

대도소를 설치하고 각지에 통문을 보내는 등 재기포 준비를 서두른 전봉준은, 준비가 끝나자 10월 12일에 공주로 향했다.

 

이처럼 동학농민혁명이 태동했고 2차 봉기의 중심이었던 지점임에도, 안타깝게도 이곳에는 어떤 안내판이나 표지도 없다. 지금 그 자리에서는 교회 건물 공사가 한창이다.

 

김정호 회장은 “한쪽에 몇 평 정도의 땅을 얻어 기념관을 세울 예정이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이에 대해 완주군 문화관광과 관계자는 “삼례 집회 지점에 대해서 여러 가지 학설이 있기 때문에, 문화재 지정을 위해서는 학술적으로 먼저 정리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삼례봉기 역사광장

 

대신, 삼례집회와 봉기라는 역사적 사건을 기념하는 자리는 조금 떨어진 곳에 조성돼 있다.

▲ 2003년에 조성된 삼례봉기 역사광장에 있는 조형물 ‘힘-하나되어’.

역참 터에서 삼봉로를 따라 동쪽으로 가다가 삼례도서관과 향토문화예술회관이 있는 곳으로 진입하면, 왼편에 쇠스랑 든 손을 형상화한 커다란 조형물이 눈에 들어온다.

 

‘힘-하나되어’라는 이름을 가진 이 조형물은 ‘동학농민군 출진상’, ‘추념의 장’, ‘동학농민혁명봉기비’ 등의 다른 조형물과 함께 삼례봉기 역사광장을 지키고 있다.

 

2003년에 조성된 이 광장은 예술적으로 의미가 잘 형상화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특히 ‘힘-하나되어’는 동학농민혁명의 상징과도 같은 이미지를 갖고 있다.

 

하지만 광장 곳곳에 잡초가 나 있고 석재가 들떠있는 모습이 보여, 관리는 잘 이뤄지지 않는 것 같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

 

김정호 회장은 “원래 이 옆에 박물관을 지으려는 계획이 있었다”며 “하지만 계획대로 잘 이뤄지지 않아 현재는 벽돌공장이 자리해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한편 역사광장에서 도서관 방향으로 50m쯤 걸어 올라가면 ‘이도재영세불망비’라는 비석이 서 있다.

 

이도재는 동학농민혁명 당시 전라도 관찰사로서 농민군을 진압했던 인물이다. 김개남을 체포한 뒤 서울로 보내지 않고 전주 초록바위에서 처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둔산 최후항전지

 

다시 차에 올랐다.

 

대둔산은 삼례에서는 한 시간 가량 국도를 타고 달려야만 닿을 수 있다.

 

완주군과 충남 금산군·논산시에 걸쳐있는 대둔산은 높이는 해발 879m에 불과하지만 산세가 험준해 쉬이 오르기는 어려운 산이다.

 

동학농민군에 가담해 싸우던 금산지역 유지 최공우는 대둔산의 이런 점을 이용했다. 1894년 말과 이듬해 초 사이에 동학 지도자들이 대부분 체포된 상황에서, 그는 대둔산의 산세를 방패삼아 마지막 항전을 시도했다.

 

“앞으로는 일본군이 올라오는 게 보이고, 뒤로는 절벽이 있어요. 그래서 앞만 잘 지키면 버틸 수 있었는데, 일본군이 이걸 역이용해서 뒤로 올라가서 토벌한 거죠.”

 

접근조차 하기 어려운 곳에서의 항전은 오래 가지 못했다. 1895년 2월 18일, ‘뛰어내렸지만 나무에 걸려 목숨을 부지했다’는 한 명을 제외하고, 항전하던 농민군은 전부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다고 전해진다.

 

케이블카 정거장을 지나 등산로로 접어드는 지점에 이를 기리는 전적비가 세워져 있다. 완주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는 매년 삼례봉기 기념광장과 이곳에서 제사를 지낸다고.

 

한데, 기념탑 앞 알림판이 너무 낡아 글자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1894’년, ‘1895’년이 ‘1984년’, ‘1985년’으로 잘못 표기돼 있기도 했다.

 

대둔산을 자주 찾는다는 한 등산객은 “매번 산을 오르내리면서 보기는 했지만 이곳의 의미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고 말했다.

 

“조만간에 이것도 전부 고쳐야지요.”

 

김정호 회장이 안내판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항전지가 빨리 문화재로 지정되고, 일반인이 접근할 수 있는 통로가 생겼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한편 완주군은 대둔산 최후항전지를 문화재로 등록하기 위한 작업을 서두르고 있다. 산림청 등의 협조를 얻어 절차를 밟아 하반기에 문화재 신청을 하겠다는 것이 군의 계획이다.

 

● 완주동학혁명기념사업회 - 다음달 사단법인으로 독립, 지역 유적·혁명사 발굴나서

 

완주군의 기념사업은 완주동학혁명기념사업회가 주관하고 있다. 김정호 변호사가 3년 전부터 기념사업회의 회장을 맡아 활동하고 있다.

 

삼례 출신인 김정호 회장은 “동학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다”고 털어놨다. 그는 동료 변호사를 끌어들여 유적지 답사를 시작했는데, 답사를 계속할수록 동학에 대한 열정이 솟아났다고 말한다.

 

완주기념사업회는 삼례 봉기를 기념하는 행사와 대둔산 최후항전을 기리는 행사를 매년 진행한다.

 

특히 다른 지역에 비해 덜 알려져 있는 완주 지역의 혁명사를 발굴해내는 데 힘을 쏟고 있다.

 

김정호 회장은 “뭐든 자료를 문서화해서 남겨놔야 한다”고 강조한다. 최소한 유적지의 위치 정도는 남겨놔야 나중에라도 보고 연구든 뭐든 할 수 있다는 것.

 

완주기념사업회는 오는 8월에 사단법인으로 독립할 예정이다.

 

내년에는 완주지역에 있는 유적들을 발굴하는 것이 목표다. 아직까지 알려져 있지 않던 것들을 찾아 내년 10월께 책을 낼 예정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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