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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8년 6월, 왕건은 홍유(洪儒)배현경(裵玄慶)신숭겸(申崇謙)복지겸(卜智謙) 등의 장군에게 추대돼 왕위에 올랐다. 궁예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 창업주인 태조(太祖, 918~943)가 되었다. 그는 우선 나라 이름을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고려(高麗)라 했다. 신라에 대해서도 궁예와는 달리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왕위에 오르자마자 궁예가 새로 설치한 관계와 군현의 명칭을 다시 신라식으로 환원하였다. 신라에서 오는 사람들도 후대했다. 후백제에 대해 즉위 초기에는 우호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다 920년(태조 3)에 견훤이 신라의 합천초계를 공격하고 신라의 구원 요청에 고려가 응하면서 둘 사이에 틈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924년에 일어난 조물군(曹物郡, 구미 부근으로 추정) 전투 이후 인질 교환으로 잠시 소강상태를 보이던 그들은 927년(태조 10)에 왕건이 용주(龍州, 지금의 예천)를 선제공격하면서 다시 대립했다. 그 후 견훤의 신라 침공 후 공산(公山, 지금의 대구 팔공산)에서 후백제군을 만나 싸웠으나 크게 패했다. 그러나 930년(태조 13)에 고창군(古昌郡, 지금의 안동) 전투에서 김선평(金宣平)권행(權幸)장길(張吉) 등의 도움으로 견훤군을 크게 무찔렀다. 승기를 잡은 왕건은 견훤과 경순왕(敬順王, 927~935)의 귀순을 받고 후백제 신검(神劍)과 선산 부근의 일리천(一利川)에서 마지막 결전을 벌였다. 여기서 패배한 신검은 황산군(黃山郡, 지금의 충남 논산군 연산면)으로 도망해 진영을 정비했다. 그러나 이를 추격한 고려는 여기서도 크게 승리, 936년에 후삼국을 통일했다. 이 기념으로 왕건은 연산에 개태사(開泰寺)라는 절을 세우기도 했다.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개인적 자질과 역량 때문이기도 했지만 '호족(豪族)'의 협조 덕택이기도 했다. 그는 호족의 딸과 결혼을 추진해 29명의 부인을 뒀다. 호족의 자제를 기인(其人)으로 삼아 수도에 올라오게 하는 조치도 취했다. 한편으로 그는 일반백성을 위한 정책적 배려도 아끼지 않았다. 우선 농민의 조세부담을 경감했다. 그리고 흑창(黑倉)이라는 빈민구제기관을 설립해 가난한 백성에게 곡식을 나눠 주기도 했다. 또 억울하게 남의 노비가 된 자들을 양민으로 풀어주는 정책도 실시했다.이러한 고려의 후삼국 통일은 외부세력의 간섭 없이 진행된 것이 특징이며 북방정책을 추진해 영토를 청천강까지 확대했다. 또 경주 진골 중심의 골품제 사회가 붕괴되고 지방 호족 중심의 능력 사회로 변한 점이 특징이다. 고려의 후삼국 통일은 동북아시아사의 전개에서 중국 및 북방민족과 함께 삼각의 축을 형성하는 계기가 됐다. 고려(高麗)-송(宋)-요(遼, 또는 金)의 삼각구도를 형성해 견제와 균형을 통해 거란(遼)의 침략과 여진(金)의 압력을 물리칠 수 있었다.
△궁예의 선구(先驅), 견훤= 889년 진성여왕은 재정 부족을 이유로 사신을 보내 농민에게 세금 납부를 독촉했다. 하지만 농민들은 이에 반발해 곳곳에서 반기를 들었다. 농민봉기는 해를 넘기면서 계속됐다. 일부 농민은 떼도적이 되어 설쳤고, 지방의 세력가들은 자신의 영역을 지키기 위해 저마다 군사를 양성했다. 이처럼 혼란이 계속됐지만 신라 정부는 이미 통제할 힘을 잃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틈타 가장 먼저 큰 세력을 형성했던 인물이 바로 견훤이었다. 889년 반기를 든 견훤은 892년 무진주(광주)에 터를 잡고, 왕에 버금가는 지위를 누렸던 것이다. 궁예는 891년 죽주(안성 죽산면)의 세력가 기훤의 부하가 됐다. 기훤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자 다음 해에는 북원(원주)의 세력가 양길의 부하가 되었다. 승려였던 궁예가 신라 말의 혼란에 뛰어들었던 것은 혼란을 이용해서 자신의 나라를 세우려는 야망을 품은 탓이었다. 그런 그에게 견훤은 선구자로 비쳐졌을 것이다. 더욱이 892년 견훤은 양길에 비장(裨將)이라는 관직을 내려주었다. 양길을 주인으로 모시고 있던 궁예는 견훤을 본보기로 여겼을 것이다.견훤은 900년 의자왕의 원한을 씻겠다면서 국호를 백제라고 하고 스스로 왕이 됐다. 이를 삼국시대의 백제와 구별해 흔히 후백제라고 한다. 이듬해 901년에는 궁예가 고구려의 복수를 내세우면서 나라 이름을 고려라고 하고 왕을 일컬었다. 이를 삼국시대의 고구려나 왕건의 고려와 구별하기 위해 후고구려라고 부르거니와, 후고구려의 건국은 후백제의 건국에 대응한 것이었다. 견훤이 완산주 일대에 살던 백제 유민의 백제에 대한 향수를 자극해 건국하자, 궁예도 한산주패강진 일대에 살던 고구려 유민의 호응을 기대하고 건국한 것이다. 이로써 신라와 후백제, 후고구려가 정립하는 이른바 후삼국시대가 시작됐다. 하지만 신라는 이미 정세를 좌우할 힘을 갖고 있지 못했다. 견훤과 궁예 두 영웅이 패권을 다투기 시작했다.△궁예와 견훤의 패권 다툼= 궁예와 견훤의 첫 충돌은 906년 상주에서 벌어졌다. 궁예는 이곳을 점령해 신라를 공격할 수 있는 전진기지를 확보하려고 했다. 역시 신라를 노리고 있던 견훤도 이를 막아야 했다. 상주는 견훤의 아버지 아자개가 지배하던 곳이었던 만큼 더욱 내줄 수 없었다. 여러 차례 격돌 끝에 궁예가 보낸 왕건의 군대가 승리했고, 견훤은 907년 일선군(선산) 일대를 차지하고 궁예와 대치했다. 궁예 말년에는 이흔암이 후백제의 웅주(공주)을 습격해 차지했는데 이 때 운주(홍성) 등 10여 고을도 궁예의 소유가 됐다. 공주 일대에서도 궁예와 견훤이 일전을 겨뤘는데, 궁예가 승리했다.궁예와 견훤은 금성(나주) 일대의 지배권을 두고 여러 차례 충돌했다. 나주 일대는 후백제의 배후였고, 또한 해상 교통의 요지였다. 궁예는 차지하고 싶은 곳이었고, 견훤은 잃어서는 안 되는 곳이었다. 909년 궁예의 명을 받은 왕건은 덕진포(영암 덕진면) 일대에 화공으로 견훤의 대군을 격파하니 견훤은 작은 배를 타고 겨우 귀환했다. 이어 왕건은 견훤 편이었던 해상세력가 능창을 잡아 궁예에게 압송했다. 910년 견훤은 몸소 보병과 기병 3000명을 이끌고 나주성을 포위했는데 궁예가 해군을 동원해 이를 물리쳤다. 912년에는 다시 덕진포에서 전투가 벌어졌는데, 이때에는 궁예가 직접 원정해 견훤을 무찔렀다. 이후 나주 일대는 궁예의 소유가 되었다. 견훤을 본보기로 삼아 세력을 모으고 건국했던 궁예였지만, 그 후 견훤과 여러 차례 격돌해 승리를 거둬 궁예는 전국의 3분의 2를 차지면서 큰 세력을 떨치게 됐다.
전주 동고산성은 1981년에 처음으로 조사가 이루어졌으며, 그 해에 전북도기념물 제44호로 지정됐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본격적인 발굴조사는 7차례 이뤄졌다. 그간의 발굴조사에서는 대형 건물터를 비롯해 전주성(全州城)이라고 찍힌 기와가 나와 명실상부 후백제 도읍임이 자명해졌고, 후백제 견훤왕에 의해 성을 다시 쌓았던 흔적들이 확인됐다. 그러나 아쉽게도 중요한 고고학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도기념물로에 머문 채 국가의 중요한 사적으로 끈을 잇지 못하고 맥없이 32년의 시간을 흘러 보냈다. 후백제 정통성의 희미한 맥은 전주 동고산성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전주 동고산성은 전주도성의 일부이자 전쟁시 피난할 수 있는 배후산성으로 견훤의 정치와 군사가 살아 있던 곳이다. 지난 1990년과 1994년에 조사된 대형 건물터는 정면 22칸, 측면 4칸으로 산성의 중앙부 계단상의 대지에 자리하고 있다. 규모면에서 고구려 안학궁(남궁, 정면 11칸, 측면 4칸)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아주 큰 편이다. 안학궁은 고구려 행정부가 평상시 거주하며 정치를 의결하였던 것과 상대적으로 전주 동고산성의 대형 건물터는 유사시 임시로 사용됐던 정전이었다. 더욱이 전주성이 찍힌 기와류가 이 대형 건물터에서 출토되었는데, 기와에 그려진 문양은 신라말에서 고려초에 제작된 것으로 해당된다. 이 대형 건물터 이외에도 규모가 남달리 큰 건물터가 성벽의 남쪽을 따라 줄지어 지어졌으며, 그 중에 제 7건물터는 정면 16칸, 측면 4칸에 이른다. 이러한 건물터에서는 주로 토기와 같은 그릇보다는 기와가 많이 출토되었으며, 벼슬 관(官)이 찍힌 기와가 다수 확인됐다. 이와 똑같은 기와는 전주시내 경기전과 구도청의 발굴조사에서도 확인되고 있어 견훤의 평상시 행정을 맡은 곳은 전주시내 일원으로 볼 수 있겠다. 동고산성에는 4개 성문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중에 북문터와 동문터가 확인됐다. 서문터는 아직 찾지 못했다. 다만 서문터에서는 문기둥 밑에 박았던 화금(신쇠)이 출토돼 그 빌미를 남겨주고 있다. 서문터는 동고산성의 정문으로 추정되는데 대형 건물터의 방향이 서향이고, 북문터는 어긋문, 동문터는 현문(다락문)으로 암문(비밀리 출입하는 문)인 점에서 그러하다.올해 발굴조사가 이뤄졌던 서문터에서는 성문의 흔적은 찾지 못했으나 견훤에 의해 성벽이 다시 쌓아졌던 흔적이 확인됐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전주는 신문왕 5년(685)에 완산주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견훤왕은 효공왕 4년(900) 완산주에 도읍하고 후백제왕이라 칭하고 대대적인 토목공사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 일환으로 기존의 성벽을 대신하는 성벽축조도 이루어졌던 사실이 밝혀졌다. 즉 성벽의 외부에 네모나게 잘 다듬은 석재를 사용하여 만든 성벽이 바로 새롭게 축성된 것임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의 남아 있는 전주동고산성에서 후백제 견훤왕은 도읍을 정비하면서 유사시 대피할 수 있는 피난성을 견고하게 구축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네모반듯한 성돌은 그의 지도력과 도도한 미적인 면도 엿보인다.
'삼국사기'권 제50 열전 제10 견훤전에 견훤의 인물평이 기술되어 있다. 견훤은 누구인가. 그는 신라인이면서도 신라가 당나라인 외세를 끌여들여 나당연합작전으로 백제를 멸망시킨 것에 매우 분개할 정도였고, 그는 신라의 변방을 지키는 방수군의 비장이면서 부패하고 타락한 신라 정부에 강한 적개심을 품고 경주에 쳐들어가 경애왕을 처형하고 경순왕을 옹립할 정도의 권세를 가진 정의로운 인물이었다. 경애왕의 처형은 흉년 기근과 도적떼 발호, 전염병이 만연하는 난리통에 백성을 돌보지 않는다게 직접적 요인이었다. 그리고 지방호족들을 끌어안는 포용력과 용맹스러운 기풍과 군사들의 선봉에 서는 리더쉽을 갖고 있었다. 견훤은 매우 정의로운 장수였고 민족 자주의 국가의식이 강한 지도자였다. 견훤은 백제가 익산 금마에서 일어났다는 일통삼한의식(一統三韓意識)을 갖고 있었으며, 백제의 국가계승 의식이 매우 투철하였다. 그가 892년에 무진주(현 광주)에서 지방호족들을 규합하여 국가창업의 기반을 조성하면서도 스스로 감히 왕이라 칭하지 못할 정도로 겸손함을 보여준 인물이었다. 견훤은 전주를 매우 좋아하였다. 그가 광주에서 후백제의 창업기반을 조성하면서도 전주에 도읍을 정할 구상을 하고 있었다. 견훤은 전주사람들에 대한 믿음이 강하였다. '삼국사기'열전에 "견훤이 서쪽을 순행하다가 전주에 이르렀는데, 전주고을 사람들이 열렬하게 맞이하자 견훤은 인심을 얻어 기뻐하였다(萱西巡至完山州 州民迎勞 萱喜得人心)는 내용에서 전주인들에 대한 호감을 드러냈다. 또한 백제 의자왕의 오랜 울분을 씻어주기 위해서 전주에 도읍하겠다(今矛敢立都於完山)고 천명하였으며, 마침내 900년에 전주에 후백제의 도읍을 정하고 후백제왕이라 호칭하였다. 그리고 국가 운영에 필요한 관제를 설정하고 사무를 분담하는 정부 조직도 갖추었다. 후백제 국호도 백제의 국가계승의식을 선언하는 의미가 담겨있는 것이다. 견훤은 왜 광주에 도읍하지 못하고 전주에 도읍할 정도(定都) 구상을 하였을까? 크게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하나는 전남지역 호족들에게서는 백제의 귀속의식이 매우 낮다는 판단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영산강 유역의 해상교통로를 장악하지 못한 것이 직접적 요인이었을 것이다. 그런점에서 전주천도가 아니라 전주정도가 맞다. 그렇다면 왜 견훤이 전주에 도읍을 정하였을까. 첫째, 전주가 백제권의 중심이라는 인식. 둘째, 전북지역 백제인들이 앞장서서 백제부흥전쟁을 치른 호국의식을 높이 평가. 셋째는 만경강 교통로의 확보를 들 수 있다. 견훤은 국가를 세운 후에 상국에 사신을 보내 국가의 외교적 승인을 받는 일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하는데, 대중국 해상교통로인 영산강 교통로가 왕건의 측근 세력들에게 차단당하였기 때문에 광주에 도읍을 정할 수가 없었다. 견훤에게 영산강 교통로의 차단은 숨통막히는 일이었기에 전주에 정도한 이후에도 줄곧 영산강 교통로를 장악하고자 몇차례 공략하지만 끝내 실패하고 만다. 오로지 영산강 교통로의 장악은 대중국과 대외교류를 위한 해상교통 확보가 목적이었다. 견훤은 전주에 도읍을 정한 즉위년에 중국 양자강 유역에 위치한 오월국(吳越國)에 사신을 보내고 검교태보(檢校太保)라는 벼슬을 제수받는다. 이후 줄곧 오월국과 외교관계를 유지한다. 후백제가 중국의 오대십국가운데 유독 오월국과 외교관계를 집중한 것은 백제의 국가계승에 집착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백제가 중국의 남조문화를 황해남부 사단항로를 통해서 받아들였는데, 전주에서 만경강 교통로를 이용하여 사단항로를 따라 중국으로 건너갔고, 오월국의 사신도 황해남부 사단항로와 만경강 교통로를 이용하여 후백제 수도 전주로 들어왔다. 만경강 교통로는 전주 덕진에서 나룻배로 출항을 하면 회포-춘포-목천포-불포-심포-군산도-위도-죽도-소혹산도를 경유하여 중국 절강성 영파 정해현 보타산으로 건너가는 바닷길이었으며, 중국에서도 정해현 보타산에서 같은 사단항로를 따라 전주로 들어오는 바닷길이 열려 있었다. 오월국 수도 항주에서 후백제 수도 전주까지 건너오는데 1주일이면 족했다. 921년 9산선문 가운데 동리산문의 동진대사 경보스님이 중국에서 배를 타고 전주부 임피군으로 들어왔다는 기록이 있다. 경보스님이 당도한 곳은 군산시 임피면 신창진나루터였을 것이다. 후백제는 군산만, 변산반도의 황해남부 사단항로를 장악하고 있었고, 오월국도 중국 양자강 유역과 사단항로의 바닷길을 장악하고 있었기에 후백제와 오월국은 해상교통이 매우 용이하였다. 이 사단항로의 바닷길을 통해서 불교문화와 해양신앙과 성황신앙, 도자문화 등 다양한 문물교류가 양국 사이에 이뤄졌다. 전주가 도시 면모를 갖추고 품격있는 문화능력을 갖기 시작한 것도 후백제 도읍 시기부터다. 왕도의 전통은 고려시대 내내 지속적으로 유지되었으며, 이러한 왕도의 기운으로 조선왕조의 본향이 된 것이다.
전주는 역사적으로 두가지 코드를 지니고 있다. 하나는 후백제 왕도로서의 전주와 조선왕조의 발상지로서의 전주이다. 두가지 코드를 전주는 충분히 활용하여 전통도시로서의 발전을 지속시켜야 할 것이다. 그중에서도 전주가 수도로서 기능한 시기는 후백제시기이다. 왕도의 기운을 되살리는 것은 현재의 우리 몫이다.견훤이 전주로 천도한 해는 900년이다. 후백제는 고려의 왕건에 의해 936년에 망했다. 그러니까 전주가 36년 동안 후백제의 왕도였던 셈이다. 긴 역사 속에서 보자면 너무 짧은 기간이지만, 14년간 태봉의 수도였던 철원에 비하면 배가 넘는 기간이다. 철원의 풍천원에 세워진 태봉의 도성은 외성 12.7㎞, 내성 7.7㎞이었으며, 태봉은 궁궐과 누대 등을 극히 화려하게 장식하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36년 동안 전주에 세워진 후백제의 도성은 적어도 그 이상의 위용을 지니고 있었을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견훤은 외교관계를 중시해 주변 여러 나라와 통교를 지속하였다. 이때 외국의 사신이 후백제를 들리기도 하였다. 이를 대비해 궁궐과 도성을 화려하게 만들었다고 해도 지나친 억측만은 아닐 것이다.화려하게 만들어졌던 도성과 궁궐은 현재 전주의 어디에 있었을까. 동고산성에 오르면 9부 능선 부근에 대단한 위용을 자랑하는 2층 건물로 축조되었다고 추정되는 터를 찾을 수 있다. 주변을 돌아보면 여러 건물지의 흔적도 찾아진다. 이 건물지를 둘러싸고 있는 성곽도 찾아졌다. 이를 근거로 이곳이 상성중성내성을 갖춘 궁궐터였다고 추정되었다. 그러나 이곳은 몇 가지 점에서 궁궐로 보기에는 주저되는 점이 있다. 먼저 이곳은 거의 동고산정상부에 위치하여 국왕의 권위를 드러내기에는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다음으로 커다란 건물지에 추운 겨울에 대비한 온돌시설이 없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물이 충분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런 점들로 '신증동국여지승람' 전주부에서 찾아지는 견훤이 전주부의 북쪽 5리(현재의 물왕멀 일대)에 토성을 세웠다고 하는 기록을 근거로 그곳을 궁궐터로 추정한 견해도 있다. 이곳에서는 일제시대 편찬된 '전주부사'에 의하면 1만여개의 주춧돌이 찾아져, 그 가능성을 높여주고 있다. 그런데 이 견해들은 전주천의 물길을 기준으로 해석된 견해들이었다. '완산지'에 의하면 전주천은 한벽루를 지나 오목대를 거쳐서 흘렀다고 한다. 이 견해가 '전주부사'에서 전주천이 오목대를 거쳐 구철도를 따라 북진하여 모래내를 만나고, 이어서 덕진지를 거쳐 추천으로 흘러갔다고 해석됐다. 그렇게 때문에 견훤은 전주천을 넘을 수 없어 궁궐을 물왕멀일대와 동고산에 조성했다고 주장됐다. 최근 전라감영이 발굴됐다. 이 발굴에서 뜻하지 않은 결과가 나왔다. 발굴된 지층에서 통일신라 건물지가 나온 것이다. '전주부사'의 견해에 의하면 전주천이 흐르고 있는 곳에 건물지가 조성되었다는 것이다. 이 발굴로 인하여 적어도 통일신라 시대에는 전주천이 현재와 같은 물길을 유지하고 있었음이 확실해졌다. 그리고 1912년에 만들어진 지적도에 의하면 전주는 격자형 도로 구획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 도로구획은 통일신라시대에 이루어진 것으로 파악된다. 통일신라 9주 5소경의 중심지였던 남원광주상주청주 등에서 찾아지는 도로구획과 거의 동일한 격자형 도로구획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격자형 도로 구획의 중심지는 대략 조선시대의 치소와 일치하고 있다. 조선의 치소는 고려의 치소를 이어받았으며, 고려의 치소는 통일신라의 치소를 이어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후백제의 궁궐도 당연 이곳에서 찾아져야 되지 않을까 싶다.※ 이 글은 전주시와 전주역사박물관이 공동으로 진행하고 있는 〈제12기 전주학 시민강좌〉'후백제 왕도 전주'의 강좌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후백제의 역사가 객관적인 평가를 받지 못하면서 그에 비례해 후백제의 수도였던 전주도 역사의 뒤켠으로 물러나 있다. 전주시와 전주역사박물관(관장 이동희)이 지난 7일 시작한'후백제 왕도 전주'를 주제로 제12기 전주학 시민강좌를 꺼낸 배경이다. 본보는 견훤과 후백제에 대한 올바른 역사관을 정립하고 왕도(王都) 전주로서의 자긍심을 되찾는 계기가 될 수 잇도록 다음달 2일까지 8주간 매주 토요일 전주역사박물관에서 진행될 이번 시민강좌 내용을 7차례에 걸쳐 요약해 연재할 계획이다.후백제를 세운 진훤(甄萱)의 이름은 현재 '견훤'으로 읽혀지고 있다. 옥편을 찾아 보면 '질그릇 甄'에는 '견' 혹은 '진'으로 발음이 된다. 그런데 조선 후기의 대표적 역사학자인 홍여하와 안정복은 '동사제강'과 '동사강목'에서 후백제 시조왕의 이름을 '진훤'이라고 읽었다. '증보문헌비고'와 '전운옥편'및 '완산견씨세보完山甄氏世譜'에서도 이와 동일하게 읽었다. 구한 말 국사 교과서에서도 '진훤(헌)'으로 표기했다. 그 밖에 역사학자 이병도(李丙燾) 등의 저작물을 비롯하여 민족문화추진회 국역본에 이르기까지 모두 '진훤'으로 표기하였다. 그럼에도 언제부터인지 교과서를 위시하여 모두 '견훤'으로 표기하고 있지만 터무니없는 잘못이다. 진훤은 지금의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아차 마을 '갈전 2리'에서 가난한 농민의 맏아들로 출생했다. 그는 백제 유민의 후예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한 진훤이 향리를 떠나 군에서 복무했던 곳은 필자가 최초로 밝혔듯이 지금의 전라남도 순천만 일대였다. 진훤은 순천의 해룡산성과 동일한 지형구인 광양의 마로산성 일대에서 해적들을 소탕하는데 발군의 전공을 세웠다. 마로산성에서는 신라가 일본에 수출하던 동경(銅鏡) 뿐 아니라 남중국의 청자와 백자, 그리고 당나라 동경까지 출토되었다. 이러한 물증은 장보고 사후 50년만에 등장한 진훤의 서남해안 해상권 장악을 시사해준다. 진훤이 전주(全州)로 정도(定都)한 900년에 항주(杭州)에 도읍한 중원의 약소국인 오월국(吳越國)에 신속하게 사신을 파견한 것도 해상제해권 장악에 대한 열망에서였다. 진훤은 지금의 광주 광역시에서 거점을 북상시켜 전주에 도읍했다. 그와 더불어 나라 이름을 '백제'라고 선포하였다. 진훤은 대왕(大王)을 칭하면서 '정개(正開)'라는 연호를 반포했다. '정개'에는 '바르게 열고''바르게 시작하고''바르게 깨우친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질곡과 파행의 칙칙한 과거사를 청산하고 올곧게 시작하는 새로운 역사의 시작을 알리는 연호였다. 이와 더불어 진훤은 신라보다 일렀던 백제의 역사를 재정립하겠다는 일종의 '역사 바로잡기'와 더불어 의자왕의 숙분(宿憤)을 푸는 것을 당면 과제로 내세웠다. 진훤은 정치적 이데아로서 백제에 의한 국토통일을 내걸었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비참하게 몰락한 백제왕조의 부활자이자, 미륵의 대행자로서 도탄에 빠진 민생을 구원하고 한 세상을 건지겠다는 포부를 지녔다.신검(新劒)의 교서(敎書)에 보면 "도탄에서 구해주셨으니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게 되고"라고 하였듯이 그는 농민들을 과중한 수탈과 질곡에서 해방시켰다. 그의 위세는 일본측 문헌에 "전주왕(全州王) 진훤이 수십 주(數十州)를 격파하여 대왕이라 칭하고 있다"는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진훤은 인재 기용에도 비상한 수완을 발휘하였다. 그랬기에 그 주변에는 잘 짜여진 우수한 참모들이 포진할 수 있었다. 그리고 922년에 있었던 미륵신앙의 요람인 미륵사에서의 개탑(開塔) 의식은 익산 금마산에서의 백제 '개국開國' 인식과 짝을 이루는 일대 사건이었다. 진훤은 927년에 경주에 입성하여 경주 포석정에서 신라 경애왕을 생포처단하였다. 더구나 구원나온 고려 군대를 대구 공산에서 포위궤멸시켰다. 그 직후 진훤이 왕건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의 기약하는 바는 평양성 문루에 활을 걸어두고 패강(대동강)에 말의 목을 축이는 데 있다!"라고 하였듯이 통일군주에 대한 자신감을 화통하게 피력했다.결과적으로 진훤왕은 역사의 패자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승부에 승부를 거듭하는 전쟁으로 숨도 돌릴 수 없는 난세를 헤쳐가면서, 한 시대의 종지부를 찍어 역사의 일대 전환점을 마련한 혁명가였다. 그는 말세와 같은 암울한 세상에, 그것도 엄격한 신분제 사회에서 농민의 아들이라는 한미한 '옷'을 입고 태어났지만, 결단코 그러한 현실에 짓눌리기를 거부했던 혁명가였다.
'작지만 강한' 전북도립미술관의 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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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개벽의 새 세상 열자" 원불교 100주년 기념대회 5만여명 참석
부안여성작가 13명, 30일까지 제9회 단미회展 ‘Art Memory’
[안성덕 시인의 ‘풍경’] 모래톱이 자라는 달
[전북문학관 지상강좌 - 한국문학의 메카, 전북] (26) 고독한 감꽃 시인, 이철균
전북과 각별…황석영 소설가 ‘금관문화훈장’ 영예
버려진 산업유산, 디지털 예술로 다시 태어나다⋯황등석산 ‘달콤한 변신’
원불교 100년 하나 되는 세상을 그리다 ⑩ 한은숙 원불교 교정원장 "물질을 좋은 일에 쓸 수 있는 마음공부 필요"
사포 말을 걸다 '바람결 그대' - 춤, 일상의 공간서 소리 없이 이뤄지는 관객과의 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