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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누룽지

김순길
김순길

탁 트인 들판의 청보리 밭에 봄의 향기가 가득하다. 푸르름이 넘실대는 초록의 대향연이다. 전국 최초로 보리를 주제로 한 경관농업으로 우리나라 대표축제가 된 ‘고창청보리밭축제’ 한마당이다. 대지와 하늘이 온통 푸른색으로 가득하니 나와 주위 사람들도 모두 푸르러 한껏 젊어진 듯하다.

천국으로 가는 길이 있다면 이런 길이 아닐까 생각하며 잠시 ‘시간이 이렇게 멈추었으면’하는 바람도 가져본다. 축제의 장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먹거리이다. 즐비한 먹거리 중에서 특히 오늘의 주인공인 보리로 만든 먹거리가 풍성했다. 꽁보리밥과 비빔밥, 보리죽, 보리개떡 등 종류도 다양했다. 아내와 지인부부는 보리비빔밥을 주문하고, 나는 추억의 보리누룽지를 주문했다.

보리누룽지에는 나의 어릴 적 추억이 깊게 서려있다. 일제 36년의 수탈로 인한 헐벗음과 굶주림. 뒤이어진 6.25전쟁. 1950년대 우리민족의 뼛속까지 스며든 가난은 당연시되었으며, 그것을「보릿고개」라는 말이 대변해주고 있다. 보릿고개는 태산(泰山)보다 높다고 했다. 여기에는 우리 어머니들의 한(恨)과 설움이 맺혀 있다. 아침밥을 먹고 나면 점심걱정, 점심을 겨우 해결하면 또 저녁걱정, 그리고 내일... 매일매일 끼니 걱정을 해야 했던 그 시대의 어머니들은 태산보다 높은 분이셨다.

나의 어린 시절, 아침식사는 꽁보리밥, 무밥, 시래기밥 등으로 연명하고, 점심은 고구마나 감자 등으로 때웠는데, 이것마저도 없을 때는 물 한 바가지로 주린 배를 채우기도 했다. 어느 날 어머니께서는 물만 마시는 나를 보고 새까맣게 타버린 보리누룽지를 먹으라고 주셨다. 밥 지을 때 밑바닥에 있는 보리가 탄 숭늉은 감칠맛이 조금 있었지만, 보리누룽지는 퉁퉁 불어터져서 맛을 느낄 수 없었다.

그래도 어머니께서는 내가 맛있게 먹는 줄 아시고 보리누룽지를 매일 먹을 수 있도록 부엌에 준비해놓고 논밭 일터로 나가셨다. 늦은 저녁시간 일터에서 지칠 대로 지쳐 집에 돌아오신 어머니는 항상 물 한 바가지를 달라고 하시고 그걸 단숨에 들이키셨다. 어머니는 평소 일터에 나가시기 전에 드시던 보리누룽지를 나에게 주시고 저녁이 다 돼서야 물 한 바가지로 허기를 달래셨던 것이다.

요즘 보리누룽지의 효능에 대하여 좋은 말이 많다. 쌀은 산성식품인데 반해 보리누룽지는 약알칼리성이라고 한다. 그래서 보리누룽지는 쌀누룽지와는 비교되지 않을 만큼 몸에 좋다고 한다. 또한, 보리누룽지는 몸속에 있는 온갖 종류의 유독물질과 기름때, 콜레스테롤 같은 것들을 분해시켜 몸 밖으로 모두 빼내 혈액을 깨끗하게 해준다고 한다.

우리네 인생살이를 보면 때로는 시간이 아름다움을 만든다고 한다. 또한 시간이 해답을 안겨줄 거라고도 한다. 진정, 그때는 몰랐으나 이제는 알게 되었다. 「시커멓게 타버린 보리누룽지」는 최고의 건강식품으로 그 속에는 어머니의 따뜻한 ‘사랑’과 ‘눈물’이 들어 있었다. 청보리밭 내음이 가득한 오늘, 먼 곳에 계신 어머니가 더욱 생각난다.

“어머니, 그립고 그립습니다!”

 

* 김순길 수필가는 <에세이스트> 로 등단했으며, 무주 부군수를 지냈다. 신아문예대학 작가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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