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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홍규권장가 (하)] 가난 이겨낸 조선 여인의 슬기

한심하다 이내몸이금의옥식(錦衣玉食) 쌓였을 제전곡(田穀)을 몰랐더니일조(一朝)에 빈천(貧賤)하니이대도록 되었는가이목구비 같이 있고수족이 성성하니제 힘써 치산(治産)하면어느 누가 시비하리저런 욕(辱)을 면하리라분한마음 깨쳐먹고치산범절(治産凡節) 힘쓰리라김 부자 이 부자는씨가 근본 부자리오밤낮없이 힘써 벌면낸들 아니 그러할까오색 당계(唐系) 오색실을줄줄이 자아내어 육황기 큰 베틀에필필(匹匹)이 끊어내니한림(翰林) 주서(注書) 조복(朝服)이며병사(兵使) 수사(水使) 융복(戎服)이며녹의홍상(綠衣紅裳) 처녀치장청사폭건(靑絲幅巾) 소년의복 원앙금 수(繡) 놓기와봉황단 문채(文采)놓기(중략)딸아 딸아 아기 딸아시집살이 조심하라 어미 행실 본을 받아괴똥어미 경계(警戒)하라딸아 딸아 아기 딸아어미 마음 심란하다여자의 유행(有行)에부모 형제 멀었으니 명춘(明春) 3월 봄이 되면너를 다시 만나리라나이 15세가 되자 고르고 또 골라서 강 절강의 반가(班家) 손부(孫婦)로 출가를 하게 되지만, 끼니를 이을 수 없는 가난의 극한상황에 처한다. 매파의 말이나 집안만을 보고 혼인한 경우 민요나 규방가사에서 흔히 대할 수 있는 상황이다. 가난의 어려움을 겪어보지 못한 화자는 난생 처음 배고픔의 고통이나 슬픔을 극복할 수 없는 절망에 갇혀 어찌할 바를 모르지만, 이내 슬기롭게 이를 극복하기 위한 적극적인 방편을 제시한다. 이것이 인고와 인종을 바탕으로 하여 어려운 현실을 타개해왔던 조선조 여인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미덕이요, 슬기였다.이 단락에선 비단 옷과 기름진 밥을 먹으며 유복하게 살아 왔던 화자는 거친 밭곡식의 음식이 어떤 것인지 꿈에서라도 몰랐는데, 하루아침에 가난에 처한 자신을 보며 한심하다 이 내 몸이 금의(錦衣) 옥식(玉食) 쌓였을 제/ 전곡(田穀)을 몰랐더니 일조(一朝)에 빈천(貧賤)하니라며 가난의 서러움을 절절히 토해낸다. 가난의 극한상황에 처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그 서러움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하는 법이다. 그러나 작중화자는 이런 가난에 머무르거나 절망을 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이를 극복하는 방편으로 치산의 방법을 선택한다. 즉 수족(手足)이 성성하니 제 힘써 치산(治産)하면/ 어느 누가 시비(是非)하리라며 극한의 가난을 탈출하기 위한 피땀 어린 고된 살림살이를 꾸려나감으로써 집안을 일으켜 치부(致富)할 수 있다는 여장부의 모습으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베를 한 필 두필을 짜서 팔며, 관복이나 여성의 녹의홍상(綠衣紅裳) 옷 짓기, 소년의복과 노인핫옷 만들기, 원앙금침 수놓기를 하되, 낮엔 육행기(肉杏機) 베틀에서 두 필(匹)의 베를 짜고 밤엔 바느질 다섯 가지를 해서 돈을 모은다. 이 외에도 누에치기와 닭이나 개, 돼지 기르기 등 육축(六畜)짐승을 길러내어 장에 내다팔아 돈을 번다. 그리고 전답을 사들여 농사짓기로 부를 일구어서 시집온 지 10년 만에 가산이 10만에 이르는 큰 부자가 된다. 치부한 재산으로 훌륭한 스승을 모셔다가 아들 형제 잘 가르쳐서 과거에 급제시킴으로써 내외 해로(偕老) 부귀(富貴)하니 팔자도 거룩하다라 만족해한다. 시집가는 딸에게는 아름다운 부부금술과 바른 행동거지, 처신범절과 칠거지악을 조심해야하고 가산을 탕진해 거지신세를 면치 못한 괴똥어미를 언제나 경계 삼으라고 훈계하고 있다. 내 나이 쉰 살이나 남편에게 조심하기 화촉동방(華燭洞房) 첫날밤과 일분(一分)인들 다를소냐라며 지천명의 나이에도 부부는 언제나 신혼 첫날밤처럼 살아야 한다고 초심(初心)을 강조한다. 정성스런 손님맞이(接賓客)와 절약과 검소를 바탕으로 한 올바른 세간 살이 방법을 이르며 무당 같은 미신에 빠져서도 안 된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하루아침에 가산을 탕진하고 거지로 전락해버린 괴똥어미를 상기시키며 착하게 살면 복을 받고 음란하면 재앙이 온다는 복선화음(福善禍淫)을 경계하고 있다. 결사에 이르러 금지옥엽 같은 딸을 연이어 안타깝게 부르며 시집살이 조심하고 어미의 행실을 본받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은 어머니는 또 한 번 괴똥어미와 같은 나태하고 허랑한 여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시집가는 딸에게 간곡하게 호소하며 심란한 어미의 심사를 술회한다. 여자의 행실 여하에 따라 부모 형제간의 정의(情誼)가 달렸음을 경계하고 내년 봄이 되면 다시 딸을 만나기 위해 올 것이라 위로하면서 자신과 시집가는 딸의 위안의 방편으로 장형의 홍규권장가를 맺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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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1.10 23:02

[13. 홍규권장가] 혹독한 시집살이 이겨낸 여인의 미덕

이 가사는 전북 완주 봉동에서 살아온 소두영 씨의 부인인 광산김씨가 소장해 오던 규방가사를 전북대의 김준영 교수가 수집한 것으로 자신이 1983년에 편찬한 <고전문학집성>에 소개한 가사작품이다. 그는 김씨 부인의 말에 따라 시집오기 전 익산 왕궁에서 외조부가 홍규권정가를 필사해주었다고 그 내력을 밝히고 있지만 작자는 미상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김익주의 손녀라는 구체적 진술과 배행(陪行) 온 오라비조차 돌아가자 할 정도로 어려운 시집살이 등이 괴똥어미전과 너무도 혹사한 규방가사로 복선화음가(福善禍淫歌)와도 상통된 부분이 많은 부녀가사이다. 복선화음가는 조선조 말 김한림의 종손 부인이 지은 규방가사로 이 홍규권장가와도 유사한 작품이다.규방(閨房)가사는 내방(內房)가사, 부녀가사 등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주로 시집가는 딸에게 어머니가 자기 친정의 문벌이나 혼전생활을 말하고 출가한 시가의 어려운 가정형편 속에서도 자신의 처신, 치산(治産), 태교, 교육 등을 훈계하는 것을 목적으로 창작 유전되어 온 여류작품이다. 주로 부부생활과 시부모 모시기(事舅姑), 제사보시기(奉祭祀), 손님접대(接賓客), 태교, 육아, 교육, 치산(治山), 행동거지(行身), 항심(恒心) 등을 중요덕목으로 삼고 있어 현대여성들에게도 귀감이 될 만한 온고지신의 귀중한 자료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가사들은 주로 여성을 가르치기 위한 계녀(誡女)형이 주종을 이루고 있지만, 과부가 되어 독수공방의 외로움을 한탄한 상사형(相思型), 화전놀이 같은 야유형(野遊型), 남편을 따라 바깥세상을 유람하는 기행형 등으로 대별된다. 본디 규방가사는 국문학계에선 영남지방 양반가에서 시작되고 분포된 문학장르로 알려져 왔지만, 호남에서도 창작, 유전되고 있는 작품들이 근년에 발굴됨에 따라 그러한 주장만을 인정하기 어렵게 되었다. 김준영 교수의 홍규권장가를 비롯해 필자가 졸저 옛시 옛노래의 이해(2008)에 소개한 고창 지역의 상사별곡(相思別曲), 동명이작(同名異作)의 치산가(治産歌) 1, 2가 그것이다. 어화 세상 사람들아 이 내 말씀 들어 보오 불행하다 이 내 몸이 여자가 되어나서김익주의 손녀 되어 반벌(班閥)도 좋거니와금옥(金玉)같이 귀히 길러 오륙 세 자란 후에 여공(女工)을 배워내니 재주도 비범하다월하(月下)에 수(繡)놓기는 항아(姮娥)의 수법(手法)이오월지예의 깁 짜기는 직녀(織女)의 솜씨로다 (중략)백화(百花)방초(芳草) 화원상(花園上)에 춘경(春景)도 구경하고청풍명월 옥규(玉閨)중에 달빛도 구경하고신신(新新)별미 다담상(茶啖床)도 입맛 없어 못 다 먹고 원앙금침 홍규 중에 책자도 구경하고세시(歲時)복랍(伏臘) 좋은 때에 쌍륙(雙六)도 던져보고설앙 옥비 시비(侍婢)들과 투호(投壺)도 던져보고즐거이 지내더니 십 오세라 연광(年光)차니고르고 다시 골라 강호(江湖)에 출가하니가산(家産)이 영체(零替)하여 수간두옥(數間斗屋) 청강상에사벽(四壁)이 공허하니 우린들 있을 손가 홍규권장가는 모두 252행 504구의 장형 규방가사이다. 서사와 본사 결사의 3단 구조를 이루고 있는데, 서사엔 여자로 태어난 한 많은 자신의 삶의 사연을 들어 보고 후세에 경계삼기를 바라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방년 15세가 될 때까지 반벌(班閥) 좋은 김익주의 손녀로 태어나서 금옥같이 귀하게 자라나서 오륙 세에 수놓기와 비단 짜기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10세에 열녀전과 효경편(孝經編)을 익히니 행동거지와 처신범절을 칭찬하지 않는 자가 없는 아름다운 규수, 즉 어엿한 아름다운 아가씨인 홍규(紅閨)로 성장함을 발단으로 하였다. 비단 옷과 좋은 음식이 많으니 굶주림을 어찌 알며, 온갖 꽃들이 가득한 화원에서 봄날을 마음껏 즐기고, 청풍명월 아름다운 규방에서 달빛을 맞으며 그림처럼 아름답게 살아가는 규방여인의 모습이 더욱 선연하다. 새롭고 맛있는 다담상(茶啖床)도 맛보고 원앙 비단금침 규수 방에서 서책도 읽어가며 섣달 제야엔 쌍륙(雙六)도 던지며 즐긴다. 설앙과 옥비같은 계집종들과 투호(投壺)도 던져가며 즐거이 보내다보니 어언 15세 성년이 되어 출가할 때가 당도했다는 것이다. 친정의 부모들이 고르고 또 골라서 출가하여 반벌좋은 강절강의 손부가 됐지만 시가는 한 두간 밖에 안 되는 가난하고 초라한 집이었다. 배행(陪行) 온 오라비조차 눈물을 흘리며 되돌아가자고 했으나, 누이동생은 마땅히 남편을 좇아야 한다는 여자의 운명적인 삼종지의(三從之義)를 말하며 그건 오라비의 실언(失言)이라 강변(强辯)하는 아름다운 여인의 미덕이 이 작품 내면에 흘러내린다. △전일환 교수 한국문학의 원천, 전북문학의 미학기획칼럼을 새해부터 매주 금요일 책과 세상면으로 옮겨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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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1.03 23:02

[12. 장현경의 사미인가(思美人歌)] 좌천에도 임금 그리움·사랑 노래

그리울사 우리 임금뵈옵고저 우리임금우리임금 성명(聲明)하셔천지요 부모이시니날 같은 미천신(微賤臣)을무엇이 가취(可取)라고 이은(異恩)을 자주입고연포(筵褒)가 정중(鄭重)하니고신(孤臣) 일촌침(一寸枕)이눈물이 바다이다중략중소(中宵)에 창을 열고북신(北辰)을 바라보니오운(五雲) 깊은 곳에우리임금 계시고나경루(瓊樓) 옥우(玉宇)에추기(秋氣)는 추워지고백로(白露) 겸가의미인(美人)은 얼어있네진령가 한곡조로묘묘(渺渺)한 천일방(天一方)이수문(隨門) 숙견을몽매(夢寐)에나 찾을 손가거연(遽然)히 잠이 들어일침(一枕)을 일워시니의연한 구일모양(舊日模樣)입시(入侍)에 들었구나용루(龍樓)를 높이 열고옥좌(玉座)가 앙림(仰臨)도다지척(咫尺) 전석(前席)에종일을 근시(近侍)하니천안(天顔)이 여작(如昨)하고옥음(玉音)이 온순(溫詢)한데촌계(村鷄) 한소리에홀연히 깨달으니심신(心神)이 창망하여눈물이 옷에 젖네군문(君門)이 여천(如天)하여다시 들기 어려울세꿈이나 빙자(憑藉)하여우리임금 보는 것을 계성(鷄聲)은 무슨 일로꿈조차 깨우는고방황(彷徨) 종야(終夜)에이 마음 경경(耿耿)하다종남산 불로(不老)하고한강수 도도(滔滔)하니슬프다 이내생각어느 때 그치일고작자 추담 장현경(張顯慶 1730-1805)은 본관이 흥성(지금 고창 흥덕)이며, 영조 6년에 전북 장수 번암에서 태어났다. 22세 때인 영조 28년에 정시(庭試) 병과에 16등으로 급제하여 춘추관 기사관 겸 홍문관 박사, 춘추관 기주관(記注官)과 편수관을 지냈다. 정조 20년(1796년)에 삼례 역승(驛丞)으로 좌천되었으나, 임금에 대한 원망 대신 오히려 임금을 그리워하는 연군류 32구의 가사 사미인가(思美人歌)를 지었다. 이 작품은 필자가 오래전 <한국문학지도> (1996, 계몽사, 56-57쪽)에 소개한 것으로 송강 정철이 전남 담양 창평에서 임금을 그리워하며 노래한 사미인곡, 속미인곡의 전범을 이은 사미인계의 연군류의 가사로서 국문학적 가치가 인정된다. 이 두 작품의 작자가 임금의 총애에서 소외된 환경과 처지가 서로 동질적이지만, 임금을 조금도 원망하거나 미워하지 않고 오로지 여성화자의 목소리로 임금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과 사랑을 노래한 충신연주지사(忠臣戀主之詞)라는데 큰 의의를 둘 수가 있다. 사미인계 시가의 원천은 굴원의 초사(楚詞) 가운데 사미인(思美人)에서 찾을 수 있다. 굴원이 노래한 미인(美人)은 아름다운 여인이 아니라 임금을 지칭한 말이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사미인계 노래 내면에 흐르는 정조(情調)는 대부분 여성적인 톤을 지니고 있다. 여성적인 목소리이어야만 자신의 절절한 마음을 임에게 전달하는데 가장 큰 호소력을 지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미인계 가사는 송강 정철의 양미인곡인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에서 그 절정을 이루었다. 거연히 잠이 들어 일침(一枕)을 일워시니/ 의연한 구일모양(舊日模樣) 입시(入侍)에 들었구나/ 용루(龍樓)를 높이열고 옥좌(玉座)가 앙림(仰臨)도다/ 지척(咫尺) 전석(前席)의 종일을 근시(近侍)하니/ 천안(天顔)이 여작(如昨)하고 옥음(玉音)이 온순(溫詢)한데/ 촌계(村鷄) 한소리에 홀연히 깨달으니/ 심신(心神)이 창망하여 눈물이 옷에젖네라는 정조는 송강의 속미인곡 적은 덧 역진(力盡)하야 풋잠을 얼픗 드니/ 정성이 지극하야 꿈에 임을 보니/ 옥 같은 얼굴이 반이나마 늙어세라/ 마음에 먹은 말씀 슬카장 살자 하니/ 눈물이 바라나니 말씀인들 어이하며/ 정을 다 못하여 목이조차 메여하니/ 오전(誤傳)된 계성(鷄聲)의 잠은 어찌 깨웠던고와 동질적이다. 오매불망 임금을 그리워하여 잠 못 드는 불면의 밤을 지내다가 잠시 옛 모습 그대로 임금을 가까이 모시는 꿈결 속에 젖어든다. 그런 자신을 홀연히 깨운 건 촌닭의 울음소리다. 새벽인줄 잘 못 알고 울어버린 닭의 울음소리에 꿈을 깨면서 임금과 나누었던 군신간의 정이 단절된다. 다시 외롭고 답답한 현실로 되돌아오게 된 것을 안타까워하며 닭에게 원망을 보내는 화자의 모습이 오히려 안쓰럽다. 그러하니 마음과 정신이 슬프고 가련하여 눈물로 옷깃을 적신다는 안타까움은 심신이 창망하여 눈물이 옷에 젖네라고 절절히 노래할 수밖에 없다. 이는 송강이 잠깐 풋잠이 들어 꿈속에 임금을 만나서 군신간의 정을 다하지 못하고 있는데, 때 이른 닭 울음소리에 잠에서 깨어나서 답답하고 어두운 현실을 깨닫게 되는 속미인곡의 정조(情調)와도 궤를 같이 하는 애닮은 상사지정(相思之情)이다. 영조 39년(1763년) 겨울가뭄이 극심했는데 동짓날 눈이 많이 내리자 영조는 친히 춘추관에 나와 잣죽과 꿩구이를 내려 격려하였다. 그러므로 장현경이 이에 감복하여 백설(白雪)이란 율시를 지어 바치자, 영조도 기뻐하며 한시를 친히 써서 이에 응답해 주었다. 장현경은 말년인 정조 23년(1799년) 고향인 장수 번암에 어서각(御書閣)을 짓고 영조가 자신에게 하사한 친필 어서를 자신이 지은 백설과 함께 잘 보관하였는데 2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대로 잘 전해지고 있다. 공교롭게도 장수군 산서면 오성리에도 태종 이방원이 사간공 안성(安省)에게 내린 왕지(王旨)를 보관한 어필각(御筆閣)이 세워져 영조의 어서각과 더불어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국문학자전주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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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12.26 23:02

[11. 정극인 상춘곡 (하)] 담양의 면앙정가단 형성, 조선조 가사문학의 원천

상춘곡의 허두(虛頭) 홍진에 묻힌 분네 이내생애 어떠한가 / 옛사람 풍류를 미칠까 못미칠까는 세속을 떠나 산 속에 은거하고 있는 풍류가 고인의 멋에 비교해 보면 어떨까라는 발화자의 서정적 표출로 출발된다. 이러한 풍류는 상춘곡의 결사(結辭)와 같이 부귀공명도 뜬구름이요, 단표누항(簞瓢陋巷)에 쓸데없는 생각을 아니하고 살아가는 티끌 없는 청정(淸淨), 그것은 청풍명월이 유일한 벗일 뿐이라는 사대부의 절제 있는 스토우어시즘(stoicism)적 미의식의 표출로 발산되었다. 백년행락 자체는 청풍명월을 벗하며 사는 안빈낙도의 도취적 감흥을 영탄한 것으로서 서사를 외연으로 한 서정성의 복합으로 파악된다는 것이다. 사실 가사 작품 속에서는 규방가사의 계녀(誡女)가류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서정적 정신보다는 서사적 방법을 통한 교술(敎述)적 정신이 근간을 이룬 작품들이 많다. 이러한 경향은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문학 장르의 역사 사회적 변모에 따른 분파, 내지는 변이(變異)화로의 한 전이형태라고 보아야 하고, 또 그것은 어디까지나 전술한 바와 같이 서정, 서사, 교술성의 복합성에서 출발된 어느 한 성격의 극대화로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상춘곡과 같은 은일(隱逸)류의 가사는 서정이 주조를 이루고, 서사와 교술은 이를 뒷받침하는 보조적 성격을 이루는 장르의 복합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발화자의 감흥이 객관적 대상에 머물지 않고 서정적으로 미화되어 향유자(독자)에게도 동일한 방법으로 감흥을 일으키고 공명(共鳴)을 얻게 된다. 그런 까닭에 텍스트를 통한 독자와의 공감대를 형성함으로써 수용되고 향유되는 특별한 장르라고 보고 싶다. 정극인의 이러한 은일류의 가사는 담양의 송순의 면앙정가로 이어지고, 이 면앙정가의 영향 아래 송강 정철의 성산별곡으로 연결되는 면앙정가단이라는 가사의 문화권을 형성하였다. 중종 5년(1510년)에 쓴 향약 발문을 보면 취은 송세림은 불우헌 정극인보다 30년 후에 태어났으므로 선생을 직접 만나 가르침이나 인도를 받을 수 없는 것을 한탄했음을 알 수 있다. 즉 정읍 태인 고현학당을 차운(次韻)한 머리에 학당은 본시 고(故) 불우헌공 정극인이 교수하던 곳인데, 취은 송세림에게 또 곧바로 이어졌다는 기록만 보면 송세림은 같은 고을에 살았던 정극인을 얼마나 존경하며 사숙했는지를 알만하다는 것이다. 송순은 일찍이 중종 13년(1518년) 송세림이 능성현감으로 있을 때 직접 찾아가 사사를 받았는데, 그 때 스승으로부터 정극인의 〈불우헌유고〉를 접할 수 있었고, 상춘곡이나 불우헌가와 불우헌곡도 읽어 볼 수 있었기 때문에 정극인과의 간접적인 문학적 영향관계를 엿볼 수 있다. 중종 22년(1527년)에 세자 호의 동궁에 작서(灼鼠)의 변과 요사스런 현패(懸牌)사건이 일어나고 사간원과 사헌부에서 억울하게 사건의 주모자로 몰리게 된 경빈 박씨와 아들 복성군을 죽이라고 간하자, 송순은 이의 불가함을 역설하다가 벼슬에서 물러났다. 2년 후인 중종 26년 고향인 담양 기촌으로 돌아와 면앙정을 짓고 자연과 벗하며 살았다. 마침 세조찬탈의 정국을 겪으며 태인 칠보로 은거한 정극인이 험난한 세상과는 무관한 것처럼 눈앞에 펼쳐지는 봄날의 아름다운 정경을 그려낸 상춘곡처럼 송순은 중종조에 세자를 둘러싼 정치적 변란을 피해 담양 기촌의 면앙정에 유유자적하면서 은일가사 면앙정가를 창작했을 것으로 보인다. 심수경은 「견한잡록」에서 송순의 면앙정가는 그윽한 산천과 넓디넓은 전야의 형상이라든가 정대(亭臺)의 높고도 낮게 굽이도는 지름길의 형상을 두루 포서(鋪敍)하고, 사시사철 변모하는 아침저녁의 경치를 빠짐없이 기록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문자를 섞어가며 운치 있게 도는 것을 지극히 잘 표현했음으로 진실로 볼만하고 가히 들을만함으로 송순의 작품 가운데 가장 으뜸 작이라 절찬하였다. 이러한 평설은 홍만종의 〈순오지〉에서도 동일하게 찾아 볼 수가 있는데, 순국어의 자유 자재로운 구사나 조사법의 기발한 솜씨, 조어의 공교로움, 이에 따른 절절한 정감 등은 가히 가사문학의 가치를 한껏 고양시킬 수 있는 요소가 아닐 수 없다. 한문만을 진서(眞書)라 숭상했던 조선 사대부들의 평설로 본다면 대단한 작품평이 아닐 수 없다. 1960년대 김동욱이 잡가에서 원문을 발견하기 이전에는 〈면앙집〉에 신번(新飜) 면앙정장가 1편이라는 부(賦)형식의 번역가만 실려 그 진가를 알 수 없음으로 아쉬웠다. 하지만 김동욱 교수에 의해 잡가에서 발견된 면앙정가 원전을 보게 됨으로써 심수경이나 홍만종 등이 절창이라 평설한 내용을 이해할 수 있음은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송순의 제자인 박상이나 김윤제, 기대승, 김인후, 임억령 등에게 배운 정철은 이들을 통해 면앙정 송순을 사사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송순의 면앙정가를 본받아 성산(별뫼; 무등산자락)의 사계에 따른 아름다운 자연의 풍광을 성산별곡에 담아냄으로써 이들을 중심으로 한 면앙정가단이 형성되었다. 그러므로 송순은 스승 송세림을 통해 정극인의 상춘곡을 본받아 면앙정가를 창작하였고, 정철은 송순의 면앙정가와 같은 성산별곡을 지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정극인의 상춘곡은 조선가사문학의 효시(嚆矢)요, 남상(濫觴)이 아닐 수 없고, 담양에 면앙정가단을 형성케 함으로써 조선조 500여년을 이어 온 한국가사문학장르의 원천이 되었다고 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전북 태인 칠보를 발상지로 한 정극인의 상춘곡은 담양의 면앙정가단으로 이어지고 호남가단을 형성함으로써 조선조 사대부가사문학을 이루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임진란 이후에는 부녀자, 평민 등으로 작자와 향유자가 확대되면서 국민적 장르로 발전하여 조선조 국문학의 질량을 드높였다고 생각된다. 국문학자전주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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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12.19 23:02

[10. 정극인의 상춘곡 (중)] '서정·서사·교훈' 종합 복합장르

(가) 엇그제 겨울지나새봄이 돌아오니 도화행화(桃花杏花)는석양리(夕陽裏)에 피어있고녹양방초(綠楊芳草)는세우중(細雨中)에 푸르도다칼로 말아낸가붓으로 그려낸가조화신공(造化神功)이물물(物物)마다 헌사롭다수풀에 우는 새는춘기(春氣)을 못내 겨워소리마다 교태(嬌態)로다물아일체(物我一體)어니흥(興)이에 다를소냐화풍(和風)이 건듯 불어녹수(綠水)를 건너오니청향(淸香)은 잔에 지고낙홍(落紅)은 옷에 진다천촌만락(千村萬落)이곳곳에 벌려있네연하일휘(煙霞日輝)는금수(錦繡) 재폈는 듯엇그제 검은 들이봄빛도 유여(有餘)할샤(나)송죽울울리(松竹鬱鬱裏)에 풍월주인(風月主人) 되었어라시비(柴扉)예 걸어보고정자(亭子)에 앉아보니소요음영(逍遙吟詠)하여산일(山日)이 적적(寂寂)한데한중진미(閒中眞味)를알 이 없이 혼자로다아침에 채산(採山)하고낮에 조수(釣水)하세소동(小童) 아이에게주가(酒家)에 술을 물어어른은 막대 짚고아이는 술을 메고미음완보(微吟緩步)하여시냇가에 혼자앉아명사(明沙) 조한 물에잔 씻어 부어들고청류(淸流)를 굽어보니떠오나니 도화(桃花)로다무릉(武陵)이 가깝도다저산이 그것인가발화(發話)자는 봄날의 아름다운 경치를 경탄하다 못해 도취된 나머지 칼로 말아낸가, 붓으로 그려낸가/ 조화신공이 물물마다 헌사롭다라는 탄사를 영발(詠發)하고 있다. 이는 봄날의 풍경이 객관적 대상으로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주관적 관조의 세계가 심미적인 절정의 경지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즉 봄날의 경치가 명장들의 칼로 조각된 것인지, 아니면 유명한 화공(畵工)에 의해 붓으로 그려낸 것인지 모르지만, 이는 분명 보통 사람에 의해 이룩된 것이 아닌 필경 조화옹(造化翁)의 신비세계의 경지에 이른 결과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자연 경물 속에 서정을 담은 경중정(景中情)의 정서적 가치의 표방은 조선조 사대부들의 일반적인 시적 감흥이었으며 시정신이 되어 왔다. 수풀에서 우는 꾀꼬리가 봄 향기에 취해 노랫소리마저 교태롭게 들리는 것은 발화자의 정서의 직서화(直敍化)가 아닌 조선조 사대부들의 일반적 정서의 표출 방식이었다. 물(物)과 아(我), 즉 자연과 인간이 일체가 되는 물아일체의 경지는 곧 자연을 객관적 대상으로만 보지 아니하고 바로 발화자의 정서로 주관화하는 관조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서정은 상춘곡을 수용하는 향유자나 독자층의 입장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가)를 읊조리거나 창(唱)하는 경우에 있어서도 발화자의 입장과 같이 유교적 가치관에 입각한 서정적 진술로 받아들여 미적 감흥에 젖게 된다는 것이다. 봄날의 주요 소재로 등장하는 도화행화(桃花杏花)나 녹양방초(綠楊芳草), 세우(細雨), 새, 화풍(和風), 녹수(綠水), 청향(淸香), 술잔, 낙홍(落紅), 천촌만락(千村萬落), 연하일휘(煙霞日輝) 등은 춘경을 그리는데 사용된 소재만은 아니다. 이러한 객관적 대상으로서의 자연은 그것이 객관적 대상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발화자의 시혼(詩魂)과 교감되어 물아일체의 경지에 이르게 되며 향유자(독자)층에서도 똑같은 심정적 도취로 수용되어 나타나게 된다.(나)의 경우도 봄날 하루 동안의 생활을 순서대로 늘어놓은 일기처럼 서사성을 보여주는 진술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즉 사립문(柴扉) 밖을 걸어보고, 정자에 앉아 보며, 나물캐기와 낚시질, 또는 주가(酒家)에서 술을 받아 시냇가에 홀로 앉아서 취락(醉樂)에 빠져 있는 발화자의 모습은 하루생활의 일목요연한 일기적인 서술로도 볼 수 있다. 하루생활의 나열로 관심은 객관적 대상에 머무르고 있고, 서사성을 외연(外延)으로 하면서도 객관적 대상과 발화자는 물아일체의 도취적 경지에 이르러서 서정성에 귀결되므로 서사와 서정의 복합성이 내포되었다고 할 수 있다. 조동일 교수는 상춘곡은 봄날의 풍경과 그 속에서 보낸 하루를 그리고 있는데 그치는 작품이 아니며, 그러한 사실을 묘사하여 남에게 알려주고 보여주는 작품으로서 이해하고 있다. 즉 사실의 전달에만 그치질 않고 사실의 전달을 통하여 일정한 교술(敎述)적 목적을 첨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사의 장르를 가르쳐주고 알려준다는 의미에서 교술장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가사는 교술장르만이 아니라, 서정과 서사, 교훈성이 종합된 복합장르로 파악하는 게 옳다. 이러한 특성은 우리나라 가사장르만이 가지는 고유성으로 세계적인 문학장르라 할 수 있다. 오랜 관직생활을 했는데도 조산대부행사간원(朝散大夫行司諫院) 정언(正言)에 그친 정극인은 공명과 부귀도 나를 꺼려 피해가니 단표누항(簞瓢陋巷)에서 흣튼혜음 아니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자조(自嘲)가 내면에 깔려 있다. 그러한 가운데 유교 윤리적 타당성을 설정하고 안빈자족(安貧自足)이란 유교적 철학을 가르쳐 주기 위한 교훈적 진술 위에 서정과 서사가 복합된 장르라는 것이다. 국문학자전주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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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12.12 23:02

[9. 정극인의 상춘곡 (상)] 처가 칠보에 '불우헌' 짓고 자연 벗삼아 안빈낙도 추구

상춘곡(賞春曲)의 작자 정극인(태종 1년 1401~성종 12년 1481)은 인간 세상, 특히 세조찬탈이란 정란 이후 온갖 시기와 질투, 모함이 득시글대는 벼슬세계를 떠날 때까지 간난신고의 고통을 많이 겪었다. 그는 세종 11년(1429}에 생원시에 합격을 했지만, 여러 번이나 과거에 실패를 거듭했다. 1437년 세종이 흥천사를 중건키 위해 토목공사를 벌이자, 태학생(太學生)들을 이끌고 그 부당함을 항소하다가 북도(北道)로 귀양을 갔고, 그 뒤 유배 길에서 풀려난 후 처가가 있는 태인 칠보로 은거하여 동진강가 비수천에 불우헌(不憂軒)이란 초옥(草屋)을 짓고 향리자제들을 모아 가르쳤다. 단종 1년(1453) 52세 때 전시(殿試)에 응시하여 급제한 후, 전주부 교수참진사로 있다가 1453년 단종의 숙부인 세조에 의해 계유정란이 일어나자, 벼슬을 그만 두고 아내 박씨의 고향인 태인 칠보로 내려가 동진강가에 집을 짓고 세상의 근심 걱정과 관계가 없다는 뜻으로 그 초가집을 불우헌이라 칭하고 자신의 호로도 삼았다. 자연을 벗 삼아 그 속에서 스스로 즐거움을 찾아가며( 自娛自樂) 살아가는 동안 조선 가사문학의 효시(嚆矢)작인 상춘곡을 창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상춘곡은 세조정란 후 두 번 째 칠보로 귀향했던 그의 나이 54세 때 지은 것으로 생각 된다. 수양대군이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자, 1455년 전주부 교수참진사의 직을 사임하고 다시 칠보로 은둔했다. 하지만 그해 12월 불우헌 정극인은 좌익원종공신 4등을 받고 다시 10년간의 벼슬길에 올라 4번의 성균관 주부(主簿)와 2번의 종학박사(宗學博士)를 지내고 사헌부감찰, 통례문감찰, 태인현 훈도, 사간원헌납, 사간원정언을 끝으로 성종 1년(1470)산수가 수려한 칠보로 세 번째 은둔를 선택하였다. 소용돌이치는 그러한 정치의 격랑 속에 일찍 벼슬을 그만 두고( 引年致仕) 자연 속에 묻혀 산 그였으므로 세상의 부귀공명이 자신과는 무관한 것이 되고, 자신의 벗은 인간세상이 아닌 다만 청풍명월일 수밖에 없다고 토로하면서 세상을 등지며 살았다. 그리하여 표면상으로는 하늘과 사람을 원망하거나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그 가운데 즐거움을 누리며 살아가기 때문에 누추한 거리에 한 줌의 밥과 자그만 표주박의 물(簞瓢陋巷)로 연명하면서 살았다. 그는 쓸데없는 인간세상의 명예나 부귀를 생각지 아니하며, 오로지 순진무구한 자연만을 즐기는 것으로 인생 백년의 행락(行樂)을 표방하는 것처럼 나타난다. 홍진(紅塵)에 묻힌 분네이내생애(生涯) 어떠한가 옛사람 풍류(風流)를미칠까 못 미칠까천지간 남자 몸이날만한 이 많건마는 산림(山林)에 묻혀있어지락(至樂)을 모를 것인가 (중략)공명(功名)도 날 꺼리고부귀(富貴)도 날 꺼리니청풍명월(淸風明月)외에어떤 벗이 있사올고단표누항(簞瓢陋巷)에허튼 생각 아니 하네아무렴 백년행락(百年行樂)이이만한들 어떠하리발화자(發話者)는 흙먼지같이 더러운 티끌세상(紅塵)을 벗어나 이토록 아름다운 강산에서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처럼 살아가는 자신의 삶이 어떠하며, 그리고 도연명과 같은 옛 사람의 풍류에 이를 수 있지 않느냐고 스스로 자문자답하는 선인(仙人)의 모습으로 갈아든다. 이어서 봄날 하루 동안의 흥취에 도취되어 신선처럼 살아가는 대목이 한 폭의 수채화처럼 펼쳐진다. 그리고 인간세상의 부귀와 공명도 나를 꺼려 지나쳐버림으로 나와는 무관한 것이 되어버린다는 인간 본연의 회한(悔恨)이 진하게 서려온다. 인간세상의 부귀공명이 뜬구름 같고 자신과는 무관한데, 쓸데없이 그것에 매몰되고 갇혀서 근심과 걱정 속에 살아온 자신을 한탄하며 스스로 걱정을 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불우헌이라 스스로 이름 짓고, 자연과 하나가 되는 물아일체(物我一體)를 체험하려 하였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인간세상의 부귀와 공명이 자신으로부터 떠나가질 아니하고 오히려 끈질기게 붙잡고 늘어지므로 그런 질곡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근심하는 내면의 모습이 드러나 안타깝다. 작중화자는 청풍명월 외에 어떤 벗이 있사올고라며 인간 세상에는 자신을 위로하며 동행할 수 있는 진정한 벗이 없고, 오로지 맑은 바람과 밝은 달(淸風明月)만이 자신의 벗이라고 호소하고 있다. 이는 고산 윤선도가 오욕(汚辱)의 벼슬세계를 떠나 해남 금쇄동에서 산중신곡(山中新曲)을 지으며 어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변할 줄 모르는 수석송죽월(水石松竹月), 이 다섯의 자연물만이 내 벗이라 했던 오우가(五友歌)의 경지와도 같다. 또한 고려 말의 나옹선사(1320~1376년)가 56세에 남기고 간 선시(禪詩) 청산은 나더러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날더러 티 없이 살라하네/ 사랑도 내려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물처럼 바람같이 나에게 가라하네(靑山兮要我以無語 蒼空兮要我以無垢 聊無愛而無憎兮 如水如風而終我)라는 속세를 떠난 티끌 하나 없이 청정무구한 경지가 연상된다. 이렇듯 스스로는 바람과 물처럼 아름다운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과 같이 인간세상의 허튼 생각을 아니하고 인생 백년의 행락이 이만한들 어떠하리라며 위안하고 자족(自足)하려 짐짓 애쓰고 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러면 그럴수록 상춘곡 내면엔 오히려 그러한 걱정과 근심을 떨치지 못하고 몸부림치는 작중화자의 모습이 역연히 드러나 근심하지 않고 살아간다는 불우헌을 무색케 한다. 차라리 불우헌이라기보다 세상의 부귀공명의 끈을 놓아버리지 못하고 한탄하고 근심하는 우헌(憂軒)이라 할 만큼 화자(話者)자신 내면의 진 모습이 엿보여 안쓰럽게 보이기도 한다.국문학자전주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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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12.05 23:02

[8. 서동요와 무왕 (하)] 선화공주 간청으로 미륵사 창건

이 사학자들은 공주 취리산에서 의자왕의 아들이며 무왕의 손자인 웅진도독 융과 신라 문무왕이 체결한 맹문(盟文)인 당평백제국비명(唐平百濟國碑銘)에 백제 선대왕들을 성토하고 특히 의자왕의 실정을 거론하는 대목에서 동벌친인(東伐親姻)의 결정적 단서를 제시하였다. 동벌친인의 친인은 어머니를 지칭하는 것이며, 동벌은 동쪽 신라를 쳤다는 뜻으로 의자왕은 천륜을 그르치고 어머니 선화모후의 나라인 신라를 무례히 침략했다는 의미를 지니는 말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사택왕후는 선화왕후 사후에 맞이한 계비나 빈이었다는 사실이 명확하다는 것이다.또 〈일본서기〉 642년 백제조에도 의자왕은 무왕의 왕후가 죽자마자, 자신의 동생인 교기와 국주모(國主母)의 여동생 4명 등 총 40명을 섬으로 추방하는 숙청을 단행했다는 기록을 제시하였다. 이는 자신의 왕위등극을 반대했던 세력이 국주모라 적힌 후비 사택적덕의 딸이 명백하다는 것으로 무왕의 왕후는 선화공주라는 것을 알려주는 단서가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삼국사기 백제본기 무왕조의 기록 가운데 무왕 39년 봄 3월 왕은 빈과 더불어 큰 연못에 배를 띄워 놀았다라는 사실도 제기했다. 이를 보아도 왕은 왕비와 여러 명의 빈(嬪)을 거느렸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가 있고, 따라서 봉안기에 적힌 사택적덕은 빈이었거나 계비였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삼국유사〉 법왕조에도 〈고기〉(古記)에 있는 것과는 다르다. 무왕은 가난한 어머니가 물속의 용과 관계하여 낳은 아들로 어릴 때 이름은 서여, 즉위한 뒤에 시호를 무왕이라 했다. 이 절은 첫 왕비와 더불어 이룩한 것이다라 씌어 있다. 여기서 말한 첫 왕비는 선화왕후였을 것이며, 따라서 사택적덕의 딸은 선화왕비가 죽은 후에 무왕이 맞이한 계비나 빈이었음이 명백하다. 2009년 발견된 금제사리봉안기는 서기 639년에 제작봉안된 것이요, 이 해는 무왕이 사망하기 2년 전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역사적인 전거(典據)에 따르면 〈삼국유사〉 무왕조의 기록은 한낱 설화 쪽의 기록이라기보다 역사적 사실임에 틀림없다. 무왕이 미륵산(일명 용화산) 사자사로 불공을 드리러 가는 도중에 나타난 미륵삼존불을 기려 선화공주가 무왕에게 절을 짓자는 간청대로 회전(會殿)과 탑, 낭무를 3곳에 세운 일과, 무왕이 사자사 지명법사의 신력(神力)에 힘입어 연못을 메웠다는 사실이 발굴과정에서도 확인되었다. 그리고 미륵사가 사자사로 가는 길 용화산 아래에 있었다는 것이 삼국유사의 기록과도 일치한다. 또한 미륵사의 창건년대도 2009년 서탑 해체과정에서 발견된 1370년 전(무왕 40년 서기 639년)인 금제사리봉안기의 기해년 정월 29일과도 일치한다. 미륵사는 1980년부터 1996년까지 16년간 발굴조사를 했다. 이 작업에 참여했던 원광대 김선기 박물관장은 절터에서 갈대잎이 섞인 뻘층이 나왔는데, 이는 유사의 기록대로 연못을 메워 절을 지었다는 사실이 증명되는 셈이며 발굴과정에서도 엄청난 물이 솟아났다고 증언하였다. 또한 1994년에는 사자사(현 사자암)를 나타내는 1322년 고려 때 만든 기와가 출토되어 삼국유사의 역사적 사실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이 와편은 현재 국립전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 외에도 1916년 말통(마동, 맛동이 후에 음전된 것)대왕릉이라고 전해오는 쌍릉을 일제가 발굴했는데 그 결과 묘제(墓制)가 백제왕릉과 일치했다는 사실과 금마 마룡지 근처엔 실제 서동의 어머니가 집을 짓고 살았음을 알 수 있는 주춧돌이 출토되었다는 것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그리고 인근의 금구와 김제에서 일제 때부터 개발한 금광과 1970년부터 1980년대까지 많은 양의 사금을 채취했다는 사실을 보더라도 서동이 유사의 기록대로 인근에서 생산된 많은 양의 금을 오금산(五金山)에 쌓아놓고 선화공주에게 보여주었다는 유사의 기록과도 상통된다는 것이다. 공주대 사학과 정재윤 교수도 무왕에 대한 이설이 많은 건 역설적으로 말하면 무왕이 적자가 아니어서 다음 왕을 이을 수 있는 적자개념으로 표현하기 위해 법왕의 아들로 표기하였고, 그러므로 유사에선 연못의 용과 관계하여 낳은 지룡지자(池龍之子)라 한 것이라 하였다. 실제 27대 위덕왕은 재위 38년간에 아좌태자인 법왕에게 왕위를 넘기지도 못하고 고령인 동생 혜왕에게 왕권을 넘겼다. 그러나 혜왕은 1년 만에 죽었고 그런 연후에야 위덕왕의 아들 법왕에게 왕위가 넘어갔지만, 법왕도 혜왕처럼 1년 만에 죽음을 맞이했다. 그래서 등극한 왕이 법왕의 아들인 제30대 무왕이다. 이러한 왕위의 승계과정을 보면 이 시대는 신권(臣權)이 왕권보다 강했고, 그 다툼도 심각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적국인 신라의 선화공주를 왕비로 맞아들여 어려운 국면을 전환시키고자 했던 무왕의 정치적 행보가 가능했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어쨌든 서동요의 주인공 무왕과 선화공주가 무관하다면 신라향가가 기록된 책에 서동요가 실려 전해질 까닭이 없다. 그리고 절세미인인 신라공주가 적국의 백제인을 사랑했다는 드라마틱한 낭만적인 러브스토리가 만들어져 신라인들에게 구전되어 전해질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서동요의 작자는 익산 금마에서 마(薯)를 팔아서 어렵게 생계를 꾸려간 서동인 무왕이며, 유배 길에 서동에게 한눈에 반해버린(遇爾信悅) 선화공주 사이에 얽힌 역사적인 노래가 서동요임을 부정할 길이 없다. 그리고 정사(正史)에서 기록할 수 없었던 신이(神異)한 무왕의 역사적 사건들을 일연은 〈삼국유사〉 기이(紀異)편에 실었을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일연의 〈삼국유사〉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익산 미륵사지에서 2009년 출토된 금제사리봉안기에 가려진 역사적 사건들, 예컨대 무왕의 첫 왕비가 선화였고, 서동이 서동요를 지은 백제 30대 무왕이었으며, 선화왕후의 청으로 미륵사를 창건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증명해주는 중요한 사료라는 사실이 밝혀진 셈이다. 국문학자전주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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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11.28 23:02

[7. 서동요와 무왕 (상)] 삼국유사 속 낭만적 사랑 이야기

삼국유사 무왕조에는 향가 서동요(薯童謠)를 창작하게 된 배경설화와 함께 그 작품이 오롯이 전해오고 있다. 30대 무왕의 이름은 장(璋)인데 그의 어머니는 과부로 서울 남지(南池)변에 집을 짓고 살았다. 연못의 용과 관계(池龍交通)하여 아들을 낳았다. 어릴 때는 서동이라 불렀는데 그릇의 크기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器量難測)로 뛰어났다. 항상 마(薯)를 캐어서 팔아가지고 어렵게 살았으므로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마동, 혹은 서동(薯童)이라고 하였다. 신라 진평왕의 셋째 공주 선화가 빼어나게 아름답다(美艶無雙)는 말을 듣고 서울로 가서 아이들에게 마를 나눠주면서 친하게 지내고 자신을 따르게 한 후에 서동이 아이들을 꾀어서 부르게 한 동요는 다음과 같다. 선화공주님은남몰래 얼려(嫁)두고마동방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 진평왕의 딸 선화공주를 아내로 맞이하기 위해 신라로 건너간 마동은 자신이 지은 참요(讖謠) 서동요를 아이들에게 부르게 했는데, 선화공주가 밤마다 마동과 놀아난다는 이 노래가사는 순식간에 온 나라에 퍼졌다. 결국 선화공주는 유배형이 내려지게 되었고, 유배 도중에 나타난 마동과 눈이 맞아(遇爾信悅) 익산 금마로 가서 왕이 된 무왕과 미륵사를 창건하였다. 미륵산 사자사(師子寺)에 불공을 드리러 가던 어느 날, 길가 연못 속에서 미륵삼존불이 나타나자, 선화공주가 이는 필시 불사(佛事)를 일으키라는 부처의 뜻이라고 무왕에게 말하고 지명(知命)법사의 신력(神力)을 빌어 하루 만에 연못을 메우고 그 위에 미륵사를 창건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이 선화공주와 무왕의 낭만적인 사랑이야기에 묻어 고려조까지 이어졌고, 끝내는 삼국유사에 실려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삼국유사에 전해오는 향가 24수 모두가 월명사나 충담사, 영재 같은 신라의 승려나 신충과 같은 관료, 또는 어떤 노인 등 그 배경설화와 더불어 작위(作爲)적인 인물로 되어 있지만, 그 가운데 유일하게 서동요의 작자만은 백제 무왕이라는 역사적 인물로 전해진다는 사실이 자못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바보 온달이 산 속에서 홀어머니와 외로이 살다가 선녀 같은 고구려의 평강공주와 혼인하여 대장군이 된 역사적인 사랑이야기의 구조와도 유사한 형태다. 이는 평민도 왕족과 혼인할 수 있다는 본디 인간에게 내재된 신분상승욕구의 잠재소원심리가 성취되어 나타난 결과에 다름 아니다. 서동요와 그 배경설화도 백제와 신라 양국의 왕들이 세력이 막강한 고구려를 견제하면서 자국의 영토를 지키기 위해 나제동맹(羅濟同盟)의 일환으로 맺게 된 정략적 혼인정책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이 동맹은 고구려 장수왕의 남하정책으로 두 나라가 위협을 받자, 백제 24대 동성왕이 AD.493년 신라 소지왕에게 사신을 보내 왕족인 비지의 딸을 왕비로 맞이한 것을 시작으로 출발되었다. 하지만 신라 진흥왕 때 백제 26대 성왕이 관산성 전투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면서 양국간의 화해와 협력관계가 결렬된 정책이었다. 삼국유사를 쓴 일연은 무왕조에서 고본(古本)에는 무강(武康)왕이라 했으나 백제에는 그런 왕이 없으므로 이는 잘못이다라는 주(註)를 달았다. 그러므로 삼국유사는 고본이라는 역사서를 바탕으로 하여 쓴 것으로 무강왕이 아니라 무왕이라고 했다. 그리고 선화(善花)를 혹은 선화(善化)라고도 한다는 주(註)를 달거나, 미륵사를 국사에서는 왕흥사라 했고, 삼국사에는 무왕을 법왕의 아들이라고 했으나 여기서는 과부의 아들이라 했으니 자세히 알 수 없다라고 하는 등 네 번씩이나 주를 단 것을 보면 일연(一然)은 역사에 대해서도 해박한 승려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측면에서 무왕은 나제동맹이 이어졌던 25대 무녕왕이라는 사학자들의 견해도 있었다. 강(康)과 녕(寧)은 이음동의어(異音同義語)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도 또한 역사적인 사실이나 연대상으로 보아도 무왕과 일치하지 않는다. 무녕왕은 25대왕이요, 무왕은 30대왕이며 100년이란 시간적 간극도 너무 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연의 삼국유사에 선명하게 남아있는 무왕조의 역사적 기록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삼국유사는 고본이라는 사서(史書)에 의지해서 썼다는 주(註)를 보아도 다른 어떤 역사서보다 신뢰도가 높다고 아니 할 수 없다. 그래도 아니라면 유전해 오는 유물, 유적이 남긴 자취를 더듬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수 십 년간 이어져온 미륵사지 발굴과 복원과정에서 2009년에는 세상이 놀랄만한 역사적 유물이 나왔다. 전북 익산군 금마면 기양리 미륵산 남쪽 기슭에 있는 국보 11호인 미륵사 서탑 기단층 아래에서 금제사리봉안기 1장(전면 음각 금석문 99자, 후면 94자 총 193자) 이 1370년이란 아주 까마득한 천사백년 꿈을 깨고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그 봉안기엔 무왕의 왕후가 선화공주가 아닌 좌평(佐平)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딸로 명기돼 있었고, 미륵사를 창건한 후 무왕 40년(서기 639년)에 우리나라 최고(最古) 최대의 서탑을 세웠다는 기해년 정월 29일이 선명하게 남아 있어 국문학계나 역사학계를 놀라게 하였다. 하지만 고조선의 단군설화까지 기록되어 반만년의 역사가 오롯이 담긴 엄연한 조선의 역사서인 삼국유사를 허황된 것이었다고 단언키는 더욱 어려운 문제이다. 더구나 풍요, 헌화가, 도솔가와 더불어 원시고시가 4구체 향가인 서동요의 정체성(正體性)을 흔들 수도 없기 때문이다. 때마침 사학자인 이도학과 노중국 교수는 선화공주는 31대 의자왕의 생모이며, 30대 무왕의 왕후였다는 역사적 사실을 제기하고 나섰다. 국문학자전주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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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11.21 23:02

[6. 정읍사 (하)] 믿음 바탕 여유로운 기다림 미학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정읍사는 백제오가 가운데 유일하게 가사가 전해오는 노래다. 정읍사에 담긴 정서가 이토록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내면에 면면히 흐르는 곱고 아름다운 여인의 기다림의 미학이 우리 고시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을 만큼 유려하다. 조선조의 건국이념인 유교윤리에 정읍사에 내재된 여필종부의 미덕이 이만큼 부합된 노래가 없기 때문에 백제오가 가운데 정읍사만이 '악학궤범'에 실려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흔히들 신라여인들은 자유분방한데 비해 백제 여인들의 성정을 지조(志操)와 정절(貞節)이라고 규정한 소이연도 여기에 기인된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은 '고려사'에 곡명과 더불어 노래의 내용만이 간단하게 소개된 정도이지만, 선운산, 정읍, 지리산, 방등산, 무등산 등의 백제오가나, '삼국사기'에 전해지고 있는 도미설화 등은 정절의 백제여인상을 대표하는 귀중한 자료다. 그러기에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 여성들의 성정을 요약할 때 백제의 여인들은 다른 나라들 여성보다 비교적 아름다운 정절과 곧은 지조를 지녔다고 말하는 게 아닐까싶다. 고려조 속요들은 대부분 이별을 노래하거나 영원히 이별하지 아니할 것을 노래하는 것들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이에 반해, 정읍사는 그러한 정조를 노래하는 속된 심사와는 차원을 달리한 여인의 믿음을 바탕으로 여유 넘치는 기다림을 노래하고 있다는데서 그 미적 가치를 찾아볼 수가 있다. 그리움이나 기다림의 화자(話者)의 간절한 기원은 하늘에 높이 떠있는 보름달만큼이나 상승되면서 정읍사에 토로되어 절정에 이르기 때문이다. 정읍사의 내레이터인 행상인의 아내에게서 느껴지듯이 남편이 행상을 나가면 오랫동안 자유분방한 상태에 놓이게 됨으로써 고려조의 속요 쌍화점, 만전춘별사나 신라 향가 처용가처럼 다분히 다른 남정네들과의 에로틱한 사랑에 빠질 수도 있다. 그러나 정읍사의 여인은 그런 부정(不貞)의 여지를 조금도 허용칠 아니한다. 신라의 처용이 달 밝은 밤 탑돌이를 나간 사이에 외간남자와 정을 통해버리고만 처용 아내의 유희적 방탕성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라는 말이다. 행상인의 처라고 하는 제한적 개방성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일편단심 남편의 무사귀환을 기원하는 정읍사야말로 인간의 본능과 감성적 욕망을 극복한 절창(絶唱)이 아닐 수 없다. 즉 사랑과 도덕, 낭만과 지성이 한데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어내는 이 작품은 본능과 현실적 도덕성간의 근원적 양면성이 동시에 내재돼 있는 노래라는 것이다. 그러한 인간 본연의 갈등이 표출되지 않은 채 절제되어 형상화한 시가가 바로 정읍사라는 점이 이 노래가 지니는 매력이다. 정읍사가 달을 주요 소재로 하고 있다는 점도 여느 작품과 다르다. 처용가의 달이 '유희(遊戱)를 위한 달'이라면 정읍사의 달은 기다림과 기원을 담은 '정절(貞節)의 달'이라고 할 수가 있다. 허소라 교수는 '정읍사 주제고(井邑詞主題攷)'에서 달이 밝을수록 그 만큼의 시간이 흐르고 임과 나와의 거리도 그 만치 가까워진다는 이등변삼각형의 기하학(幾何學)적인 특수구조를 보이는 노래라고도 하였다. 즉 기다리는 남편과 내레이터인 나 사이에 떠 있는 달이 높이 오를수록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진다는 원리를 통해 화자의 간절한 사랑이 더욱 깊어진다는 것으로 파악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읍사는 달에게 내 마음을 전해달라는 유럽의 직소(直訴)적인 소야곡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노래다. 오로지 남편만을 걱정하는 기다림과 기원이 달을 매체로 함축적으로 형상화된 것도 이 작품의 품격을 고양시키는 점이다. 그리고 미르체아 엘리아데(Mircea Eliade)가 주장한 바와 같이 물-진흙탕물이지만-과 달, 여성의 3요소가 하나의 생생력환대(生生力環帶)를 이루어서 남편의 무사안녕을 비는 종교적인 기원은 숭고한 신성성까지 불러일으키고 있다. 믿음을 바탕으로 한 백제 여인의 기다림의 미학은 오로지 사랑하는 임의 무사안전만을 위해 아무 곳이나 짐을 벗어놓고 쉬고 오라는 여유의 아름다움으로 표상된다. 이러한 믿음을 전제로 한 부부지정이 내면에 흐르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여유가 가능한 것이며, 남편의 무사함을 능가할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아름다운 여심(女心)으로 나타난다. 오늘밤의 무사귀환이야말로 순전히 남편에게 달려 있는 일이기 때문에 당신의 임의대로 해달라는 소박한 마음속엔 일체의 불안이나 질투, 잡념이 스며들 여지가 없고, 오로지 변할 줄 모르는 부부의 믿음만이 노래가사의 행간에 자리하고 있다. 이와 같은 지순지고(至純至高)한 여인의 사랑은 자기 스스로를 죽이고 남편만을 위하는 유교적인 윤리를 근본으로 하여 더욱 영롱하게 빛을 발하고 있다. 이러한 유교윤리적인 기다림의 미학은 이후 고려조의 속요인 가시리. 이상곡, 동동 등으로 접맥되었고, 현대에 이르러 김소월의 진달래꽃으로 승화 계승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정읍사야말로 한국여성의 기다림의 미학의 정화(精華)요, 한국여인의 아름다운 정절(貞節)의 원형이 되었다고 할 수가 있지 않을까 한다. 국문학자전주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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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11.14 23:02

[5. 정읍사 (중)] 달 보며 남편의 무사기원

루마니아 민속학자 미르체아 엘리아데(Mircea Eliade, 1907-1986)는 달은 일정한 주기에 의해 탄생과 성장, 소멸의 과정을 반복하는 재생의 상징으로 보았다. 초승에서 보름, 그믐달로 이어지는 운행에 따라서 달의 인력으로 인해 조수 간만(干滿)의 차이가 생기게 되는데, 이는 여성의 생리주기 28일 혹은 29일과도 일치한다. 신은 여성에게 생명을 잉태케 하는 놀라운 능력을 준 셈이다. 실제로 우리나라는 서해 바다가 동해나 남해보다 달의 인력에 의해 밀물과 썰물의 차가 심하기 때문에 각종 어패류들도 달의 생성과 소멸의 과정을 거친 그믐달 이후에야 충실한 것이 많은 것과도 일치한다. 홍용희도 '창조신화의 세계'에서 논밭과 같은 대지는 씨(種子)를 뿌리면 이를 받아들여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게 하는 풍요다산과 상관되는 자연현상으로 일치된다고도 하였다. 인간도 이와 같은 자연현상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정월 대보름 밤 동산에 떠오르는 달을 보고 아들, 딸 낳기를 기원했고, 달의 모양을 보며 한 해 농사의 풍흉년을 예언한다고도 하였다. 이런 현상학적 견지에서 보면 정읍사의 여인이 행상나간 남편의 밤길의 위해(危害)를 흙탕물에 비유하여 달에게 무사안녕을 기원한 것은 민속신앙 그 이상 차원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밤길에 어떤 범해를 당할까 염려하는 정읍사 여인의 기우(杞憂)도 정읍사에선 용납되질 않는다. 정읍사의 기구(起句) '달하'는 일체의 부정(不淨)이 끼어들 여지를 허락하지 않는 선언이요, 외경(畏敬)적 기원이기 때문이다. 호격조사 '하'는 '아'의 중세어로서 신격(神格)에만 사용되는 '극존칭호격조사'다. 자연만물의 생성과 소멸이 달과 물과 여인이란 3자의 요소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처럼 정읍사 여인이 남편의 무사귀환을 비는 이와 같은 종교적 기원의례는 지금까지도 이어져 왔고, 실제로 우리가 사는 현실세계에서도 왕왕히 그런 민속신앙의 모습들을 찾아 볼 수도 있다. 이렇듯 달은 물과 여자와 더불어 생생력환대(生生力環帶)를 이루어 그 속에서 달이 풍양(豊穰), 산아(産兒), 건강(健康) 등에 관련된 생생력 상징으로 인간에 의해 숭앙되었다는 사실은 김열규에 의해서도 지적된 바 있다. 그러기 때문에 정화수(井華水)를 떠놓고 손자나 아들의 과거급제를 기원하거나 무사함을 달님에게 비는 우리네 할머니나 어머니들의 기원의례가 지금까지도 전해져왔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아름다운 성정이 남편의 무사안녕을 비는 행상인의 아내의 마음속에 그대로 투영되어 나타나고 있다고도 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목욕재계(沐浴齋戒)한 정읍사의 여인이 하늘에 덩실 떠있는 달을 보며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애타게 기다리는 경건한 아내의 모습에서 차원이 낮은 일상인들의 의부증이나 부정이 일체 끼어들 여지가 전혀 없다. 그러므로 '즌대'를 터무니없는 육정(肉情)적인 해석이나 퇴폐적인 의미로 풀이함으로써 백제여인의 아름다운 정절을 폄훼(貶毁)하는 우(愚)를 범해서도 안 된다. '고려사' 악지의 기록대로 혹여 행상나간 남편이 밤길에 어떤 범해를 입지나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여심이 '즌대'를 디딜까 두려운 것으로 비유된 것으로 보아야 옳다. 아무런 전거나 근거도 없이 자기 나름의 주관적인 인상(印象)이나 속단에 의지하여 정읍사를 터무니없이 음사라고 규정을 하고 여인의 성(性)과 관련시켜 엉뚱한 해석을 해서도 아니 된다. 조선이 개국한 이후 궁중악의 취택(取擇)과정에서 고려조의 속요들이 대부분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나 음사(淫詞)로 낙인 찍혀져 사리부재(詞俚不載)되었다. 그런 가운데 남녀간의 노골적인 사랑을 노래한 '쌍화점(雙花店)'이나 '동동(動動)', '만전춘별사(滿殿春別詞)', 이상곡'(履霜曲)' 같은 육정적인 고려조 속요들을 조선 성종조의 '악학궤범'이나 '시용향악보', '악장가사'에 왜 실어놓았는지 그 까닭을 알 길이 없다. 그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면면히 이어온 궁중악을 하루아침에 바꾸기가 어려웠을 것이요, 또 바꾸었다 하더라도 지금까지 익숙했던 노래보다 그만한 흥취나 즐거움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조선 중종조에 이르러서야 뒤늦게 정읍사가 음사라는 상소가 왜 이어졌는지 모른다. 굳이 그러한 까닭을 찾는다면 신라를 계승한 고려의 집권층이 조선조에도 그대로 기득권층으로 이어진 결과가 아닐까 한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정읍사가 왜 음사로 논의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사실 정읍사는 백제가요이지만 이 노래에 담긴 정서가 그처럼 아름다울 수 없다. 그리고 내면에 면면히 흐르는 여필종부의 미덕이 조선의 건국이념인 유교철학에 이만큼 부합되는 노래가 없었기 때문에 유일하게 조선조의 악장에 그 노래가사가 실려 오늘날까지 전해진 게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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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11.07 23:02

[4. 정읍사 (상)] 묵묵히 참고 따르는 '기다림의 미학' 절정

달님이어높이 좀 돋으시어어기야 멀리 좀 비취오시라어기야 어강도리 아으 다롱디리전주 시장에서 오고 계신지요 어기야 진데를 디딜까 두려워라어기야 어강도리어디든 짐을 벗어놓고 쉬시어라어기야 내님 가는 길 저물까 두려워라 어기야 어강도리 아으 다롱디리'어기야', '어기야 어강도리', '아으 다롱디리'는 모두 음악적 효과나 율동미를 높이기 위해 삽입된 여음(餘音)이다. 다른 백제가요와 마찬가지로 인고(忍苦)와 인종(忍從)을 바탕으로 한 기다림의 미학이 절정을 이룬 노래이다. 이러한 정서는 고려조 속요나 조선조 시가에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면서 우리 민족 고유의 정서를 이루었고 우리 문학의 주요한 맥을 형성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병욱, 조동일 등은 시조 장르의 원형이나 시원을 정읍사나 향가에서 3행 형식의 외형적 율조를 찾아내어 그 기원(起源)을 삼기도 했다. 고려사 악지조의 기록을 보면 전주의 속현인 정읍(井邑)에 살고 있는 한 행상인의 아내가 밤늦도록 돌아오지 않는 남편이 행여 도적들에게 범해를 입을까 두려워하여 '진데를 디딜까 두려워라'라는 상징적 은유법(symbolic metaphor)을 써서 노래하였다. 우리네는 무섭거나 억울한 일을 당할 때에는 으레 이러한 수사를 항용 관례적으로 써왔다. 예컨대 집안에 도둑이 들었을 때도 도둑이라고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고, '들보 위의 군자'라는 뜻으로 '양상군자(梁上君子)'라 일러왔다. 아니면 '밤손님'이라는 미화법을 쓰거나 "불이야!" 하는 식으로 주의를 환기시키기도 했다. 그리고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부당한 처지에 빠졌을 때도 '흙탕물 튀겼다'라는 은유적 수사(修辭)를 항용 써왔다. 내레이터인 정읍사의 여인도 이와 같은 지혜를 발휘하여 다정하고도 유정(幽情)한 남편의 위해(危害)를 걱정한 나머지, '진데'를 디딜까 두렵다는 조심스럽고도 섬세한 아름다운 발성을 토해냈다. '즌대'는 두말할 필요조차 없이 '진 곳'을 의미하는 '진흙탕길'이다. 이것이 여성의 성(性)과 관련되었다거나 '화류항(花柳巷)'이나 '색주항(色酒巷)'이라는 해석이 가능한 전거(典據)를 그 어디서도 찾아 볼 수 없다. 아무런 근거도 없이 조선 중종 때 남곤(南袞)이 정읍사는 음사(淫詞)이므로 궁중의례에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상소한 것을 그대로 따르거나, 양주동이나 지헌영, 박병채, 등이 주장한 주관적 해석을 맹목적으로 좇아서도 안 된다. 우리는 그러한 연유를 '고려사'의 악지의 기록에서 분명히 찾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정읍사의 내레이터인 행상인의 아내는 남편이 밤길에 도적들에게 해를 입을까 두려운 나머지 '흙탕물의 더러움에 의탁했다'(恐其夫 夜行犯害 托泥水之汚)는 기록이 선명하게 남아있다는 말이다. '이수지오(泥水之汚)'는 '흙탕물의 더러움'이요, 정읍사 노래 속의 '즌대'는 즉 현대어 '진 곳'인 '진데'와 일치된다. 밤늦도록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는 여인의 마음이란 우선 남편의 신변에 무슨 위험이나 있지 않을까 하는 일차적인 걱정으로부터 출발하기 마련이다. 그 다음 단계에 가서야 술집이나 다른 여인의 유혹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하는 게 아닐까라는 이차적 단계에 이르게 되는 것이 보편적인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읍사가 음사(淫詞)라고 보는 단초인 '즌대'란 이런 양면적인 인간본성의 이중구조로 파악하는 게 온당하다. 단순한 음행(淫行)으로 국한하거나, 선뜻 주색에 탐닉(耽溺)된 것으로 풀이하는 것도 옳지 못하다. 다시 말하면 임을 기다리는 심정이란 먼저 임의 신변상의 위해가 으뜸일 것이요, 다음으로 애태움과 초조 속에서 다른 여인에게 빠져버린 게 아닌가하는 의구심으로 전이되어 불안한 심리상태에 놓이게 되는 게 일반적인 현상이라는 것이다. 정읍사의 여인이 위험한 밤길을 걸으며 귀가하는 남편의 안전을 달에게 비는 모습은 엘리아데가 말한 달과 물, 여인의 3자에 의한 생생력환대(生生力環帶)를 이루어지게 되는 신이한 써클의 도식과도 일치된다. 달은 원시시대부터 신비스런 신앙의 대상이었다. 위험한 밤길에 귀환하는 임의 안전을 정읍사의 여인이 달에게 비는 모습은 달과 물, 여인이란 엘리아데의 생생력환대를 바탕으로 한 민속신앙의 기원(祈願)행위로 표출되어 나타난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국문학자전주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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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10.31 23:02

[3. 망부의 백제오가(百濟五歌) (하)] 정읍사 여필종부 이념 춘향전에서 절정 이뤄

'정읍'은 전주의 속현(屬縣)인 정읍 사람이 행상을 나가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자, 그 아내가 달 밝은 밤에 산마루에 올라가 남편을 기다리면서 혹시나 밤길에 도적이나 당하지 않을까 염려한 끝에 진흙탕물에 의탁하여 무사귀환을 노래했다고 하였다. 그리고 세상에 전하기는 행상인의 아내가 고갯마루에 올라 남편을 기다리다가 망부석(望夫石)이 되었다고 '고려사' 악지조에 기록되어 전해온다. 조선 성종조에 성현 등이 왕명에 의해 '악학궤범', '악장가사', '시용향악보' 등의 악가집을 편찬하면서 정읍사가 백제의 노래이지만, '악학궤범'에 실은 까닭은 이 노래만큼 조선의 건국이념에 부합된 노래가 없었기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 패망한 나라엔 역사나 문화, 예술 등 그 어느 것도 향유할 수 있는 권리나 자유가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은 우리나라의 역사가 잘 말해주고 있다. 백제문화는 중국이 찬탄할 만큼 삼국 가운데 가장 찬란하였고, 그 문화가 일본에 전해졌다는 사실은 문화사가들에 의해 밝혀진 지 이미 오래다. 부위부강(夫爲婦綱), 부부유별(夫婦有別)의 윤리를 바탕으로 하면서 여필종부(女必從夫)의 유교이념이 이토록 아름답게 승화된 노래가 정읍사에 견줄만한 게 없다. '고려사'의 기록이 그대로 믿기지 않을지라도 전주나 정읍이라는 구체적 지명으로보거나, 정읍사 전반에 흐르는 백제여인의 고운 정절을 보더라도 이 노래가 백제의 노래임을 부정할 길이 없다. 달을 매개로 하여 외간 남정네와 질탕(跌宕)하게 놀아난 처용아내의 부정(不貞)을 테마로 한 신라 '처용가'와는 너무나 대조적이기 때문이다. '삼국유사'를 찬(撰)한 일연(一然)은 불도를 닦는 승려답게 처용가의 배경설화에서 병을 일으키는 역신(疫神)이 처용의 아내가 너무 아름다운 나머지 사람으로 둔갑하여 범한 것이라고 짐짓 처용의 아내를 불륜으로 내몰지 않고 윤리적 해석을 해놓았다.그러나 이렇게 아름다운 정읍여인의 망부가인 '정읍사'도 정치적인 와류(渦流)에 휩쓸리며 음사(淫詞)로 내몰리면서 국가의례에서 제외되는 위기를 맞기도 했다. '중종실록' 권 32에 남곤(南袞)은 정읍사를 남녀간 음사(淫詞)로 단정하고 이 노래 대신 고려 때부터 궁중의례에 사용되었던 '오관산(五冠山)'을 불러야 한다는 상소를 했는데, 이러한 시원적 기록에 따라 이 노래를 남녀간의 육정(肉情)적인 노래로 간주하려는 사람들이 많았다. 지금까지 양주동, 지헌영, 이상섭, 박병채 등 국문학자들은 별다른 아무런 근거도 없이 '즌데'를 여성의 은밀한 부분으로 해석하여 - 밤길에 도적에게 범해를 당할까 두려워하여 흙탕물의 더러움에 의탁했다는 고려사 악지의 기록을 무시하고 - 정읍사를 음탕한 노래로 규정하였다. 뿐만 아니라, '어느이다 노코시라'는 사랑하는 임이 밤길을 서둘러 오다가 도적에게 위해(危害)를 당할까 두려운 나머지 '아무 곳이나 짐을 벗어놓고 쉬고 오시라'라는 믿음을 바탕으로 한 남편에 대한 아내의 지순(至純)한 사랑을 간파하지 못하고, 짐짓 '다른 어떤 여성에게 정을 주고 있는가'로 간주하여 정읍사가 의부증(疑夫症)적인 치정성(痴情性)을 벗어나지 못한 보잘 것 없는 작품으로 비하해 버리기도 했다.백제오가 가운데 유일하게 '무등산'만이 여타 다른 노래와 그 주제나 정조(情調)를 달리하고 있다. 무등산 조엔 무등산은 광주의 진산(鎭山)이며, 광주는 전라도에 있는 큰 고을이라 했다. 무등산에 성을 쌓았는데 백성들은 그 덕에 편안하게 살 수 있으므로 이를 즐거워하여 노래하였다고 하였으니, 무등산가만이 일종의 태평가적 성격을 띤 노래였음을 짐작케 한다. 이 외에도 이 고장에는 이러한 여성의 아름다운 정조가 서려있는 설화나 소설, 또는 역사적인 사실들도 많다. 삼국사기 열전에 전해져오는 음탕한 개로왕과 열녀인 도미의 아내에 얽혀져 있는 슬픈 이야기나, 나당연합군에 의해 망국의 비운을 맞게 된 백제 의자왕 때 적군에게 몸을 더럽히느니보다 차라리 백마강 낙화암에 몸을 던져 여인의 정절을 지키고 산화(散華)한 3000 궁녀들의 애닯은 이야기 등이 그렇다. 도미설화는 지리산가, 정읍사, 선운산가, 방등산가와 더불어 여인들의 정절을 주제로 한 열녀소설 춘향전의 원형이 된 노래요, 설화라 할 수 있다. '고려사'에 한 조각 이야기나 노래로 남겨진 이들 백제오가와 '삼국사기'에 담겨진 도미설화는 고대소설 '춘향전'과 여성의 아름다운 정절이라는 주제로 맥을 같이 한 고전문학이다. 춘향은 전라도 여인들의 정절의 표상일 뿐만 아니라, 한국여성의 정절의 상징이 되어 세계여성문화사를 장식하고 있다. 백제 여인들의 치열한 정절의 관념은 도미설화나 지리산가와 더불어 백제오가를 거쳐 '춘향전'에서 그 절정을 이루어서 더욱 영롱하게 형상화된 셈이다. 국문학자전주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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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10.24 23:02

[2. 망부의 백제오가(百濟五歌)-(상)] 여인네 고운 정절 형상화 '정읍사'만 전해져 아쉬움

백제에는 예로부터 여인들의 곧고 고운 정절이 여러 작품 속에 아름답게 형상화돼 우리들 가슴을 적셔온 노래들이 많았다. 불행히도 그 가사가 전해오지 않았지만, '고려사' 악지 권 24 백제조엔 '선운산', '무등산', '방등산', '정읍사', '지리산' 등 백제오가가 노래의 내용만을 담은 채 전해오고 있다. 다만 이 가운데 정읍사만이 연행형식(演行形式)과 더불어 그 가사가 아래와 같이 '악학궤범'에 전해져 백제노래에 담긴 배경이나 내용을 상고할 수 있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악사(樂師)가 악공(樂工) 16인을 거느리고 북받침대를 받들고 동편 기둥으로부터 들어와 새 날개를 펼치듯 대전(大殿) 안에 놓는데 - 먼저 북쪽에, 다음에 서쪽, 다음에 동쪽, 다음에 남쪽에 두고 - 나아가며 악사는 북을 안고 16번을 친다. 다시 동편 기둥에서 들어와 북을 놓고 남쪽으로 나가며 - 북마다 2번 치면 - 여러 기생들이 일제히 정읍사(井邑詞)를 노래한다. 전강(前腔) 달하 노피곰 도다샤/ 어긔야 머리곰 비취오시라/ 어긔야 어강됴리/ 소엽(小葉) 아으 다롱디리/ 후강(後腔) 全저재 녀러신고요/ 어긔야 즌대를 드대욜세라/ 어긔야 어강됴리/ 과편(過篇) 어느이다 노코시라/ 금선조(金善調) 어긔야 내가논대 졈그랄세라/ 어긔야 어강됴리/ 소엽(小葉) 아으다롱디리 '무등산'을 제외한 백제오가 대부분이 사랑하는 임을 그리워하고 기다리는 연가풍(戀歌風)으로 이 고장 여인들의 아름다운 정절을 노래하는 공통소(共通素)를 지니고 있다. 이들 노래 속에는 여인들의 한(恨)이나 원(怨)이 조금도 서려있질 아니하고 오로지 임만을 걱정하고 고대하는 기다림의 미학이 주조를 이루고 있어 여느 속요나 향가와도 다른 특성이 있다. 백제가요 가운데 유일하게 가사가 전해져오는 '정읍사'를 보면 장을 보러나간 남편의 무사귀환을 떠오르는 달을 보며 기원하면서 기다리는 아내의 아름다운 정조(情調)가 작품 전반에 흘러넘쳐 유려하기가 이를 데 없다. '지리산'은 구례현에 살고 있는 한 여인의 자색(姿色)이 아름다웠는데 비록 가난하게 살더라도 부도(婦道)를 다한 여인으로서 이름이 높았다. 백제의 왕이 이 소문을 듣고 첩으로 삼으려 하자 죽기를 각오하고 절대 왕명을 따르지 않겠노라고 맹세한 노래다. 이 노래 역시 다른 백제오가와 더불어 여인의 정절을 주제로 한 것으로 백제 개로왕 때의 도미설화와도 그 맥을 같이 한다. 이는 아마도 하나의 설화원형이 오랜 세월을 거치며 구구전승(口口傳承)하는 동안 변이(Variation)되는 과정에서 파생된 결과로 보여진다. 도미설화는 음탕한 왕이 아름다운 유부녀를 탈취하려다 결국 실패하고 만 우의(寓意)적인 이야기다. 그러나 설화치고는 상당히 드라마틱한 구성으로 흥미를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왕의 복장을 한 신하가 도미의 아내인 줄 알고 동침에 성공했지만, 일이 끝난 이후 알고 보니 도미의 처로 가장한 몸종이었다는데서 해학(諧謔)과 풍유(諷諭)성이 넘쳐난다. 뒤늦게 이러한 사실을 안 왕이 분노를 참지 못하고 도미의 두 눈을 뽑고 배에 태워 바다에 띄웠다. 그러나 남편은 바다를 표류하다가 기적적으로 아내를 만나 재회를 하는 극적 구성이 돋보이는 흥미로운 설화다. 사건의 구성이나 진전이 극히 자연스럽게 짜여져 있어 하나의 단편이나 희곡으로도 손색이 없는 이야기구조를 보이고 있다. 그래서 박종화(朴鍾和)는 이 설화를 소재로 삼아 단편 '아랑의 정조'를 창작하기도 했다. '방등산' 은 나주의 속현인 장성 성내에 있는데, 신라 말에 도적이 크게 일어나 방등산을 근거지로 양가집 부녀자를 잡아갔다고 기록돼 전한다. 장성현의 한 여인이 오랜 시간이 흘러도 남편이 자신을 구원해주지 않자, 이를 슬퍼하고 원망하면서 노래한 것이 방등산가라 했다. 이로 보면 방등산가 역시 오로지 사랑하는 남편을 기다리는 나머지, 도적의 소굴 속에서 자신을 구하지 못하는 남편을 원망하는 망부가라 할 수가 있다. '선운산'도 전북 고창 선운산을 배경으로 한 망부의 노래다. 장사현(長沙縣, 지금의 전북 무장면)에 사는 한 남자가 전쟁에 나가서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자, 그의 아내가 날마다 선운산 마루에 올라가 사랑하는 남편이 하루빨리 돌아오기를 고대하며 이 노래를 불렀다고 전해진다. 이 역시 오로지 남편만을 사랑하고 기다리는 망부가였음을 '고려사' 악지의 짧은 기록 속에서 엿볼 수가 있다. 하지만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나 황조가(黃鳥歌), 구지가(龜旨歌)처럼 한시로라도 번역돼 문헌에 실려져 전해왔다면 정읍사와 더불어 백제오가에서도 이 고장 백제여인네들의 아름다운 정조(情調)를 엿볼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안타까움을 금할 길 없다.국문학자전주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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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10.17 23:02

[1. 연재를 시작하며] 가사, 판소리에 현대시조까지 '전국 호령'

전북을 예향이라고 한다. 판소리의 꽃을 피우고, 서화가 발달했으며, 출판문화를 융성시킨 곳이 전북이다. 특히 문학적으로 전북은 전국을 호령했다. 문화 르네상스를 열었던 백제 고가에서부터 조선시대 가사문학, 현대문학에 이르기까지 전북과 전북 문인들이 그 중심에 있었기 때문이다. 전북일보는 전북을 배경으로, 혹은 전북 문인들에 의해 한국문학이 어떻게 발달하고 오늘에 이르렀는지 조명하는 기획을 마련했다. 전북문학의 어제와 오늘을 통해 전북인들의 문화적 자존감을 되찾기 위한 취지다. 국문학자인 전일환 전주대 명예교수가 집필을 맡았다.전북은 지리적으로 옛 백제권역이었고, 전주는 후백제의 수도였을 뿐만 아니라,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전남북과 제주를 관할하는 전라감영이 있었던 곳이다. 전북은 동부산악의 임산물권과 광활한 서부호남평야의 농산물권, 서해안의 해산물권의 3요소가 어우러진 풍성하고도 완전한 삶터였다. 지명도 사람이 살아가는데 거의 완전한 조건을 갖춘 곳이라 하여 '온다라', '온드르'(온들의 옛음)라 불러오다가 신라 경덕왕 때 지명을 한자로 바꾸면서 완산(完山), 전주(全州)라 이름하였다. 그리하여 이 지역은 예로부터 삼국 가운데 가장 찬란한 백제문화를 창달해 왔고, 문학과 예술면에서도 우리나라 문화의 원천을 이루었다.'고려사' 악지 권 24 백제 조에는 '선운산', '무등산', '방등산', '정읍', '지리산' 등 백제오가(百濟五歌)가 노래의 내용만을 담은 채, 고즈넉이 자리하고 있다. 이 중에서 전북의 문학 작품으로 정읍의 정읍사, 고창의 선운산가, 남원의 지리산가가 있고, 기타 장성의 방등산가도 정읍권의 시가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정읍사와 더불어 선운산가나 지리산가, 방등산가 등은 망부가(望夫歌)류로 아름다운 여성의 정절을 주제로 형상화된 작품들이다. 이중 '정읍사'는 유일하게 연행(演行)형식과 더불어 그 가사가 '악학궤범'에 전해져 백제가요의 원형을 볼 수 있게 된 것은 큰 다행이 아닐 수 없다.이들 대부분이 사랑하는 임을 그리워하고 기다리는 정조(情調)를 바탕으로 여성의 정절을 주제로 삼고 있는데, 남원을 배경으로 한 판소리계소설인 '춘향전'을 낳은 철학적 배경이 되었다. 세조대엔 고려조 가전체 소설을 이어받은 김시습의 '만복사저포기' 같은 몽유록계 산문문학이 남원에서 배태되면서 남원 인월면과 아영면을 배경으로 한 '흥부전'과 만복사 동쪽에 살았다는 최척을 주인공으로 한 조위한의 한문소설 '최척전', 전북 완주 이서면이 배경이 된 '콩쥐팥쥐전' 같은 산문문학이 전해오고 있다. 고려 고종조 이규보는 32세 때 전주목에 부임한 후 전주의 속현들을 둘러보며 '남행월일기'라는 기행적 수필을 남겼고, 전북의 경물을 읊은 60 여수의 유려한 작품이 '동국이상국집'과 '백운소설'에 전한다. 조선 성종조 정극인은 정읍 칠보를 배경으로 한 가사의 효시작 '상춘곡', 단가 '불우헌가', 경기체가 '불우헌곡'을 창작하였다. '상춘곡'은 인간과 자연이 하나가 된 물아일체(物我一體)의 미학 속에 조선조 사대부들의 유교적 스토우어시즘(stoicism)의 풍류를 엿볼 수가 있고, 단가형의 '불우헌가'는 돈독한 군신간의 윤리와 철학이 담겨있다. 경기체가형의 '불우헌곡'은 전원생활의 흥취와 후진교육의 즐거움, 벼슬세계에서 자신의 진퇴와 성은(聖恩) 등을 읊었는데, 이 둘의 장단가가 한데 어우러진 작자의 철학과 풍류가 '상춘곡'에서 종합되어 드러난다. 이들 작품은 정극인을 흠모하고 사숙(私塾)했던 면앙정 송순에게 이어져 가사 '면앙정가'를 낳는 계기가 되었고, 다시 송강 정철의 '성산별곡'으로 이어짐으로써 호남가단을 이루어 조선가사문학의 원천이 되었다. 이후 장수출신 장현경은 정조 20년에 삼례역승으로 좌천되자, 정철의 사미인곡처럼 임금을 그리워하는 연군류의 가사 '사미인가'를 창작하였다. 그리고 완주 봉동의 규방가사 '홍규권장가'와 '상사별곡', 고창군 대산면의 '치산가'로 이어지면서 고종조 진안 마령의 이도복이 마이산 구곡의 절경을 노래한 '이산구곡가'에 이르렀다. 선조대에 부안에서 태어난 매창은 황진이와 더불어 조선에서 쌍벽을 이룰 만큼 시재(詩才)가 출중한 여류시인으로 많은 시조와 한시작품을 남겼고, 광해조에 임실군 지사면에서 태어난 장복겸은 영천을 배경으로 한 연시조 10수의 '고산별곡'을 창작하였다. 신말주의 11대손 신경준은 영조년간 '산수경', '훈민정음운해' 등 많은 저술을 하였고, 정격의 한시작법에서 벗어난 '시칙(詩則)'의 시론에 입각하여 65수의 작품을 남겼다. 영조대 동년월일에 남원에서 태어나 18세에 결혼한 담락당 하립과 김삼의당이 10년의 이별과 해후 속에 남긴 '김삼의당시문집' 200여수의 한시는 춘향전과 더불어 전북여성의 아름다운 정절의 정화(精華)가 아닐 수 없다. 또한 전북 고창의 신재효는 판소리 12마당을 6마당으로 개작하여 판소리의 새로운 장을 열었고, 가람 이병기는 현대시조는 전통적인 틀에 구속되지 않아야 한다는 시조혁신론을 제기하여 현대시조시로서의 위상을 정립하였다.이와 같은 문학적 현실을 바탕으로 전북문학의 문학적 공과(公課)를 조명해 봄으로써 전북문학이 한국문학의 원천이요, 남상(濫觴)이었음을 밝히려 한다. 미래사회는 물질보다 인간 중심의 정신문화가 주도해나갈 것이라는 이 시대에 갈수록 소외되고 저열감이 짙어져가는 우리 전북인들에게 자신감을 불러일으키고 문화적 자존감을 되찾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일말의 바람으로 이 담론을 시작코자 한다. 국문학자전주대 명예교수※ 전일환 교수는 전주대 부총장과 전국대학 부총장회 부회장을 지냈다. 국어문학회장한국언어문학회, 베이징 어언문화대학 한국어과 초빙교수 및 베이징 한글학교장을 역임했다. 저서로 '조선가사문학론' '고전시가선독' '우리 옛가사문학의 이해' '옛시 옛노래의 이해' '옛수필산책' '난세의 정치철학 맹자'과, 수필집'그말 한마디' '예전엔 정말 왜 몰랐을까' 등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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