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지에서 왔다고 배척해서야
필자의 친구 한 사람이 좋은 직장을 버렸던 예화 하나가 떠오른다. 그는 제법 내로라하는 큰 회사를 다녔다. 초반에는 행복하고 희망한 출근이었다고 했다. 사장님도 인품이 고매하고, 회사는 퍽 합리적이며 민주적으로 운영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자기가 소속한 ‘과’에서는 거의 모두가 경상도 사람들이라 그들의 반감은 뿌리가 너무 깊어서 저 ‘카인의 냉소주의’에 몸서리쳤다고 했다. 정치인 거두들이 지역감정을 되새김질할 때여서 그곳 과원들과 동화되기는 너무나 어려워 직장을 스스로 사직했다는 고백이다. 가령 점심때가 되면 자기들끼리만 눈짓으로 교감하여 한 식당으로 몰려가므로 혼자만 덩그렇게 남는 신세였단다. 식사때 정경도 그렇거니와 업무처리 하나하나에서는 오죽했을가.
그런데 우리 사회에 만연된 것은 저러한 지역 감정뿐만 아니다. ‘ㅈ’신문을 구독하는 사람과 ‘ㅎ’신문을 구독하는 독자는 서로 친구지간일망정 한자리에 앉았다하면 치열한 논쟁이 벌어진다. 가장 정론에 입각하여 불편부당하게 진실을 기술해야 할 신문이 저리도 음흉한 속내를 감추고 소위 거짓 정의를 내걸고, 가장 이성적입네하고 위장하는 모습은 너무나 꼴사나운 모습이다. 대전제가 민주-국민이 주인이 된다는 발상에서 펜은 달려가야 함에도 어떤 집단에 영합하는 자기 모순 속에 함몰하는 꼴이라니, 종교의 화두가 그렇고, 정치의 각론이 또한 그렇고, 국가관이나 시국관이 또한 양극 쏠림현상으로 치달으니 ‘정반’에서 ‘합’은 절대로 도출되지 않는, 냉소주의의 영토가 되어버린 것이다. 문화의 충돌도 아니다. 기득권층과 이에 반하는 계층의 상호 이반이다. 서울 강남권과 강북권의 상호반대를 위한 반대의 의식들은 또한 어떻던가 또는 어떤 분야, 그 재정적 편중과 예산의 몰아주기 행태는 치졸을 넘어 파렴치함의 극에 도달한다.
우주의 대 섭리 안에서, 과학이나 철학의 영토인 공적 공간이란 개념에서 출발한다면,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추구하는 공리주의에 입각한다면, 합리적 이성주의가 이 땅에서 향유되지 못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반목의 장막 거두고 화목해야
조영남의 ‘화개장터’란 노래가 있다. 5일장으로, 하루는 전라 경상 두 고을 사람들이 서로의 냉소주의 장막을 거두고 화목하다는 내용이다. 차라리 5일장에서, 나흘은 화목하고 하루만 냉소해도 그게 나을 성싶다. 아니 5일뿐만 아니라 세월 네월 언제나 영원함으로 가는 민족 화해의 계단에 올라서야 할 것이다.
‘세월호’는 냉소의 ‘네월호’가 파생, 만연되고, 단순한 인도주의적 정의도 흐려지고 있다. 그 참상의 현장인 진도 앞 바다는 싸늘한 냉소의 짙은 안개가 뒤덮고 있다. 너무나 안타까운 반 인간주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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