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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기고

‘잡범’이라는, 억울한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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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규 우석대학교 교수

풀과 나무를 배울 때 ‘잡초’라는 말에 대한 이의 제기를 들은 적이 있다. 유해한 풀, 허드레 취급을 당해도 마땅한 하류. 한마디로 없어져도 좋을 밑바닥 존재들을 잡초라 통칭하는데 그처럼 억울한 누명은 없다는 것이다. 숲해설가 과정에서 잡초로 퉁 쳐진 풀꽃들의 고유한 이름과 생태에 대해 알게 되면서 어느 한 관점에서만 따지는 유익성이란 게 얼마나 폭력적인 잣대인지를 실감했다.  

잡초를 인간 세상에 대응시킨 말에 ‘잡범’이란 게 있다. 절도, 폭력, 사기 등으로 들어온 일반수들을 한묶음으로 부르는 말인데 주로 그들을 단죄하는 검판사들이 입에 올린다. 파렴치하다는 말이 쌍으로 붙어 다닌다. 마동석이 무지막지한 완력의 형사로 나오는 <범죄도시> 시리즈에서는 ‘진실의 방’으로 끌고 가 몇 대 크게 후려치면 다 부는 하찮은 것들로 나온다. 잡범 외의 존재들, 감옥에서 ‘범털’로 불리는 윗것들은 진실의 방 따위에는 끌려가는 법이 없다. 그들은 모든 절차를 밟아 우아하게 조사 받는다. 얼마간 고생 시늉을 하다가 다시 화려한 양복의 자리로 돌아가는 그들에 비해 잡범들은 기댈 데가 없다. 제 뒤에 돈과 빽 아무도 없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잡범=개털의 충족조건이다. 독방은 언감생심, 여럿이 끼여 자는 감방에서도 찬바람 부는 화장실 곁이 제자리다. 무시하고 짓밟아도 탈 안 나는 저 밑바닥에서 머리를 들고 사람 취급 한 번 받으려면 밥 대신 퐁퐁을 들이마시고 온몸에 자해를 해야 겨우 송곳 같은 틈을 인정 받는 한겨울의 자리. 

8~90년대 운동노래를 많이 지은 박종화 시인은 당대의 사법 현실을 딱 세 줄의 시로 적은 적이 있다. “잘못했지요 / 반성하지요 / 이상입니다.” 개털들의 법정 풍경을 이렇게 기막히게 압축할 수 있을까, 절창이구나 감탄했던 시. 변호사들은 잡범들에게 사실관계를 굳이 묻지 않는다. 변론하지 않는다. 머리 쳐들지 말고, 고개 숙이고, 인정하고, 내려주시는 형량이나 깎으라는 것이다. 

감방 안의 수인들은 시간도 깰 겸 자기들끼리 모의법정을 열곤 했다. 법정 경험이 많은 누범자가 재판부와 변호사 이름 조합에 따라 예상 형량을 맞추었다. 귀신들이었다. 재판의 고수들은 아침 출정하는 동료 잡범들에게 절대 머리 세우지 말라고 조언을 했다. 높은 법대에 앉아, 묶인 자들을 내려다보는 판사들은 “재판정에 끌려 나온 순간 이미 죄인인 자들”의 고개 숙인 정도를 정상 참작의 근거로 삼는다. 돈 있고 권력 있는 자들은 굳이 고개를 숙이지 않아도 법의 그물망을 쉽게 찢고 나갔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반박할 수 없는 리얼리즘이 오래 지배해온 법정 풍경에서 우린 얼마나 멀리 왔을까. 

2025년 가장 뜨거운 재판 소식이 매일 뉴스의 첫 머리를 차지한다. 요즘처럼 온 국민이 헌법 제도와 재판 용어, 군과 각 정부기관의 명령 체계 등에 관심을 가진 적이 없을 것이다. 오늘의 법정은 나라를 뒤집어놓은 대형 범죄자가 고개를 뻣뻣이 들고, 숱한 증거들 사이에서 뻔뻔한 거짓말을 늘어놓는 걸 지켜봐야 하는 고통으로 가득 찬다. 정말 마동석 한 번 호출했으면 좋겠다 싶은, 진짜 잡범이 거기 있다. 수십 년 익힌 온갖 법기술을 동원해 파렴치의 끝판왕을 달리고 있는 국사범. 죄수들의 모의법정이 열린다면 검사 역을 맡은 잡초 하나가 이렇게 일갈할 것 같다.  

“눈 깔아. 이 잡범보다 못한 XX야. 네가 사람이냐.”

이재규 우석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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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범 #개털 #법정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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