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 여름 '매일 1000명 입도' 교세 급성장 / 농민군, 봉기 초기에 읍치 외곽 거점으로 활동 / 전라도와 달리 지방권력 장악 못 해 한계 직면 / 최제우 처형된 대구 관덕정 터 등 곳곳 유적지
△서부지역, 호남농민군 활동 영향
동학이 창도된 고장, 동학의 모태였던 경상도에서 전개된 동학농민군의 활동은 동학에 입도한 농민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경상도 각지에는 1894년 봄부터 여름사이에 동학 교단에 농민들이 대거 입도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기존 교단조직의 포교활동에 의한 것이기도 하였으나, 무엇보다 호남지역에서 동학농민혁명이 발발한 이후 전라도 농민군이 보여준 승리와 폐정개혁활동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특히 전라·충청도와 인접한 경상도 서부지역은 호남지역의 농민군 소식이 수시로 전해졌다. 이는 관이나 보수층에게 위기의식으로 작용하였으나, 농민들에게는 오히려 변혁에 대한 열망을 부추기며 많은 농민들을 동학으로 몰려오게 하였다.
경상도 농민군의 활동은 크게 경상도 북서지역과 남서지역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북서지역은 6~7월경 매일 1000여 명이 동학에 입도할 정도로 교세가 급속도로 성장하였다. 이에 따라 각 면마다 접이 만들어지고 예천(醴泉) 등 교세가 강했던 지역은 만여 명 또는 수천 명으로 구성된 대·소접이 형성되었다.
봉기 초기 경상도 농민군의 거점은 읍치(邑治) 지역 외곽에 있었으며, 읍치 지역에 대한 공격을 자제하였다. 폐정개혁활동도 읍권을 완전히 장악한 다음 집강소를 통해 추진한 전라도와 달리 농민군의 거점인 읍치 외곽에서부터 시작하였다. 농민군의 개혁활동이 경상도 전 지역 차원에서 동시에 추진되거나 공통 강령을 내건 것은 아니었지만, 대체로 부호를 대상으로 한 토재(討財) 활동을 비롯한 반신분 활동과 부세수취제도 모순이나 지방관·이서배의 부당한 수탈에 반대하는 반관(反官) 활동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전라도와 달리 지방권력을 장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읍치 외곽의 농민군 거점을 중심으로 제한적으로 추진된 폐정개혁활동은 곧 한계에 부딪히게 되었다. 농민군의 세력이 미치지 못한 읍치 지역을 중심으로 이서배와 양반지주층에 의해 반농민군세력이 결집되고 보수집강소가 설치되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농민군과 보수집강소를 중심으로 한 반농민군 사이에는 물리적 충돌이 빈발하였다. 8월 초순 예천에서는 토재(討財) 활동을 벌이던 농민군 11명이 보수집강소에 체포되어 매살(埋殺)된 사건이 발생하였다. 농민군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읍치 지역을 봉쇄하면서 수성군과 대치하는 국면이 전개되었다. 양측은 수차례 협상을 하였으나, 결국 결렬되고 8월 28~29일 양일에 걸쳐 대대적인 공방전을 벌였다. 끝까지 전투를 피해보려던 농민군 지도부가 적극적으로 전투에 임하지 않는 상태에서 전투는 농민군의 패배로 끝났다.
경상도에서 농민군이 봉기하자 감영에서도 관군을 파견하였지만, 특히 북서부지역에서는 관군보다 오히려 지역 이서배·양반지주층으로 구성된 보수집강소의 민보군, 정부에서 임명한 소모사(召募使)가 모집한 소모영군 등이 반농민군의 중심세력이었다.
경상도에서는 부산에 상륙한 일본군이 서울에 이르는 연로에 병참(兵站)을 설치하고 연로의 주민을 강제로 동원하여 노역시키는 등 전라·충청지역에 비해 일본군과 직접적인 마찰이 일찍부터 시작되었다. 이에 따라 농민군은 봉기 초기부터 각지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경상도 농민군이 다른 지역에 비해 먼저 진압된 것도 일찍부터 일본 병참수비대가 진압에 가담한 데 기인하는 바가 컸다.
△경북지역, 유적지 및 기념시설 현황
경북지역 동학농민혁명 관련 유적지와 기념시설은 크게 세 축으로 구분할 수 있다. 첫 번째 맥락으로는 1860년 수운 최제우에 의한 동학 창도와 탄압, 동학의 포교활동과 그 과정에서 발생한 1871년 이필제 영해봉기, 그리고 개항 이후 일제의 경제적 침투 등으로 고조된 척왜정서가 임진왜란 300주기를 맞아 한층 비등해지던 때인 1892년을 전후하여 전개된 교조신원운동 관련 활동 등을 들 수 있다. 해월 최시형은 상주군 공성면 왕실로 들어와서 교조신원운동을 지도했다. 두 번째 맥락은 1894년 봄 전라도 지역에서 발발한 농민봉기 때로부터 미온적 태도에서 입장을 바꿔 9월 18일 동학교단에 총동원령을 내리고 일본군과 관군, 민보군 등의 연합세력과 맞서 치열하게 전투를 벌였던 것을 들 수 있다. 세 번째 맥락은 조선을 침략하여 대륙으로 진출하려는 일본의 청일전쟁 도발에 따른 동향을 들 수 있다.
첫 번째 축과 관련된 유적지는 수운 최제우의 동학창도와 탄압, 그리고 해월 최시형의 동학포교 활동과 1871년 이필제 영해봉기, 1892~93년 교조신원운동 등과 관련된 유적들이다.
수운 최제우의 동학창도, 탄압과 관련한 유적지 및 기념시설물은 수운 생가이자 무극대도(無極大道)를 깨닫고 동학을 창도한 경주시 현곡면 가정리이다. 이곳 입구에 ‘대신사 수운최제우상’이 세워져 있고, 정비된 용담정에는 ‘천도교 대신사 수운 최제우 유허비’도 세워져 있다. 경주시는 지난 2009년부터 이곳 용담정에 총예산 370억원을 투입하여 2017년까지 마무리할 계획으로 ‘동학 발상지 성역화 사업’을 수립, 추진 중이다. 이밖에도 대구시에는 수운 최제우가 체포되어 1864년 3월 10일 처형된 장소인 관덕정 터가 있고, 달성공원에는 ‘대신사수운최제우상’(최제우동상)이 세워져 있다.
다음으로, 해월 최시형이 은거하면서 포교활동을 하던 중 발생한 1871년 이필제 영해봉기 관련 유적으로 ‘병풍바위’, ‘영해관아’ 등이 있으며, 최시형이 은거하면서 1892년 10월과 11월 충청도 공주와 전라도 삼례에서 전개된 교조신원운동과 1893년 2월 광화문 복합상소, 3월 보은집회 등을 지도했던 상주시 공성면 효곡리 왕실마을이 있다.
두 번째 축인 1894년 동학농민군 활동 관련 유적지 및 기념시설물을 시군별로 살펴보면, 상주시에는 ‘상주관아터’, ‘남사정터’, ‘상주 동학농민혁명기념비’, ‘모동 중모장터’, ‘모서 농민군지도자 김현영 집터’, 농민군 지도자 강선보가 살던 마을이자 농민군 본거지 가운데 하나인 ‘임곡리’ 등이 있다. 예천군에는 동학농민혁명 당시 민보군에 의해 보수집강소로 사용되었던 ‘예천관아·객사’가 있고, 예천 동학농민군 근거지 가운데 하나였던 ‘금당실 마을’과 농민군과 관군·민보군 사이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던 ‘송림’이 있다. 또한 예천 금당실 일대 농민군 지도자였던 전기항의 묘소와 ‘동학농민군지도자 전기항의사 추모비’가 있으며, 금당실 함양박씨 유계소와 동학농민혁명 당시 예천 보수집강소와 민보군이 체포한 예천 동학농민군 11명을 생매장했던 ‘생매장 터’가 있다. 이곳에 생매장된 농민군을 추모하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농민군 공격으로 읍내가 모두 불에 타다시피 할 정도로 피해가 심했던 현재의 성주군에는 ‘성주관아’, ‘성주읍내’가 있으며, 동학농민혁명 당시 안동 유생들의 척왜봉기가 기도되었던 ‘안동향교’가 있다. 그리고 영덕군에는 1971년 3월 동학 2대 교주 최시형을 비롯한 동학교도들이 대거 참여한 이필제 영해봉기가 일어난 곳으로 ‘영해관아’가 그 유적지이다. 구미시에는 선산읍에 ‘선산 관아’와 선산읍성문 앞의 ‘선봉장 한정교 선산입성비’, 선산읍성 옆 소공원에 세워진 ‘갑오전쟁선산창의비’ 등이 있다.
김천시에는 동학농민혁명 당시 농민군 도소가 설치되었던 곳이자 이후 농민군 지도자들의 처형이 이루어졌던 장소였던 ‘김천장터’가 있으며, 문경시에는 1880년대 중반부터 동학접주 최맹순이 경상도 북부지역에 포교활동을 편 근거지이자 1894년부터 공개적으로 동학의 접 조직을 설치하고 농민군을 규합했던 역사적인 의미를 지닌 ‘소야리’(경북 문경시 산북면)가 있다. 현재 이곳에는 기념물이나 기념시설물이 설치되어 있지 않다.
세 번째 축은 일본군의 군수품 이동경로 등 일본군과 관련된 유적지이다. 경북 구미시 ‘해평 일본군 병참소’(쌍암고택), 문경시 산북면 이곡리 석문마을, 상주시 낙동면 일본군 병참소 등이 있다.
문병학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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