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백제 강성함 느껴지는 산성 유적
전주 동고산성 발굴조사를 통해 후백제 산성의 특징이 일목요연하게 파악됐다. 승암산을 한 바퀴 휘감은 성벽은 방형 혹은 장방형으로 잘 다듬은 성돌을 가지고 쌓았다. 성돌은 마치 옥수수 낱알모양으로 그 끝이 상당히 길어 달리 견치석(犬齒石)으로도 불린다. 성벽의 뒤쪽에는 성돌과 뒤채움석이 서로 견고하게 맞물리도록 기다란 돌로 채웠다. 고려 말 전주성을 축성하면서 성돌 대부분이 반출됐지만 후백제 산성의 비밀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조선시대 십승지지에 그 이름을 올린 운봉고원을 감싼 백두대간에 동고산성과 축성방법이 비슷한 산성이 많다. 아마도 철의 왕국인 운봉고원을 지키려는 후백제의 국가 전략이다. 금강과 섬진강 물줄기를 갈라놓는 금남호남정맥에도 후백제 산성이 있다.
견훤이 다시 쌓은 것으로 전해지는 팔공산 남쪽 장수 합미산성은 마치 두부처럼 잘 다듬은 견치석으로 쌓아 지금도 성벽이 위풍당당함을 자랑한다. 장수군 장계면 서쪽 방아다리재 부근에 침령산성이 있는데, 후백제와 신라의 사신들이 오갔던 사행로(使行路)가 통과하던 길목이다. 성벽의 높이가 8m 내외로 전북의 산성 중 가장 높고 웅장하다.
진안고원의 서쪽을 휘감은 금남정맥에도 후백제 산성이 많다. 달리 호남의 지붕으로 불리는 진안고원의 금산분지에서 전주방면으로 향하는 길목에 백령산성이 있다. 이 산성을 쌓기 위해 견훤이 금산군 남이면 대양리에 경양현을 설치했다는 대목에서 마음까지 숙연해진다. 진안 용담댐 일원에서 전주로 나아갈 때 주로 넘었던 노래재 남쪽에 환미산성이 있다.
이 산성은 서쪽 골짜기를 휘감은 포곡식으로 옥수수 낱알모양의 성돌과 품자형 성벽쌓기, 성벽의 뒤채움이 동고산성과 똑같다.
삼국시대 때 가야계 왕국으로까지 발전했던 백두대간 속 운봉가야와 장수가야에 대한 견훤의 관심이 아주 컸던 것 같다. 그 이유는 백두대간과 금남호남정맥을 따라 집중 배치된 많은 산성을 다시 고쳐 쌓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주로 향하는 내륙교통로가 통과하는 길목에 위치한 산성들까지 개축함으로써 철통같은 동쪽 방어망을 구축했다. 후백제는 융성할 때 갑자기 망했다.
그리하여 산경표 속에 남겨놓은 후백제의 산성들을 보면 저절로 견훤의 자신감과 후백제의 강성함이 느껴진다.
세계문화유산 등재 추진돼야
얼마 전 남한산성이 세계문화유산에 그 이름을 올렸다. 서울 북한산성과 함께 한성을 지킨 조선시대 주된 피난성이다. 견훤은 평상시 인봉리 왕궁에 머물러 있다가 위급할 때 피난성인 동고산성으로 이동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안타깝게 동고산성의 사용 기간이 무척 짧았던지 후백제의 역사이야기가 거의 없다. 이를 근거로 동고산성이 축성되기 이전까지는 전주 남고산성이 후백제의 피난성으로 이용된 것이 아닌가 싶다. 삼국시대 이후의 왕조들이 대부분 세계문화유산에 그 이름을 올렸기 때문에 후백제 문화유산도 세계문화유산 등재 추진이 조속히 시작됐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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