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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의 독립현장] 진안·무주, 학생과 시민이 주도한 3·1 운동

진안 마령면의 시위는 진안군 최대의 3·1운동으로 기억되고 있다. 하지만 무주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은 도시와 멀리 떨어진 산간 지역이여서 한 달 늦게 발생했다. 두 지역의 만세운동은 학생과 시민이 주도한 운동이었다.

 

△진안, 주천과 마령에서 외친 ‘독립만세’

 

둔암 오기열 기적비
둔암 오기열 기적비

1919년 3월 25일 진안군 진안읍 장날을 기해 수백명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행진을 진행했다. 이를 바라보던 장사꾼들도 합세, 읍내에 만세의 환호성과 태극기의 물결로 가득했다. 갑작스런 상황에 일본 헌병대가 부산하게 움직이며 해산을 시도했다. 하지만 감격과 흥분에 쌓인 군중의 행렬은 “우리는 우리의 할 일을 하는 것뿐”이라며 적의 제지선을 피하며 만세의 함성을 더욱 우렁차게 외쳤다. 여기저기서 헌병대와 승강이가 벌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쌍방 모두 극단적인 충돌을 피했다. 이 같은 이유 때문에 날의 시위는 큰 피해 없이 해산 됐다.

주천면 주양리의 사립 화동학교 유지 김주환 등은 4월 3일을 기해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할 것을 계획했다. 화동학교 의생도 양해관 등을 권유해 함께 만세를 부르자고 했다. 만세를 부를 것을 생각하고 있던 양해관 등은 참석의사를 밝혔다. 사건 당일 생도와 주민들이 학교운동장으로 집합해 대한독립만세의 환호성을 부르짖었다. 모두들 감격과 환호로 어찌할 줄 몰라했다. 교정에서 만세를 부른 후 자진해산한 이들은 다시 청년. 생도들의 긴밀한 연락으로 당일 오전에 주민, 생도 약 60여명이 동리 앞 논들에서 모여서 횃불을 들고 일제히 독립만세를 외쳤다. 밤의 정적을 깨고 메아리쳐가는 만세소리는 더욱 웅장했다.

이웃마을 에서도 호응의 만세소리를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주범자로 지목된 김주한은 헌병대에 구속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하지만 진안군민의 독립을 향한 마음은 막을 수 없었다. 3일 뒤인 6일. 마령면 평지리 뒷산에서 오기열. 김영상. 김구영. 황해수 등의 주동으로 인근주민 수백명이 모여 대한독립만세를 불렸다. 하지만 헌병의 출동으로 제지당해, 주동 인물의 한 사람인 황해수는 무력에 의해 끌려갔다. 황해수는 헌병대에 끌려가면서도 “이제는 모두들 집으로 돌아가서 편히 쉬고 다시 독립운동을 계속 하라”고 격려했다.

12일 성수면 도통리에서도 평소부터 적측의 주목을 받아오던 전경원의 주동으로 수십명의 만세시위가 있었다. 마령시장 만세운동 후에도 진안군의 인사들은 기회 있는 대로 운동을 계획하며 또 산발적으로 만세를 부르고 독립을 위해 활동을 계속했다. 그 중에도 주천면의 청년 김영필 등은 그해 4월부터 대한민보, 독립신문 등 독립운동 관계문서를 무주군 등지에 배포하면서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무주, 보통학교 학생들 시위

 

3.1운동 100주년 기념 무주군민 평화대회
3.1운동 100주년 기념 무주군민 평화대회

무주하면 구천동을 생각하고 적상산 사고를 생각하게 되는데 2가지가 모두 인적이 미치기 어려운 심심산곡을 의미했다. 그만큼 교통이 불편하고 다른 지방과의 연락이 잘 안되던 곳이 곧 무주군이었다. 따라서 서울에서 있었던 3.1 독립선언 소식이 무주에 전달된 것은 3월 7일이었다. 다른 지방과 호응해 만세운동을 계획하는 것이 훨씬 늦은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3월 하순께 이웃 고을인 장수·진안·금산은 물론 경계가 서로 접한 충청도의 영동군, 경상도의 거창군 등지에서도 모두 만세운동이 전개되면서 무주군민은 이대로 앉아 있을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일부인사들 간에는 다른 지방 인사들과의 접촉도 있고 군내 동지들 간에도 비밀히 연락을 취하며 만세운동의 준비를 했다. 또 이웃고을의 예수교인들이 일부러 이 교통 불편한 무주 산골을 찾아 궐기를 격려하기도 했다. 그중에도 적상면의 애국청년 전일봉은 진작부터 만세운동의 전개를 계획하고 동지들을 규합해 오던 중 4월 13일, 무주 장날을 기해 운동을 일으키기로 계획을 정했다. 여기에 읍내 보통학교 생도들도 뜻을 같이하기로 했다. 비밀리에 태극기를 만들고 기회를 기다렸다. 의거일인 13일 전일봉 등 40~50명이 먼저 시장 중앙에 태극기를 세웠다. 전일봉은 일제의 침략 정책을 공박하고 독립운동의 궐기를 촉구하는 연설을 하니 청년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지르며 화답했다. 어린 생도들은 손에 태극기를 들고 애띤 목소리로 목청껏 독립만세를 부르며 앞장섰다. 이들의 의로운 모습에 감격하고 동조하지 않을 사람이 없었다. 모두들 감격과 흥분에 휘말려 독립만세를 소리 높혀 부르며 읍내를 행진했다. 하지만 헌병분견소에서 무장 헌병대가 출동, 이들을 강제 해산시켰다. 상인도, 장사꾼도 짐을 꾸려가지고 귀로에 올라 읍내 만세운동은 일시 진정됐다. 하지만 같은날 저녁, 읍내 주위 산상에서 청년 및 보통학교 생도들이 횃불을 올리고 만세를 불렀다. 이러한 야간의 봉화와 만세성은 이산에서 저산으로 번지고 이동리에서 저동리로 번져가면서 일본 헌병대의 신경을 괴롭혔다. 시일이 흘러감에 따라 산간벽지 무주군의 독립운동은 다시 흠치교. 공도회등 종교 유사단체를 통하여 번졌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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