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선불교의 중흥조가 경허 스님이다. 그는 스승없이 홀로 깨달았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따라 아홉 살 때 출가했고, 동학사 만화 스님 밑에서 뛰어난 강백으로 이름을 떨쳤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경전에 근거한 식자에 불과했다. 어느 날 전염병이 떠도는 곳을 지나는 중 주검의 두려움에 떠는 자신을 발견하고 생사를 초월한 공부를 하기로 마음먹는다. 화두를 잡고 공부를 하다가 잠이 오면 송곳으로 허벅지를 찌르던 그는 한 처사가 ‘소가 되어도 콧구멍을 뚫을 곳이 없다’고 하는 말을 듣고 깨우쳤다.
죽어서 소가 되어도 콧구멍을 뚫을 곳이 없다는 그 말은 단번에 경허를 개안시켰다. 깨닫고 쓴 시에는 이런 것이 있다.
“항상 고개를 숙이고 잠을 자네. 잠을 자는 것 외에 일이 없구나. 잠 외에 일이 없어서, 항상 고개를 숙이고 잠을 자네.”
“홀연히 콧구멍 없다는 말을 듣고, 삼천대천세계가 내 집인 걸 알았네. 6월 연산암산 아래 길목에서, 일없는 사람 태평가를 부르네.”
경허 밑에서 침운, 혜월, 만공, 한암 등 걸출한 제자들이 나와 한국 불교계를 이끌었다. 오늘날 한국 불교계의 선풍이 살아 있는 것은 경허 덕분이다.
한암이 쓴 경허 행장에는 이렇게 스승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신장은 크고 고인의 풍모를 갖추었으며, 뜻과 기운은 과감하고 음성은 큰 종소리 같았으며, 무애변재를 갖추었으며, 세상의 일체 비방과 칭찬에 동요되지 않음이 산과 같아서 자신이 하고 싶으면 하고, 그만두고 싶으면 그만두어 남의 눈치를 전혀 보지 않았다. 그래서 술과 고기도 마음대로 마시고 먹었으며, 여색에도 구애되지 않은 채 아무런 걸림 없이 유희하여 사람들의 비방을 초래했다.”
경허는 속명이 송동욱이고 전주 자동리에서 태어났다. 분만한 뒤 사흘 동안 울지 않다가 목욕시킬 때에 비로소 울음을 터트리니, 사람들이 모두 신이한 일이라고 했다 한다.
경허의 세계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지만, 전주 사람들이 큰 기개를 갖고 자유를 누리는 삶을 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전주 태생 경허 스님을 떠올리며 커다란 마음의 세계를 기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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