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여행을 떠났던 직원이 얼마 전 사무실에 찾아 왔다. 삶의 보폭을 넓히고자 세계로 향했던 그의 도전과 열정이 기특해 나는 그의 퇴직을 만류하지 못했다. 반가운 마음과 함께 떠날 때 약간의 여비라도 보태주지 못한 미안함이 떠오를 무렵 그는 현지에서 여행경비를 해결한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오랜 기간 준비를 통해 여행경비를 마련한 그는 부족한 경비를 버스킹(busking, 길거리에서 행해지는 공연)을 통해 해결할 수 있었다고 했다.
국악 콤플렉스, 엘리트주의에 물들다
유럽 각지의 길거리에서 열정을 다해 국악기를 연주하던 그는 자부심이 가득 찬 대한민국 국민이자 다른 버스커들에게 결코 뒤지지 않는 예술가였을 것이다. 여행경비를 벌고자 했던 그도 그렇거니와 가난한 버스커들은 생계를 버스킹을 통해 해결하기도 하지만 단순히 돈벌이가 목적은 아닐 것 같다. 아마도 무대처럼 정형화된 공간에서 거리로 뛰쳐나가 보다 쉽고 친숙하게 그들의 예술세계를 공유할 대상을 찾고 싶어서 일 것이다. 대중과 가까이에서 교감하기 위해 길거리도 마다치 않는 버스커들을 생각하다보니 국악계의 콤플렉스가 생각났다.
신분제가 존재하지 않는 현대사회를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악계는 한 때 태생적으로 미천하다는 콤플렉스에 사로잡혀 있었다. 조선시대 궁중에서 음악을 연주하던 악공은 물론이거니와 그림을 그리던 화원, 도자기를 만들던 도공 등 우리가 예술가로 칭하는 일을 하던 사람들은 모두가 지배계층이 아닌 낮은 신분의 사람들이었다.
그럼에도 유독 국악계가 심한 콤플렉스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은 민간음악의 꽃이라 할 수 있는 판소리, 산조, 시나위 등의 근간에 기녀와 무당이 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이들은 사회적으로 가장 낮은 계층의 신분이었다. 그러나 이들 전문적인 집단이 있었기에 민간예술이 지속적으로 발전하고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었다.
지금은 그 자리를 해금에게 내어주긴 했지만 가야금은 불과 얼마 전까지 대학입시에서 가장 경쟁률이 높은 악기였다. 그만큼 전공자가 많았다는 것이고 경쟁률이 높은 만큼 가야금 전공자 중에는 뛰어난 인재들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아탑이라 불리는 지성의 공간, 대학에서 조차 가야금이 기생의 악기라는 악의적 농담이 오가곤 했다. 대학에서 가야금을 전공한 1세대들은 이러한 이유로 가야금을 들고 다니며 주변의 눈치를 봐야했다. 이렇다보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콤플렉스가 생겼는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콤플렉스는 국악계를 한 때 엘리트주의에 의존하게 만든 듯 보인다.
조선시대 궁중에서 연주되던 음악을 전면에 내세우기도 또 서양의 클래식을 표방하기도 하며 지배계층이 향유하는 예술로 포장하고 싶어 했다. 이러한 콤플렉스는 국악을 순수예술로 한정짓고 고귀한 예술로만 강조하게 만들었으며 국악 전공자들을 자신도 모르게 엘리트의식에 젖게 했다. 엘리트의식에 젖은 많은 국악 전공자들은 무의식적으로 대중과 괴리된 상태에서 자신들이 대중을 지배하는 예술가로 착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멀지 않은 국악의 대중화
근래 국악계의 젊은 연주자들을 보면 기성세대가 가졌던 콤플렉스를 어느 정도 극복하지 않았나 싶다. 서양음악 또는 이미 성공한 장르의 힘을 빌려 대중화를 추구하려 하지 않는다. 국악을 중심에 놓고 다양한 시도를 통해 대중과 함께하고자 노력한다. 국악이 어떻게 동시대와 호흡할 수 있는지를 꾸준히 찾아가고 있는 ‘정가악회’, 경기소리그룹 ‘앵비’와 정가앙상블 ‘소울지기’처럼 국악의 핵심을 현대적 감각에 맞게 풀어내고 있는 단체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기에 국악의 대중화가 그리 요원한 것 같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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