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일반기사

[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김정경 시인

문장과 문장 사이를 거니는 즐거움
한정원 산문집 <시와 산책>

걷기를 좋아하고, 산책을 사랑한다. 스스로 산책중독자라고 서슴없이 표현하곤 한다. 이것은 나를 구성하는 한 부분이자 어쩌면 전부일지도 모르겠다. 걷기로 이루어지는 산책은 발바닥으로 그날의 골목과 날씨와 풍경을 읽는 일. 그리고 소리와 말들을 채집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속도 따윈 철저히 무시해도 된다는 점이 짜릿하다. 두 발로 더듬어 찾아낸 몇 개의 낱말과 몇 개의 장면을 주머니에 넣고서 만지작거리며 돌아올 때는 어둑했던 마음의 방에도 불이 켜진다.

한정원 작가의 <시와 산책> 은 무심코 길을 걷다가 생각지도 못한 장소에서 환하고, 따스하고, 어여쁜 어떤 것을 발견했을 때의 기쁨을 선사한다. 그 찰나를 혼자만 몰래 간직하고 싶은 욕심과 누구라도 불러와 같이 바라보고 싶은 심경이 엎치락뒤치락 서로 다툰다. 그만큼 <시와 산책> 은 문장과 문장 사이를 산책하는 즐거움을 깨닫게 해주는 책이다. “단편영화를 세 편 연출했고, 여러 편에서 연기를 했다”라는 작가의 독특한 이력 때문일까. 그의 섬세한 문장은 시간과 서사가 정제된 단편영화를 보는 듯 구체적인 장면으로 생생하게 다가온다.

“저물 무렵이면 사람이 사는 집에는 전등이 하나둘씩 켜지고 빈집은 그대로 어둠 속으로 묻힌다. 그 사이를 쭉 이으면 별자리가 될 것도 같다. 돌아누운 사람의 굽은 등 자리, 깎인 발톱 자리, 아픈 고양이 꼬리 자리 같은 것.”( <시와 산책> , 47쪽)

낯선 곳으로 이사한 뒤 “외지고 적막한 동네. 무질서하게 얽힌 골목과 거기 빈틈없이 앉은 집들”에 마음 붙이기 위한 방편으로 동네를 걷기 시작했다는 한정원 작가. 그는 “어느 마당에 어떤 나무와 꽃이 피는지 알게 되었을 때, 더는 밤길이 힘들지 않”게 되었고, “불이 꺼진 창도, 그 창 너머에 내가 아는 누군가가 잠들어 있다고 생각하면 감은 눈꺼풀처럼 순하게만 보였다”라고 ‘산책자’로서의 내력을 밝힌다.

제목부터 ‘시’와 ‘산책’이 나란히 짝을 이룬 책답게 <시와 산책> 에는 여러 시인과 시의 구절이 등장한다. 페르난두 페소아, 파울 첼란, 실비아 플라스, 세사르 바예호, 에밀리 디킨슨……. 작가가 오래 머금고, 어루만지고, 아껴왔을 이 시인들의 시 조각들을 함께 음미할 수 있다. 산책을 나설 때는 홀가분한 차림이 어울리듯이 이 책은 가벼운 마음으로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읽어도 어색함이 없다. 글 한 편 한 편이 짧아서이기도 하겠지만, 단정한 문장으로 다져놓은 길을 따라 걷다 보면 그 풍경 속으로, 시의 세계로 자연스럽게 빠져들기 때문이다. 애틋이 여기는 이의 손을 잡고 걸을 때처럼, 낮은 목소리로 느릿하게 이야기하는 사람의 입술을 가만히 바라보게 되는 순간같이 이미 멀리 왔어도 조금 더 걷고 싶어진다.

평소에 그다지 시와 친하지 않고, 설령 몹시 서먹서먹한 사이라고 해도 전혀 겁먹을 필요가 없다. 아는 시를 만나면 반가워하고, 모르는 시를 발견하면 설렘을 누리면 된다. 만약 반갑지도, 설레지도 않는다면 그냥 흘려보내면 그만이다. 산책하며 우리는 어떤 풍경은 그저 등 뒤로 흘려보내기도 하니까.

“산책자는 걸을 때만큼은 자신의 ‘몸’보다 ‘몸이 아닌 것’에 시선을 둔다”고 일별하는 한정원 작가가 소개하는 월러스 스티븐즈의 시, ‘사물의 표면에 대하여’는 “방 안에 있을 때 세계는 내 이해를 넘어선다. 그러나 걸을 때 세계는 언덕 서너 개와 구름 한 점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게 된다.” 하고 노래한다. 걷기를 통해 우리는 모호하고 어렴풋했던 세상이 분명하고 선명한 실체로 다가온다는 것을 비로소 헤아리게 된다. 그러니 무수한 말들의 성찬에도 위안을 구하지 못했다면 산책을 권한다. 천천히 집으로 돌아와 <시와 산책> 을 펼치면 저녁의 공기가 아늑하고 그윽해지리라.

저작권자 © 전북일보 인터넷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 아래 경우에는 고지 없이 삭제하겠습니다.

·음란 및 청소년 유해 정보 ·개인정보 ·명예훼손 소지가 있는 댓글 ·같은(또는 일부만 다르게 쓴) 글 2회 이상의 댓글 · 차별(비하)하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내용의 댓글 ·기타 관련 법률 및 법령에 어긋나는 댓글

0/ 100
최신뉴스

교육일반전북교육청, ‘깜깜이 5급 승진’ 의혹 해소 촉구

건설·부동산전북 상업용 부동산, 임대 정체에 수익률도 전국 하위권

경제김민호 엠에이치소프트 대표 “우리는 지금 인공지능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경제일반국립식량과학원, 국가 연구실 허브‘로 지정

정치일반요람부터 무덤까지…전북형 복지·의료 혁신 속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