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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김형미 시집 〈오동꽃 피기 전〉을 읽고] 삶의 낯설음과 쓸쓸함, 그 불편함에 대하여

김형미 시인의 시집 ‘오동꽃 피기 전’을 읽으며 나는 불편하다. 그리고 아프다. 다리가 부러지고 팔이 잘라지는 폭압적 통증이 아니다. 작고 나지막하게 그러나 길고 집요하게 지속되는 아픔이다. 왜 시인의 시들은 나를 불편하고 아프게 하는가?

 

이 시인이 시집 도처에 깔아둔 불편함의 첫 번째는 시인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와의 불화에서 온다. 대저 시인들은 불편한 세계를 극복하는 방법을 그들의 시 속에 제시하곤 한다. 이러한 불화에 대한 시인들의 도전은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주제다.

 

시인이 세상과의 불화를 통과하는 방법으로 차용한 것은 ‘낯설음’과 ‘서정’이다. 이 시집에서 낯설음은 불화를 잊게 하는 미약과도 같다. 때문에 김형미의 낯설음은 치유의 낯설음이다. 서정의 낯설음이다. 서정과 낯설음은 메타 언어적 측면에서 보면 전혀 어울릴 수 없는 관념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녀의 시에 있어 낯설음과 서정은 자웅동체처럼 서로 밀접하다.

 

“무덤 속에서 그는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너무 오랫동안 죽어 있었군, 그가 나직이 내뱉자/컴컴한 무덤 안이 순간적으로 시끄러워졌다/…/진짜 두려운 것은 자신이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 ‘죽은 사람’ 부분).

 

시인이 이 시집에 깔아둔 두 번째 불편함은 삶이 가져다주는 신산함과 쓸쓸함이다. 이 감정들은 귀를 막고 싶은 비명에 가깝다. 독자들에게 똑같이 고통스러워보라고 강요하는 것 같다. 왜 시인은 폼나고 그럴듯한 문학적 질료로서의 쓸쓸함을 거부하고 등을 쿡쿡 찌르는 것만 같은 쓸쓸함과 낯설음을 굳이 자신의 영토로 삼았을까?

 

“그림자가 생겼다 그림자는/나도 되고 너도 된다/내가 네가 되면/…/나와 그림자 중 누가 나이고/누가 나의 그림자인지 구분하기 힘들어진다/…”( ‘동행’ 일부).

 

시인의 쓸쓸함은 지극히 현실에 기초하고 있다. ‘헬조선’이라는 말이 있다. 이 신조어 등장의 이면에는 청년들의 절망과 분노가 있다. 무급인턴, 비정규직, 취업난 등의 현실이 이 나라를 ‘지옥’처럼 느껴지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 나라의 통치자들은 ‘우리의 위대한 현대사를 부정하고 세계가 부러워하는 우리나라를 살기 힘든 곳으로 비하하고 있다’면서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부조화를 개인의 노력 부족으로 돌리고 있다. 이러한 현실 아래서 낭만적 의미의 쓸쓸함은 얼마나 철딱서니 없는 농짓거리에 불과한 것인가.

 

따라서 시인의 김형미식 쓸쓸함은 당연하다. 혹자는 그렇다면 이 시인의 쓸쓸함은 분노인가라고 되물을지도 모르겠다. 터무니없는 질문일지 모르나 정답을 비껴가지는 않았다. 다만, 이 시인의 시적 미학은 그 분노를 쓸쓸함 속에 잘 담아 놓았을 뿐이다.

 

“안개가 자욱한 길을/몇 번이고 헤매다 돌아왔다/…/내심 발밑에서 바스락거려/홀린 듯 이 세상에 없는 시간을 견디다 돌아왔다”(“십일월’부분).

 

‘이 세상에 없는 시간’이라니. 더 늦기 전에 김형미 시인이 비명처럼 내지르는 쓸쓸함에 귀를 기울이자. 그녀의 영토에 놀러가서 술 한 잔 하자.

△정동철 작가는 2006년 광주일보와 전남일보 신춘문예에 시로 등단, 2014년 작가의 눈 작품상을 수상하였다. 전북작가회의 부회장이며 최근 시집 '나타났다'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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