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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문학관 지상강좌 - 한국문학의 메카, 전북] (42) 초속(超俗)의 달관, 참선비 근정(槿丁) 조두현 시인

생전 조두현 선생과 그의 작품.
생전 조두현 선생과 그의 작품.

근정(槿丁) 조두현 선생(1925.7.30.~1989.12.28.)은 전북 완주군 비봉면 내월리 211번지에서 9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54년 전북대학교 문과대학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였으며, 1952년 삼례중 고교 교사, 1954년 익산 남성고등학교 교사를 거쳐 1977년 전주대학교 교수, 1978년 원광대학교 사범대학 한문학과 교수로 재직하였다.

선생의 제3 시집 『책장을 넘기다가』의 발문을 쓴 이상비 교수의 글에는 근정(槿丁) 집안의 자녀교육에 관련한 일화가 소개되어 있다. 선생의 증조부가 황소로 밭을 갈고 있는데, 한 장사꾼이 책을 짊어지고 지나가는 것이었다. 증조부가 그를 불러 무슨 책이냐고 물으니 칠서(七書), 즉 사서삼경(四書三經)이라 대답하니 즉석에서 자신의 황소와 책을 바꿔왔다는 이야기다. 황소 한 마리면 당시로는 매우 큰돈이었기에 이를 본 이웃들이 모두 놀랐다는 것이다. 이렇듯 황금보다 학문을 중시했던 집안의 전통은 자연스럽게 자손들에게 이어졌다. 근정(槿丁)의 구남매(九男妹)가 모두 각 분야에서 훌륭하게 된 것이 결코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알게 하는 집안 내력 아닌가.

선생은 1958년 『현대문학』에 「애가」 외 세 편의 시와 「한시신역」으로 추천 완료되어 등단하였으며, 1967년 『어느 門 밖에서』를 비롯하여 『증언』, 『책장을 넘기다가』 등 세 권의 시집을 펴냈다. 또한, 근정(槿丁) 선생은 한문학에 조예가 깊어 1971년부터 일지사, 동아출판사, 금성출판사 등에서 중고등학생용 한문 교과서 저자로 활동했으며, 다수의 한문학 연구서와 대학교재 등을 출간하여 한문학과 한문 교육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선생은 ’고달픈 삶 가운데에서도 생명 의지를 지적으로 승화시킨 시 세계를 보여주었다. 특히 그의 시 「청명절(淸明節)」은 자연과 인생에 대한 무심한 관조와 달관의 자세를 잘 드러낸 대표적인 작품이다.

 

어제 밤에

비가 부슬거리더니

새벽에는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몸이 노곤하여

달력을 바라보니

모레가 청명(淸明)이 아닌가

 

창을 열어놓고

뜰을 걷다가

백목련이

봉곳이 방울져

지금 잎이 돋아나고 있는데

 

거울에 비친

내 머리털이

더욱 희어져 보이는 것은

 

이 봄의 탓이 아닌가

이 세월의 탓이 아닌가

-청명절(淸明節) 전문

 

홍석영 교수는 근정(槿丁) 선생을 평생 ‘삶의 도반(道伴)’이라고 생각하면서 함께했다. 특히, 남중동 황새골에서 대문을 마주하고 살 만큼 늘 가깝게 살았다. 두 분은 9.28 수복 이후 익산의 남성학교에서 만났는데, 당시 남성학교에는 장순하, 천이두, 이동주, 박항식, 최학규, 김영협 등 훗날 한국문학의 대들보가 된 분들이 재직하고 있었다. 이들은 ‘남풍(南風)’ 동인회를 조직하여 문학과 인생을 논했고, 어쩌다 논쟁이 치열해지면 근정(槿丁) 선생은 “그건 아녀, 아녀.”하며 장자풍(莊子風)의 푸근한 인간미를 보였다고 한다.

천이두 교수은 근정(槿丁)의 첫 시집 『어느 門 앞에서』의 발문에서 선생은 재학 중에 ‘연비동인회(燕飛同人會)’를 결성하여 좌장이 되었는데, 당시 동기들은 만학(晩學)의 선생에게서 형장(兄丈)다움을 느꼈다고 했다. 항상 따뜻이 보듬고 아우르는 온후한 선생에게는 어느 구석에도 문사연(文士然)하는 모서리가 없었다고 했다. 당시 함께한 국문과 1회 동기들이 박병순, 이기반, 조두현, 진을주, 최승범, 최진성, 김영협 등 모두 거목이었으니 얼마나 든든했을까.

이보영 교수는 그의 제3시집 『책장을 넘기다가』의 발문에서 근정(槿丁)의 시는 아름다운 자연과 사물의 완상과 찬미, 조촐한 선비다운 자적(自適), 초속적(超俗的)인 달관과 범용(凡庸)의 진덕(眞德)에 대한 긍정이 돋보인다고 평가했다.

 

내가 한 그루 나무로 서 있을 때

그 나무에서 돋는 이파리는

어떤 빛깔일까

 

내가 한 송이 꽃으로 피어날 때

그 꽃에서 풍기는 향기는

어떤 냄새일까.

 

내가 한 마리 새로 울음을 울 때

그 새의 부리에서 울리는 소리는

무슨 가락일까.

 

내가 한 개의 열매로 맺을 때

그 열매의 속에서 타고 있는 불은

무슨 이야기일까

 

-「열매」시 전문 -

 

이 시는 2000년 솜리예술회관 뒤뜰에 세워진 선생의 시비에 새겨진 시다. 이 시에는 늘 성찰하면서 청아한 삶은 누리고자 했던 선생의 학수천년(鶴壽千年)을 충분히 엿볼 수 있다.

조두현 시인 시비.
조두현 시인 시비.

송남 이병기 시인은 근정(槿丁)선생 송수(頌壽) 시문집에서 「걸어 다니는 무궁화」라는 시에서 선생의 삶을 기린 바 있다. “겉으로 하얀 꽃 이파리 / 깊은 마음일수록 속으로 타는 불덩어리 / 이웃을 깨우치고 / 들뜬 선잠을 사랑으로 재우던 자장가”를 불러주셨던 분이 선생이라고 했다. 근정(槿丁)의 제자 송하춘 교수는 「우리 조두현 선생님」이라는 글에서 스승을 높이 우러렀으며 김병기 교수도 생아지부(生我之父)에 견줄 만큼 큰 스승의 사랑을 회고하였다.

이렇게 높은 학덕과 훌륭한 인품을 보여준 선생의 참 선비상을 오늘에 되살리기 위해 그의 고향 비봉공원 무궁화 동산에 빗돌 하나 세워줄 것을 제안하면서 이 글을 맺는다.

참고 : 근정 조두현 선생 송수 시문집 『학수천년(鶴壽千年)』 외

/송일섭 전라북도문학관 학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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