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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견훤 정치적 입지 확대 위해 전주로 도읍 옮겨”

국립전주박물관, 전주시, 군산대가야문화연구소 <후백제와 견훤 출간>
후백제를 역사학, 고고학, 미술사학 관점으로 조명한 논문들 실려

후백제 왕 견훤(867~936)은 900년 무진주(광주)에서 완산주(전주)로 천도했다.

백제 계승자로서의 입지를 넓히고 남원경을 장악해 정치적 입지를 확대하기 위함이다. 또 남원 운봉고원, 장계분지에 있는 철과 같은 경제적 자산을 확보하려는 목적도 갖고 있었다.

국립전주박물관이 최근 출간 사실을 알린 학술도서 ‘후백제와 견훤’에서 이도학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융합고고학과 교수는 이 같은 견해를 수록했다.

이 교수는 특히 “‘견훤이 전주에 순행했을 때 열렬히 환영을 받았다’는 <삼국사기> 의 기록에 유의해야 한다”며 “백제유민들로부터 부활한 백제에 대한 기대와 설렘을 읽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광주보다 전주에서 기대가 훨씬 컸다는 방증”이라며 “전주를 포함한 노령산맥 이북은 원래 백제 영역이었지만, 영산강 유역은 5세기에 영역화가 됐다. 귀속의식이 상대적으로 약할 수 밖에 없다”고 부연했다.

그러면서 “이 점이 전주 천도의 주요한 동기”라고 강조했다.

또 이 교수는 견훤(甄萱)의 성은 ‘견’으로 읽을 근거가 부족하다고 주장했다. <동사강목> 이나 <증보문헌비고> 등 조선시대 역사서에는 ‘진훤’으로 음가가 달았으니, 이를 기반으로 ‘진’으로 읽어야 한다고 것이다.

전주시, 장수군, 국립전주박물관, 군산대 가야문화연구소가 함께 발간한 이 책에는 후백제를 역사학, 고고학, 미술사학 관점으로 조명한 다양한 논문이 실렸다.

김갑동 대전대 역사문화학과 교수는 견훤이 역사의 주인공이 되지 못한 이유로 지나친 무력 신봉과 개혁의지 부족을 꼽았다.

특히 “군인 출신인 견훤은 상당히 보수적”이라며 “새로운 정치체계나 사회체계를 수립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후백제에 새로운 정치제도가 없었고, 휘하 장수들과 신하들도 예전 신라의 관등을 그대로 쓰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진정환 국립제주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은 국보로 지정된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에 대해 기단부 구성과 지붕돌 수법, 탑에서 나온 불상 등을 근거로 후백제 작품이라는 견해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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