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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영원한 약속 ①

김제출신으로 동아일보 논설위원과 제15·16대 국회의원을 지낸 장성원씨가 단편소설 ‘영원한 약속’을 발표했다.

 

여행길에서 친구에게 들은 이야기를 소설로 엮은 작품인데, 전주를 배경으로 그 안에서 살아온 이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특히 일제강점기의 풍경이 생생하다.  작품을 연재한다.

3년 전 초가을이었다.

 

전화벨이 울렸다.

 

“네에……”

 

“한 의원님 댁인가요?”

 

“예, 그렇습니다. 제가 한입니다만.”

 

“안녕하셨어요. 저, 정승철 교장 아들입니다.”

 

“안녕하셨어요. 아버님 강녕하신가요?”

 

“아버지께서 오늘 아침 돌아가셨습니다. 전북대학 장례식장에 모셨습니다. 203호실입니다, 2층 3호실입니다.”

 

“아, 그러셨어요. 우선 조의를 올리고 교장선생님 명복을 빕니다. 이따 병원으로 가겠습니다. 저를 여러 가지로 친조카같이 지도해주셨는데……”

 

한대희(韓 大熙)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전화를 끊었다. 정 교장은 정말 한대희에게 고맙게 해 준, 잊을 수 없는 분이었다. 한대희가 세 차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을 때 헌신적으로 선거운동을 지원해 주었다.

 

선거구 안에 살고 있는 옛날 제자들의 명단을 꼼꼼하게 작성, 일일이 찾아가서 지지를 부탁했다. 운동을 하시는데 교통비로 쓰시라고 얼마를 손에 쥐어드려도 끝내 사양하고 오히려 매번 후원금을 내놓았던 그런 분이었다.

 

한대희는 서울 K대 법대를 졸업한 다음 해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하고 판사 생활을 하다가 그만두고 정계에 투신했다. 두 번은 무난히 당선되었으나 세 번째는 호남에 불어 닥친 소위 황색바람에 맥을 못 추고 낙선, 지역사회에서 변호사로 활동해 왔다. 지금도 변호사 간판을 내걸고 있지만 70대 초반의 고령이라 일거리는 많지 않고 원로로서 대접 받으면서 세월을 보내고 있다.

 

한대희가 먼저 조화를 보내고 조문을 간 것은 저녁 9시가 조금 넘어서였다. 저녁 식사 시간 때 밀려 왔던 문상객들이 많이 빠져 나가고 손님들이 드문드문 오는 시간이었다.

 

한대희는 조문을 마친 다음 상주의 안내에 따라 자리를 정하고 차를 마시면서 상주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버지께서는 오늘 아침 목욕을 하시다가 탕 안에서 그대로 운명하셨습니다.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고 그러네요.”

 

“아, 그러셨어요! 더 오래 수를 하셨어야 하지만, 아흔 여섯까지 건강하게 사시다가 그렇게 돌아가셨으니 얼마나 큰 복을 타고 나셨습니까. 고종명이 오복 중의 하나라고 하지 않습니까.”

 

90이 넘으신 노모를 모시고 있는 한대희로서는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잠시 후 상주가 무슨 비밀 얘기를 꺼내는 것처럼 나직한 목소리로 “아버지께서 얼마 전에 ‘내가 죽거들랑 한 의원과 한 의원 어머님께 꼭 알려드려라.’ 유언처럼 말씀하시더라고요. 어머님께서는 건강이 어떠신가요.”

 

“그런대로 건강하시고 식사도 잘 하시고 계세요. 연세가 아흔 넷이셔서 마음을 못 놓고 있지요.”

 

때마침 다른 조문객이 와서 상주도 일어서고 한대희도 따라 일어섰다. 아파트로 돌아오는 길에 승용차 안에서 한대희는 아까 상주가 한 말이 되씹혔다.

 

‘아버지께서 얼마 전에…… 한 의원과 한 의원 어머님께 꼭 알려라. 유언처럼 말씀하시더라고요.’

 

‘나에게 알리는 것이야 당연하지만 왜 굳이 어머니에게까지 꼭 알리라고 유언처럼 말했을까. 자식을 앞에 놓고 간곡하게 마지막 부탁을 하였다는 것은 어떤 사연이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런 의심이 들었다. 그러나 세상을 떠나는 분들에게 어떤 곡절이 있다한들 어쩌랴 싶어 곧 생각을 지워버렸다.

▲ 삽화=권휘원 화백

한대희는 효성이 지극한 사람이었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아침 저녁으로 어머니께 문안을 드리는 것을 일과로 삼았다. 이부자리도 펴드리고 개 드렸다. 병원을 가실 일이 있으면 어머니 손을 잡고 자신이 모시고 가는 효자였다.

 

그 이튿날 아침 한대희는 어젯밤 조문 다녀온 일을 어머니에게 말씀드렸다. 교장 선생님이 욕조 안에서 숨을 거두었다는 이야기, 교사 출신 딸 셋에 아들 하나를 두어 호상이었고 장지를 선영으로 정했다는 이야기, 그리고 그 유언 이야기도 해드렸다.

 

“착하고 믿음직한 사람이었지. 복을 받아 마지막도 잘 가셨구나. 좋은 데로가셨을 게야……” 어머니의 반응은 짧고 담담했다. 그러나 아들의 시선과 마주치지 않고 다른 데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눈시울이 붉어지고눈물이 어려 있는 것이 보였다.

 

“교장선생님이 학교 다닐 때 외가에 와 있었다면서요. 어머니하고 한 학교에서 교편을 잡으시고……”

 

한대희는 그 인연으로 교장선생이 자기에게 각별하게 대해주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렇지. 내가 언젠가 얘기한대로 네 작은 외삼촌 가정교사로 한 일 년 우리 집에 와 있었지. 같은 학교에서 선생으로 있었고.”

 

어머니 최찬옥(崔 璨玉)과 정승철(鄭 承喆) 교장이 처음 만난 것은 바로 최찬옥의 집에서였다. 최찬옥이 전주여자고등보통학교 2학년, 정승철이 전주사범학교 4학년 때였다.

 

찬옥의 집은 풍남동 은행나무골목 안에 있었다. 수령 5백 년이 넘는 은행나무가 서 있다고 해서 부쳐진 동네 이름이었다.

 

은행나무 서쪽에는 일본인들의 관사와 사택으로 쓰이는 왜식 주택들이 해를 거듭할수록 늘어났고 은행나무 동쪽에는 양반가의 오래된 한옥들이 버티고 있었다. 동서가 대조를 이루었다.

 

찬옥의 할아버지는 전주에서 이름이 알려진 유학자요, 한학자였다. 찬옥의 아버지도 지조가 있는 선비 같은 인사였다. 이 한옥을 지키고 사는 것이, 이 집터를 지키고 사는 것이 일제의 침투에 대항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찬옥의 집은 솟을대문이 있는 큰 집이었다. 승철은 사랑채에서, 보통학교 5학년인 찬옥의 남동생을 가르치는 가정교사였다. 식사도 사랑채에서 동생과 겸상으로 했고 주인 내외가 부르기 전에는 안채 출입이 사실상 금지돼 있었다.

 

찬옥은 할머니와 함께 안채 건넌방을 쓰고 있었다. 서울에서 사립 고등보통학교를 다니는 찬옥의 오빠는 방학 때만 전주로 내려와 지냈다.

 

남녀유별이 철저한 이 집안에서 승철이 찬옥의 얼굴을 보기는 어려웠다. 어쩌다 보는 찬옥의 얼굴은 희면서도 막 피기 시작하는 연꽃 봉오리처럼 엷은 분홍빛을 띠고 있었다.

 

자기와는 여러 모로 거리가 먼 부잣집 ‘공주아가씨’였다. 안채 신방돌에 가지런히 놓인 찬옥의 하얀 운동화가 꽃처럼 가슴에 안고 싶도록 예뻤다.

 

정승철은 전주에서 북쪽으로 30리 정도 떨어진 농촌 출신이었다. 아버지도, 형님도 농사를 짓는 소작농이었다. 승철은 그곳 보통학교를 1등으로 졸업하고관비 혜택을 받으면서 선망의 적이었던 전주사범에 입학한 것이다.

 

1학년 때는 친척 집에서 하숙을 했다. 학교에서는 전주사범 모든 학생의 하숙집 앞에 학교 배지와 학생 이름이 새겨진 문패를 달도록 했다. 선생들이 그것을 보고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서 학생들의 동정을 살폈다.

 

학생들의 반일(反日)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친척 어른이 그런 감시가 싫다고 여러 차례 말해 어쩔 수 없이 그 집을 나와야 했다.

 

2,3학년 때는 아버지가 어렵게 사 준 자전거로 왕복 60리 길을 통학했다. 날씨가 좋을 때는 그래도 다닐 만 했다. 그러나 비가 많이 내리는 날이면, 다리가 없는 소양천의 물이 불어나 10리 길을 더 빙 돌거나 자전거가 흙탕물 속에 빠져 고생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그때 단련으로 승철은 정신력과 체력이 강인해졌다. 특히 하체가 강철 같아져 학내외 씨름판에서 그를 당해내는 적수가 없었다.

 

4학년이 되면 전원 기숙사 생활을 하게 돼 있었다. 그러나 승철이 4학년으로 올라갈 무렵 기숙사에 화재가 발생했고 물리 선생님 소개로 찬옥 집의 가정교사로 들어온 것이다.

 

물리 선생님은 학교에서 딱 두 분이셨던 조선인 선생님 중 한 분으로 동경물리학교를 나온 수재였다. 찬옥의 아저씨 항렬이 되는 친척이라고 했다.

 

승철은 4학년 초 조선말과 조선 문학을 지켜나간다는 뜻을 모아 비밀리에 조직된 동인회에 가입했다. 이름은 ‘일곱 봉우리’. 학교 서쪽에 있는 완산 칠봉(完山 七峰)에서 이름을 따왔다.

 

높은 산봉우리 같은 웅지를 품고, 해가 갈수록 날을 세우는 일제의 조선어 말살 정책에 저항하자는 젊은이들의 기개로 모임을 만든 것이다. 일곱 명이 각자 시를 써 등사판으로 ‘일곱 봉우리’라는 동인시집을 만들어 회원들끼리만 세 부 씩을 나누어 가졌다.

 

승철의 시 제목은 ‘꽃신’. 찬옥의 하얀 운동화를 그리워하면서 시로 지은 것이다.

 

꽃신

 

나의 가슴 속에

품고 있는 님의 꽃신

 

님은

그 신을 신고

 

들꽃들이 피어 있는 호젓한 길을

나와 함께 말없이 걸어갑니다.

 

벌들이 잉잉대는 과수원 길을

둘이서 손을 잡고 걸어갑니다.

 

달맞이꽃 곱게 핀 이슥한 밤길을

나와 함께 뚜벅 뚜벅 걸어갑니다.

 

별들이 오가는 저 하늘 길을

둘이서 멀리 멀리 걸어갑니다.

 

꽃신을 가슴에 안고

나는 밤마다 꿈을 꿉니다.

 

승철은 시집 세 부 중 한 부를 찬옥의 동생을 시켜 찬옥에게 전달케 했다. 여기서 뜻하지 않은 불찰이 생기고 말았다.

 

찬옥의 동생이 찬옥과 단둘이 있을 때 전했으면 아무런 탈이 없었을 것을, 찬옥의 어머니, 방학 중이라 집에 내려와 있었던 찬옥의 오빠 그리고 찬옥이가 안방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이것 선생님이 누나에게 주래.”하면서 시집을 건네주려 했다. 그러자 가정교사가 찬옥에게 줄려는 것이 무엇인가 궁금하게 여겼던 오빠가 그것을 가로채 승철의 시를 읽어 보았다. 의아해 했던 어머니가 물었다.

 

“그게 뭐야?”

 

“승철이가 연애시를 썼네요.”

 

“뭐, 연애편지를 써!”

 

연애시를 썼다는 말을, 승철이가 찬옥에게 연애편지를 썼다는 말로 알아들은 어머니는 적잖이 놀라는 안색이었다.

 

“망측스러워라!” 한 마디로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일어난 것처럼 어이없어 했다.

 

그 바람에 아무런 영문도 모르는 찬옥은 당황해져 얼굴이 홍당무가 됐고 동생은 재미있다는 듯이 웃고만 있었다. 이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 오빠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어머니를 잠자코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처녀가 되어가는 딸을 둔 어머니는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며칠 생각 끝에 선생을 내보내기로 작정했다.

 

그런데 때마침 신축 기숙사가 완공돼 승철은 자연스럽게 이 집을 떠나 기숙사로 옮기게 됐다. 그 후 찬옥과 승철은 만나 본 적이 없고 소식도 들어보질 못했다. 〈계속…〉

장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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