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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기고

이광웅 시인의 추모 30주기를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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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기우 극작가·전북작가회의 부회장

‘사랑을 하려거든 목숨 바쳐라 사랑은 그럴 때 아름다워라 술 마시고 싶을 때 한 번쯤은 목숨을 내걸고 마셔 보아라’ 민중가요 <바쳐야한다>는 사랑꾼이든 술꾼이든 진짜가 되려면 목숨을 걸어야 한다며 당치도 않은 권력과 시대를 일갈한다. 1990년대 거리에서 많이 불렸지만, 이 노랫말이 이광웅(1940∼1992)의 시 「목숨을 걸고」에서 비롯된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익산에서 나고 자란 이광웅은 ‘오송회 사건’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시인이자 교사였던 그는 국가보안법을 위반한 용공주의자로 몰려 40대의 많은 시간을 철창 안에서 보냈다. 문학의 진실한 힘에 눈을 뜨고 현실을 바로 보려는 자세를 굳게 지킨 대가였다. 

오송회 사건은 1982년 한 학생이 전주·군산 간 직행버스에 놓고 내린 오장환의 시집 『병든 서울』 필사본에서 시작된다. 월북 시인의 시집을 돌려봤다는 이유로 함께 문학을 논하던 군산 제일고 전·현직 교사 9명이 구속됐다. 잡아다 족치면 간첩단이 만들어지던 시절, 전북도경 대공분실에 불법 연행돼 20여 일 모진 고문을 받은 이들은 교사간첩단이 되었다. 주동 인물로 꼽힌 이광웅은 7년 형을 받아 사상범을 가둔 광주 특사 독방에서 수형생활을 시작했고, 전주교도소로 옮긴 지 1년 만인 1987년 특별사면됐다. 

시인은 높고 높은 담의 안쪽에서 새로운 눈을 떴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그가 무신론자가 된 것도, 삶의 의미와 인간의 신념과 분단된 민족의 아픔에 보다 절실한 의식과 의지를 갖게 된 것도 그곳에서였다. 특히, 비전향 장기수들을 만나며 신념을 지키는 삶의 가치를 깨닫고 기나긴 날을 시로 채우기 시작했다. 가슴으로 끓어오르는 수많은 언어가 주체할 수 없이 쏟아졌다. 가장 소중한 무기인 펜조차 빼앗겼기에 운동하다 주운 못을 갈아 우유갑에 시를 썼고, 그것을 간직하기 위해 책 표지를 뜯어 붙여 시의 목숨을 지켰다. 「바깥의 노래」, 「바람의 손길」, 「햇빛 한참」은 이렇게 세상을 만났다. 

감옥에서 나온 후 고문 후유증으로 투병 생활을 하고, 전교조 활동으로 교단에서 밀려나면서도 시인은 창작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고통과 분노와 절망을 그만의 맑은 서정으로 풀어내며 시집 『목숨을 걸고』(1989·창작과비평사)와 『수선화』(1992·두리)를 냈다. 

오송회 사건의 피해자들은 2008년에서야 명예를 되찾는다. 이 사건은 제5공화국의 대표적인 공안 조작 사건으로 꼽히며 2008년 광주고등법원 재심에서 관련자 전원 무죄 선고를 받았고, 2011년 대법원은 국가 배상을 확정했다. 

시인의 추모 30주기인 12월 22일. 시인을 아끼고 따르고 기억하는 전북작가회의 시인·작가들과 교육문예창작회 교사들은 그의 시비가 있는 금강하구(군산 금강호휴게소 뒤 공터)에서 ‘이광웅’ 이름 석 자를 다시 부르며 시인의 친필로 새겨진 시 「목숨을 걸고」를 힘차게 외칠 것이다. 진짜 술꾼이든, 참된 연애든, 좋은 선생이든, 뭐든지 진짜가 되려거든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시인의 고성을 마음 깊이 새길 것이다. 포악한 시대는 진짜 좋은 시인과 선생이 되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순결한 사람에게 진짜 목숨을 요구했지만, 어둠과의 치열한 싸움 끝에야 비로소 조금씩 참된 세상이 열린다는 것을 시비는 묵묵히 전해줄 것이다. 부당한 시대는 절로 저무는 것이 아니기에 목숨을 걸고…. 

/최기우 극작가·전북작가회의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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