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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문학관 지상강좌 - 한국문학의 메카, 전북] (35)소설 같은 삶을 소설로 쓴 작가, 이정환

소설가 이정환을 따라다니는 말이 몇 가지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말은 사형수 소설가, 한국의 밀턴, 소설이 된 소설가 등이다. 이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이정환은 남다른 삶을 살다가 간 사람이다. 1930년 10월 18일 전주에서 태어났고, 1946년 전주남중학교를 거처 1947년 전주농업학교(현 전주생명과학고등학교)에 전학하였다. 재학 중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학도병에 자원 입대하였다. 북한군과의 포항전투에서 포로로 붙잡혔으나, 탈출에 성공한다. 그 후 다시 육군에 입대하였지만, 임시휴가 중 모친의 숙환으로 귀대날짜를 어김으로써 탈영병이 되고 만다. 이로 군사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았고,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7년의 옥살이 끝에 1958년 출감했다. 그의 방황을 눈치챈 집안에서는 그를 서둘러 결혼시킨 후 가업인 서점을 이어가도록 했다. 그 뒤부터 그의 삶은 책방 속에서 소설의 잉걸불로 피어난다. 1969년 『월간문학』에 소설 「영가」가 입선되었고, 이듬해 같은 잡지에 「안인진 탈출」로 등단하면서 소설을 활발하게 썼다. 1980년에 당뇨병의 망막증으로 실명되었지만, 그의 소설 쓰기는 계속되다가 1984년 55세의 나이로 작고하였다. 이처럼 순탄하게 살아오지 못한 아버지의 삶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그의 딸 이진 시인은 아버지의 문학과 삶을 조명하기 위해서 만든 이정환 블로그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인간이니까 누구나 끝은 같겠지만, 유독 많은 풍상을 겪어서, 자신이 살아온 삶이 한 편의 대하소설이 되어버린 아버지의 작품들이 독자와 연구자들에게 널리 익혀서 소설세계에 제대로 조명되기를 바랍니다. 이정환 소설가는 말년에는 당뇨병 망막증으로 시력을 잃어버렸다. 원고지 칸이 보이지 않게 되자 자를 대고 어림잡아 글을 써서 작품을 발표하기도 했고, 그것마저 어려울 때는 자신이 구술한 내용을 받아 적게 하여 작품을 완성하였다. 이렇듯 이정환은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극적인 사건을 체험하여 평범하지 않은 개인사를 살아온 작가다.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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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10.14 16:54

[전북문학관 지상강좌 - 한국문학의 메카, 전북] (34) 한과 절망을 ‘속울음’으로 풀어낸 시인, 정열(鄭烈)

정열(鄭烈) 시인은 1932년 정읍시 정우면 회룡리 교촌 마을에서 태어났고 1994년 작고했다. 시인은 태어나고 자란 고향에서 농사를 짓고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시를 쓴 향토 시인이다. 시인이 청년이었을 때까지는 석유 호롱불을 밝혀놓고 밤이 깊도록 명상에 잠겨 작품을 써 온 것으로 전해진다. 시인은 자신에 대한 외부의 평가와 관계없이 오로지 외길, 묵묵히 시의 길을 걸어간 분이기도 하다. 시인은 동진강변의 너른 들판에서 5대째 살아왔고 삼대독자 가문에서 6.25 전쟁 때 오직 한 분밖에 없었던 형님을 빼앗긴 분노와 슬픔 때문에 문학의 세계에서 더욱 더 빠져들게 되었다. 시인은 내 시는 어머니의 가슴 속에서 영영 풀리지 못한 채 응어리진 핏덩이거나, 한밤중에 반딧불이 같은 호롱불 앞에서 반쯤 석불(石佛)이 되어 어깨를 들썩이며 울먹이던 어머니의 속울음이라고 했다. 시인은 이처럼 평생 전쟁으로 인한 마음의 상처 때문에 삶 자체가 커다란 고통이고 번민의 연속이었다. 또한, 시인이 살았던 곳은 반봉건, 반외세의 기치를 높이든 갑오농민운동의 한복판이었으니 때로는 핏발 선 눈으로 세상의 부조리를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할 말을 다한 시인으로 봐야 할 것이다. 시인의 문학은 이렇듯 그의 태생적 삶과 밀접했다. 시인이 본격적으로 문학활동을 한 것은 1948년 전주상고에서 문예부장을 맡으면서부터다. 1962년 국학대학 국문과를 졸업하였고, 1955년 『문학예술』에 「산」이, 이듬해 「묵도(默禱)」로 추천을 받았고, 1959년 『사상계』에 「얼굴」, 「무화과」 ,「꽃」이 당선되면서 등단하였다. 시집으로는 『원뢰(遠雷)』(1961), 『바람들의 세상』(1976), 『어느 흉년에 』(공저, 1982)가 있고, 시선집으로는 『할 말은 끝내 이 땅에 묻어두고』(1985)가 있다. 시인의 원래 이름은 정하열(鄭夏烈)이었고 정열(鄭烈)은 그의 필명이다. 필자가 파악한 바로는 시를 쓰기 시작하면서 이 필명을 쓴 것으로 보인다. 1956년에 발행한 <문학예술>에도 이 필명으로 작품이 발표되었다. 이에 대하여 전북 문단사를 정리한 최명표 문학박사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 바 있다. 그는 본명 정하열(鄭夏烈)에서 여름(夏)을 지워버리고 정열(鄭烈)로 필명을 삼았다. 아마 여름이 정열(情熱)의 계절이고, 녀름이 그 여름의 결실이라고 생각하며 중첩된 의미를 삭제해버렸는지도 모른다. 혹은 게으름을 부추기거나 겨르로운 호흡을 요구하는 여름의 의미망에 부담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정열(鄭烈) 시인은 운월(雲月)이라는 호를 가지고 있음에도 이를 거의 사용하지 않은 점으로도 유추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그의 필명은 줄임이 아니라 없앰이다. 그는 여름[夏]을 지워서 시인의 정열을 먹고 싶었던 것이다. (최명표, 『전북작가열전』(신아출판사.2018)) 시인은 1953년 『자유신문』에 그의 작품이 당선되면서 시작(詩作) 활동을 활발하게 하였다. 1955년부터 『문학예술』이라는 잡지에 박남수, 조지훈 등의 추천을 받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3회 추천을 받아야 등단하게 되어 있어서 시인은 3회 추천 작품과 당선 소감문까지 출판사로 보냈지만, 공교롭게도 『문학예술』이 폐간되는 바람에 등단하지 못했다. 매우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시인은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시를 쓰기 시작하여 1959년 11월호 『사상계』에 시 당선으로 화려하게 등단하였다. 당시 『문학예술』에 조지훈 시인의 추천을 받은 「묵도(默禱)」라는 시를 소개해 본다. 여기는 담(潭) 우에 뜬 연잎보다 좁은 섬이 아닙니까 천년을 두고 달려도 달려도 해안선이 보이지 않은 뻘밭이 아닙니까. 성좌(星座)로도 이름을 다 헤아릴 수 없는 목숨들이 얼마나 미움을 향하여 꽃을 흔들다가 쓰러져 간 수자리입니까 여기는 병(甁)속이 아닙니까 시시로 바람같이 이는 당신의 한숨과 나의 오열(嗚咽)을 푸른 침묵으로 휩싸는 병(甁)속이 아닙니까 -<중략>- 한해......두해......서른해 이루 다해도 모자라는 평생을 두고 가시가 돋는 인종(忍從)의 징역살이를 말 없는 기도의 푸른 향연(香煙)이 피어오를 것입니다. 달밤 해바라기와 같이 안으로 웃어 눌르는 기도(祈禱)가 - 정열「묵도」(1956) 전문- 이 시에는 우리의 불행한 역사가 드러나 있다. 서로 미워하다가 쓰러져간 곳에서 참회하고 거듭나야 함을 기도하는 시인의 마음이 묵직하게 드러나고 있다. 이처럼 시인은 이 땅에 얼룩진 오욕(汚辱)의 역사를 잊지 않으면서 새로운 꿈을 이야기하였다. 정열(鄭烈) 시인의 작품 경향을 논할 때 가장 많이 언급되는 말이 속울음의 시인이라는 말이었다. 어떤 사람은 시인이 한평생 고향을 지키면서 시작 활동을 했다 하여 농민 시인 또는 전원시인이라고 하기도 하고 내면의 한을 표출한 민중 시인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시인은 외부의 어떤 평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만의 시의 세계를 구축해 온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나 이런 평가는 모두 맞기도 하고 틀릴 수도 있다. 시인의 제자 주봉구 시인은 정양 시인이 말한 속울음의 시인이 가장 근접한 평가라고 밝힌 바 있다. 왜냐하면, 그의 시집 전편에 관통하는 시어가 바로 속울음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쪽 눈깔을 잃고 수자리에서 돌아온 한 사나이가 거울 앞에 앉아 수염을 깎는다. 이미 치열이 식은 지구보다 더 많은 균열을 품은 얼굴 그 중심에서 산맥이 무너지는 소리가 일른다. 바닷물이 지글지글 끓어오른다. 선혈이 흐른다. 살구꽃이 핀 마을들이 탄다. 봄꽃 속에서 사나이의 눈깔이 뛰어오른다. 언제부터인가 거울 뒤에서 한 소년이 울고 있다. 사나이는 지긋이 입술을 깨물고 남은 한쪽 눈을 마주 감는다. 뒤집힌 바다 하늘을 물어 흔들다가 천길 가라앉은 수심같이 한없이 맑은 거울 속에 지금 전쟁이 살다가 폐허가 누워 있다. -「얼굴」 전문- 이 시는 전쟁터(수자리)에서 한쪽 눈을 잃고 돌아온 사나이가 거울 앞에 앉아서 수염을 깎고 있는데, 얼굴에는 흉터가 가득하다. 전쟁의 광풍으로 산맥이 무너지고, 바닷물이 끓어오르고 선혈이 낭자하고 마을이 타고, 불꽃 속에서 눈알이 튀어나왔다. 전쟁의 처참한 모습을 이처럼 생생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그런데 거울 뒤에 울고 있는 소년은 누구인가. 바로 6.25 전쟁으로 하나뿐인 형을 잃어버린 정열(鄭烈) 시인의 모습이 아닐까. 시인의 시에 대한 찬사는 끊임이 없었다. 박남수 시인은 개인의 내면적 표현을 위한 서정의 언어, 인식과 감각의 결합을 극대화한 실험이라고 평가하였고, 신적정 시인은 다가올 내일이 우리의 해어진 옷자락을 헛되이 스쳐 갈 바람결이 아닐진대, 십 년을 닦달한 멍든 역사의 한 자락을 넘기는데 서슴없다라고 했으며, 정양 시인은 가난, 전쟁, 분노, 병마 등, 사회악의 부정에서 오는 좌절감을 노래했다고 했다. 정열(鄭烈) 시인은 석정문학회에 가담하여 전북 문단의 시인들과 활발하게 교류하였으며 김제문학회에서 활동하였다. 그의 시 「바람소리」가 새겨진 시비가 김제 시민공원에 있다. 정열(鄭烈) 시인! 그는 선대가 물려준 고향에서 우리 문학을 풍성하게 일궈냈다. 그의 고향, 정읍에서 외롭게 문학의 길을 지키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의 고향을 노래한 시 「비」를 소개한다. 서래봉도 내장산도 이 땅의 산하는 모두 비에 젖는다. 백제의 마지막 여인 속울음이 굳어간 망부석도, 녹두장군의 피진 고함소리도, 부처님께 염불하시는 노스님도, 우산을 받은 가난한 시민도,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는 거지도 모두 모두 다 비를 맞는다. 안방에도 비가 내리고 뜨락에도 비가 내리고 벌판에도 비기 내리고 강에도 비가 내리고 비는 검푸른 바다로 일어서서 젖은 땅을 또다시 두루 덮는다. 세상이 몇 번이나 석 바뀌어야 이 산하에 비가 그칠까... 이땅에는 그냥 비가 내린다. 시인은 그는 지금도 묘지에서 비바람에 맞서며 자신의 살붙이와도 같은 고향을 지키고 있을 것이다. /송일섭 전북문학관 학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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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10.07 16:08

[전북문학관 지상강좌 - 한국문학의 메카, 전북] (33) 역사의식에 바탕을 둔 들(野)의 시인, 이병훈

이병훈 시인. 시인 이병훈은 1925년 4월 15일 군산시 옥산면 당북리에서 태어났다. 옥산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옥구 상촌에 있는 염의서원에서 한학을 공부하였다. 일제 강점기와 6.25의 참상을 겪으며 근현대사를 맨몸으로 지켜왔다. 1950년부터 군산민보사 기자로 활동하다가 6.25 전쟁 때는 종군기자로 참여하기도 했다. 그 후 삼남일보 사회부장을 거쳐 금강일보 논설위원을 역임하면서 문학계 인사들과 폭넓게 교우하면서 문학에 정진하였다. 시인은 군산문학회 뿐만 아니라, 대전 호서문학회와 솜리문학회 동인으로도 활동하면서 시화전 및 앤솔로지 발간 등을 꾸준히 하였으며, 1959년 4월 신석정 시인의 추천으로 [자유문학]을 통해 등단하였다. 1970년 첫 시집 『단층』을 발표하였고 뒤이어 『하포길』(1981), 『어느 흉년에』(1982), 『멀미』(1983), 장편서사시 『녹두장군』(1991), 『포격당한 새』(1994), 『참으로 좋은 날은 땅에 살다가』(1997), 『물이 새는 지구』(2001) 등 시집 17권, 연작시 「소리」(조선문학, 60편), 「나무새」(문학세계,60편), 「휴전선의 억새」(자유문학,60편) 등을 발표하였고, 수필집 『글썽거리는 서경』(1999)을 내는 등 왕성한 작품 활동을 했다. 오랫동안 시인과 함께 문학의 길을 걸어온 군산의 이복웅 시인은 시인의 초기 시는 고은, 정양, 정렬, 이복웅 등과 함께 민족문학작가회의 태동을 주도할 만큼 현실 참여적이고 저항적이었다고 하였다. 이런 연유로 이병훈 시인을 포함한 이들은 관계기관의 지속적인 감시를 받았다. 한때 군산을 방문한 고은 시인과 기념사진을 찍은 일이 있는데, 그 사진에는 불멸의 우정이라는 글씨를 새겨 넣을 만큼 그들은 나이를 떠나 막역한 문우로 늘 함께했다. 그러나 이후 이병훈의 시는 역사의식을 바탕으로 한국 농촌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드러냄으로써 들[野]의 문학을 새롭게 정립하였다.고 했다. 원형갑은 시인을 생각하면 군산의 토요동인회를 떠올리게 된다고 밝힌 바 있다. 서울에서 내려온 송기원을 좌장으로 하여 정연길, 김동빈, 고은, 신석정 등이 참여하였으며 여류시인 정윤봉 시인의 집에서 첫 모임을 했는데, 이병훈 시인은 남달리 엉성하게 비썩 말라 눈만 뻥그레한 모습이었다고 회고하였다. 그는 시인으로서 밖에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존재로 그를 기억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는 늘 조용하고 말이 없었으며 때로는 어색한 듯, 때로는 놀란 듯, 때로는 민망하고 시름겨운 듯 가붓이 웃음을 머금고 가끔은 뒷전에 앉아 소리도 없이 훌쩍 떠나는 사람이었다고 기억했다. 그 후 토요동인회 회원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송기원은 서울로 돌아갔고, 고은도 떠났다. 정윤봉도 군산을 떠났지만, 이병훈은 신문사 일을 하면서 군산에 자리잡고 동구 밖 느티나무처럼 고향을 지켰다. 이런 시인을 두고 원형갑은 고향과 시인은 뿌리와 잎새라고 할 만큼 떼려야 뗄 수 없는 밀접한 사이라고 했다. 시인은 고향을 사유하는 사람이며,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사람들에게 고향의 말씨를 불어넣어 주는 사람이고자 했다. 그의 말대로 그는 평생 고향 군산을 사유하였으며 군산의 말씨를 지키는 말지기였다. 다음 시는 그런 시인의 모습을 연상케 하는 시다. 쉰 넘은 나약한 시인 난 해와 내기하면서 해로하는 농사꾼의 이름으로 겨우겨우 얻은 얼마간의 낱말 소출을 저낸다. 낱단으로 묶여 들어온 아지랑이의 곡식이여 눈썹 아래 지적거리는 이슬의 열매며 꺼끄레기가 까실거리는 햇빛의 소출을 모두 훑어서 저낸다. 멍석 위에 쌓이는 낱말들이다. 목을 길게 뽑고 오직 작게 다진 것 최종 최초의 맺음으로 남은 것 다시 흙으로 돌아가기만을 자청하는 낱말들이다. 난 머리가 흰 낱말을 저낸다. 앞뒤 마당 큰방 아랫방 빈채로 열어놓고 하늘과 내기하는 농사꾼의 이름으로 -이병훈의 시 「멀미 16」 전문 시인은 세 번째 시집 『멀미』(한국문학사,1983)에서 자신의 시 쓰기에 대하여 시 행위 그것은 특수하지 않고 시인도 특수하지 않다. 평범한 일상의 행위에 속한다. 평범한 일상을 인간답게 노래하려는 행위이고 그 행위자에 불과하다.라고 밝히면서 시인에게는 시 쓰는 일 자체가 생존을 확인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1948년 당시 군산문학회 동인으로 박희선씨 등과 더불어 모임을 하고 작품 비평회를 등을 갖는 등 군산지역 문학동인의 근간을 마련하였으며, 이후 언론사 논설위원, 문인협회 군산지부장, 예총 군산지부장, 군산 문화원장 등을 역임했다. 또 1973년 제14회 전라북도 문화상(문학부문)수상 이후 군산시민의 장 문화상(1976), 제1회 모악 문학상(1993), 제1회 신석정 촛불문학상(2007) 등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향아 시인은 「이병훈의 시 세계」라는 글에서 시인이 죽음이나 사후를 바라보는 시선은 담담하다. 두렵다고 거부하지도 슬프다고 회피하지 않는다. 살아서 이루지 못했던 소망을 사후의 세계에서 성취하려고 다짐하지도 않으며 부활이나 환생의 꿈도 꾸지 않는다. 시인이 인정하는 혼백의 세계는 백지와 같은 공간이다. 그의 혼백이 부유하는 공간에는 극락도 천당도 없고 연옥도 지옥도 없으며, 혼백은 무엇을 저항하거나 도모하지 않는다. 그는 죽음이나 혼백을 내걸고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음으로써 모든 구속에서 자유롭다라고 하였다. 단 한 줄 시라도 전할까 하여 먼저 간 병권 형에게 띄운 편지가 되돌아왔다. 날짜와 시간이 지워져 있었다. 사연마다 고스란히 지워져 백지로 돌아왔다. 저승은 그저 비어있는 곳인가 보다. -이병훈 시「소인(消印)」 전문 시인의 시는 인생의 순리를 다루듯 자연스러운 언어 구사를 통해 과거와 현재의 모습을 담담한 어조로 그려내면서도 아프게 노래했다. 그의 작품 속에는 언제나 자연과 인간이 함께 살아 숨 쉬고 있다. 우직하게 고향을 지키며 문학의 향기를 피워낼 줄 알았던 시인 이병훈, 그의 육신은 이 땅을 떠났지만, 그가 우리 문단을 지키며 보여준 행보는 우리 문학사에 하나의 지표로 남게 되었다. 시인의 고향 후배인 고은 시인은 이병훈 시인을 늘 얼굴이 붉은 사람이라고 기억했다. 술 한 잔만 마셔도 얼굴이 붉었지만, 평소에도 얼굴이 불그스레했던 그를 보고 한 말이다. 고은 시인은 『만인보』(제7권)에서 이병훈 시인을 삭막한데 지키고 살며 모진 소리 하나 내본 적 없는 시인이라고 하였다. 다 떠나버렸는데 군산항 그 삭막한 데 지키고 사는 시인 이병훈 환갑 진갑 훨씬 넘어서도 조촐히 청춘이어서 어디로 떠날 줄 모르는 시인 이병훈 군산항 가엔 반드시 그가 있다. 모진 소리 하나 내본 입 아니어서 그 입은 싱겁다 그 눈도 싱겁다 그 코도 느릿느릿 낼까 싱겁다. 그러나 그 마음속 깊이 옥산 들 눈보라 들어차 있어 춥구나 옷깃 여미어라 -고은 시 「이병훈 」 전문 이병훈 시인은 신석정 시인이 특별히 아꼈던 제자이다. 시인은 언제나 석정 시인 가까이에서 그를 닮고자 했다. 신석정 시인의 추천으로 문단에 데뷔하였고, 초기의 석정 제자들과 함께 석정 문학을 전파하고 기리는 데 앞장섰으며, 석정문학회 초대회장을 역임하였다. 그는 스승인 신석정을 제재로 하여 여기저기에 발표한 70여 편을 시를 모아 신석정추도연작시집 『변산 골짝에 이는 바람』(부안문화원, 2000)을 내기도 했다. 이 시집은 신석정의 시 정신의 해명에서부터 1974년 작고할 때까지의 생애를 여러 관점에서 조명하는 산문이 아닌 시라는 양식을 통해서 이룩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특별하다. 시인이 석정을 만나 시인의 이름으로 살아갈 수 있음을 기꺼워하는 모습도 잘 드러나 있다. 이 시집에는 신석정의 어조, 냄새, 모습, 행동은 물론 스승이 안고 살았던 감성, 정서, 따뜻한 애정, 손길, 그 모든 것들이 어느만치는 시인의 여러 곳에 스며 시인을 오늘의 실상으로 살아 있게 한 것이라고 하였다. 시인은 2009년 2월 15일 숙환으로 작고하였으며, 시인의 영결식은 전북 문단 역사상 최초로 전북문인장으로 많은 문인의 애도 속에서 치러졌으며, 이때 장례위원장은 이동희 시인이, 집행위원장은 군산의 이복웅 시인아 맡았다. /송일섭 전북문학관 학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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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9.23 16:04

[전북문학관 지상강좌 - 한국문학의 메카, 전북] (32) 고향 사두봉에 얹힌 진을주 시인의 그리움

진을주 시인 진을주 시인은 1927년 10월 3일 전북 고창군 상하면 송곡리 69번지 송림산 아래 봉감마을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을주(乙澍)이고 호는 자회(紫回)다. 1954년 전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1963년 김현승 시인의 추천으로 「부활절도 지나버린 날」을 『현대문학』에 발표하였으며, 1966년 『문학춘추』에 「교향악」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문학의 길을 걸었다. 시인은 대학 졸업 후, 전라북도 도청 공보실에서 근무한 바 있으며, 상경하여 대한교련의 새한신문사 총무국장과 출판국장을 역임하면서, 문학 활동에 매우 열정적이었다. 시인의 문단 경력은 다양하면서도 화려하다. 한국문인협회 이사, 월간 『문예사조』의 기획실장, 한국자유시인협회 부회장, 국제펜클럽한국본부 이사, 도서출판 을원 편집 및 제작 담당 상임고문, 21민족문학회 부회장, 한국문인협회 감사, 월간 『문학21』 고문 등을 역임하였다. 1997년에는 『세기문학』을 창간하였고, 1998년에는 『지구문학』을 재창간하여 편집 및 상임고문을 맡으면서 많은 문학 지망생들에게 작품 발표의 기회를 제공하는 등, 우리나라 문학의 저변확대에 기여하였다. 시인은 그간의 공로로 한국자유시인상, 청녹두문학상, 한국문학상, 세계시가야금관왕관상, 예총예술문화공로상, 한국민족문학상 대상 등을 수상했다. 시인은 1966년 첫 시집 『가로수』를 비롯해서 『슬픈 눈짓』, 『사두봉 신화』, 『그대의 분홍빛 손톱은』, 『부활절도 지나버린 날』, 『그믐달』, 『호수공원』 등 일곱 권을 상재하였다. 그 중 『사두봉 신화』는 연작시집으로 그의 고향에 전해오는 이야기를 토대로 신화적 숨결을 그려냈다. 그리고 신작 1인집으로 『M1조준』 등 네 권을 발간하여 우리 문단의 화제가 되기도 하였으며, 유고시집으로는 『송림산 휘파람』이 있다. 시인의 문학에 대하여 계간 『해동문학』 발행인 정광수 시인은, 70년대 진을주의 시 세계는 모더니즘적 수법의 수련을 거친 인생에 대해 참신하고 투명한 인식을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았다. 박종은은 「자회(紫回) 진을주 시인의 생애와 문학」에서 그의 문학적 특징을 이렇게 정리한 바 있다. 시인의 시는 모더니즘 수법의 수련을 거쳐 인생과 자연에 대한 투명한 인식을 보여주면서 평생을 고고하게 선비정신으로 일관하였으며, 천성적인 인간미가 돋보이는 삶은 작품 속에서 일관된 시 정신으로 표출되고 있다. 시 정신과 더불어 인생, 자연, 허무 슬픔 등이 투명한 인식 속에 자리 잡혀 그 참신성이 돋보이며 삶의 의미와 리얼리티가 잘 드러난다. 또한, 변화와 갈등이라는 동일성을 교직(交織)해서 시어가 세련되고 감각정 서정성이 풍부하다. 또한, 명상적 정관적 자세가 돋보이며 절제된 언어미학이 잘 드러난다. 고 했다. 시인은 이렇듯 많은 작품을 쓰면서도 자신의 시적 역량을 키우는데 남달랐다. 그는 훤칠한 키에 신사풍의 용모로 언제나 유행에 어울리는 패션을 즐겨 입은 멋쟁이 시인이었으며, 다정다감하여 동료와 후배 문인들로부터 인기가 매우 높았다. 시인은 누구와도 잘 어울렸고 늘 자애로운 낯빛으로 함께 했다. 특히 『지구문학』을 통해서 많은 제자를 배출하였다. 노년에는 일산 호수공원의 새 소리와 아름다운 꽃에 심취하여 생활하다가 2011년 2월 14일 숙환으로 세상과 하직하였다. 최승범 교수는 그의 부음을 듣고 「벗은 가고」라는 시조를 통해서 그에 대한 그리움과 애틋한 마음을 표현한 바 있다. 허물 따로 없었지 윗목도 아랫목도 없었지 고스톱 멤버인 양 밤참도 챙기라 했지 눈 감자 허탈한 굽이굽이 허허로울 뿐이네 그의 후배인 이기반 교수도 「가시다니 그게 웬 말이오」란 글을 통하여 시인에 대한 그림움을 애틋하게 표현한 바 있다. 전라북도문학관 진을주 시인 전시관에는 두툼한 친필 노트 한 권이 놓여 있다. 이 노트 첫 장에는 정성을 들인 필체로 진을주 자필 시 모음이라고 쓰여 있다. 사두봉 얘기라는 큰 제목 아래에 사두의 아침이라는 소제목의 시 서른다섯 편이 쓰여 있다. 이는 시인의 시집 『사두봉신화』의 원고인데, 시편 하나하나가 흐트러짐 없이 단아한 필체로 쓰여 있다. 이 외에도 시인이 평소에 쓰고 다녔던 모자와 만년필 등 시인의 손때가 묻은 유품이 전시되어 있는데, 이를 보면 시인이 얼마나 정갈하게 살아왔는가를 느낄 수 있다. 내 눈물로는 채울 수 없는 텅 빈 항아리 놔 두소 돌팔매질 보고 빙그레 웃는 속마음 조금만 더 있다가 내가 찾아가 묻힐 항아리 -진을주 「빈 항아리」 중에서 이 시는 2007년 『지구문학』 겨을호에 발표된 시다. 그는 일단 빈 항아리를 설정해 놓고 그것을 채우는 방법을 생각했는데, 그것은 물 몇 바가지로 채워질 그런 흔한 항아리가 아니라는 것, 그래서 바로 눈물을 끌어들인다. 그리고는 눈물로도 채울 수 없는 공간을 결국 자신의 몸을 던져 채우려는 모습이 역력하다. 이 짧은 시에서 보듯 비어 있는 것을 억지로 채우려 하지 않고, 온 몸을 던져 그것을 채우려는 모습에서 시인의 삶이 어떠하였는가를 가늠하게 한다. 갑사댕기빛 동백기름 지문도 고요로이 치마폭무늬 꽃그늘 수줍어 흐르고 꼭 여심같은 깊이여! -진을주 시 「항아리」 전문 시인의 『사두봉 신화』는 1987년 10월에 발간한 시집이다. 고향인 고창 무장의 영산(寧山) 사두봉 주변에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귀신 이야기를 시로 형상화했다. 이 시집에 실린 총 61편의 시는 모두가 다른 이야기이지만, 그 이야기들은 우리들의 귀에 익숙한 이야기라는 공통점이 있다. 시인은 『사두봉 신화』의 서문에서 신화에 담긴 지혜는 고장의 생산적인 지혜가 되었으며, 이를 통하여 고향 사람들이 어떤 가치의식과 삶의 감정으로 수천 년간의 공동생활을 영위해 왔으며 어떻게 문화가 발전해 왔는가를 지켜보고자 했다. 햇살 편 소용돌이 속 불구를 타고 비바람 몰아 사비약 내린 사두(蛇頭) 고리포 발치에 두고 반고갯재 스친 길 (중략) 앞지락 비밀 열리고 고집스런 깊은 정절(貞節) 공포로운 침묵으로 발 모둔 육지 노령산맥 맥박 타고 쏜살처럼 미래가 열리는 아침이여 -진을주 『사두봉 神話』의 「사두봉의 아침」 중에서 2011년 2월 14일 시인은 정둔 세상을 떠났지만, 어쩌면 시인은 우리 곁에서 한 발도 움직이지 못하였을 것 같다. 왜냐하면 그의 동료, 선후배들의 그를 놓아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인의 서거 이후 한 달쯤 되었을 때 성춘복(제21대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신세훈(제22, 23대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등이 중심이 되어 전을주 시비건립준비위원회가 결성되었고, 그해 시인의 고향 전북 고창군 상하면 송곡리 송림산 자락에 시비가 세워졌다. 또한, 함흥근 시인 등이 중심이 되어 진을주문학상을 제정하여 서거 이듬해인 2012년 12월 13일부터 수상자를 선정하여 시상하고 있다. 제1회 진을주문학상은 추영수 시인이 받았다. 시인의 배우자 김시원 씨는 화가이며 서예가이고, 또한 수필가이다. 시인이 세상을 떠난 이후 부군의 위업을 이어받아 현재 『지구문학』 발행인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자녀로는 큰아들 동준(사업가), 큰딸 경님(아동문학가), 작은 딸 인욱(프리랜서)이 있다. 시인의 며느리 김여림도 수필을 쓰고 있다고 한다. 또한 시인의 장조카 진동규 시인은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과 전북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하는 등 우리나라 문학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바 있다. 그러고 보면 시인의 일가(一家)는 명망 있는 예술가의 집안을 이루고 있다. 오늘도 그의 고향에는 시인의 휘파람 소리가 들리고 있다. 휘파람 소리 귀신 같이 알아낸 송림산의 봄 능선마다 허리끈이 풀렸네 내 동갑 박득배는 휘파람 사이사이 낫자루로 지겟다리 장단 맞추고 나는 지겟가지에 용케도 깨갱발 쳤지 하늘은 봄을 낳은 산후의 고통 보릿고개 미역 국물 빛 울음 반 웃음 반이었어 휘파람 소리는 황장목 솔바람에 송진을 먹였네. -진을주 「송림산 휘파람」 고향마을 시비에 새긴 시 /송일섭 전북문학관 학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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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9.17 16:20

[전북문학관 지상강좌 - 한국문학의 메카, 전북] (31) 맑아서 불온했던, 날망의 소나무 시인 이광웅

이광웅 시인. 이광웅 시인은 1940년 익산에서 가난한 7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얼굴이 유독 희고 목이 길었던 시인은 어려서부터 공부를 잘했고, 명문고인 남성고에 수석으로 입학했다. 사유가 깊고 감수성이 뛰어나서 글쓰기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면서 소설과 시, 수필 등을 써서 많은 상을 받기도 하면서 문학에 두각을 나타냈다. 고등학교 재학 중에 외국의 고전을 원서로 죽죽 읽을 만큼 외국어 실력도 뛰어났다. 시인은 좋아하는 선배를 따라 외국어대학교 불문학과로 진학했다. 그러나 한 학기를 마쳤을 때 건강이 나빠지고 집안 형편도 어려워져서 중도에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야 했다. 대학을 그만두고 방황하면서도 그는 틈틈이 시를 썼다. 그때 그의 독자는 시인의 누이동생들이었다고 한다. 언뜻 보면 방황의 시간이었지만, 시인은 이 시기를 허투루 보내지 않았다. 신석정 선생을 만나서 문학적 깊이를 채워나갔다. 석정 선생의 권유로 전북대 국문과에 입학했지만, 또 중도에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잡지사 교정 일도 하고 시도 쓰면서 세월을 보냈다. 원광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항식 교수는 시인의 재능을 살리고자 원광대학교에 문예장학생제도를 마련하였고, 그를 첫 대상자로 받아들였다. 그러고 보니 시인이 1959년 외국어대학교에 입학한 이래 12년 만에 대학을 졸업하게 된 것이었다. 그는 1967년 유치환과 1974년 신석정의 추천으로 시인으로 등단했다. 대학 졸업 후 원광여고를 거쳐 1976년부터는 군산제일고등학교에서 국어과 교사로 근무했다. 시인은 당시 문단에 풍미하던 모더니즘에 심취하면서 자연스럽게 역사와 현실을 올바로 보고자 하였다. 그런 어느 날 시인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일이 벌어지고 만 것이다. 1982년 겨울 늦은 저녁, 군산경찰서로 다급한 전화가 한 통화가 왔다. 버스 승객 중에 누군가 불온 유인물을 놓고 내렸다는 것이다. 버스 안내원은 인민의 힘으로 되는 새나라 같은 구절을 보고 신고한 것, 군산경찰서에서 내사한 결과, 술에 취한 이광웅의 제자가 선생님에게서 빌려온 오장환의 시집 『병든 서울』의 필사본을 깜박 두고 내렸다는 것이었는데 이것이 바로 비극의 시작이 되고 말았다. 군산제일고 교사 5명이 영장도 없이 체포되어 온 것이다. 전두환 군사정권은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고 사회의 비판을 억누르기 위해 <오송회 사건>을 본보기로 삼고자 했던 것이다. 경찰이 공소장에 제시한 불법 서적은 오장환의『병든 서울』, 이영희의『전환시대의 논리』 등이었고, 북한의 교육제도와 순수한 우리말 보존을 평가한 것은 고무찬양죄가 되었다. 단지, 월북작가의 시집을 돌려 봤다는 이유로 이광웅, 박정석, 전성원, 이옥렬, 황윤태, 강상기, 채규구, 엄택수와 조성용 등 군산제일고 교사 9명이 구속되면서 시인은 조작된 공안 사건의 주인공이 되어버린 것이다. 교사 다섯 명이 소나무 아래에서 모였다 하여 그 유명한 오송회 사건이 된 것이다. 처음에는 다섯 명의 남성고(南星高) 출신 선생님이라 하여 오성회(五星會)로 몰아가다가, 나중에 알고 보니 한 분이 다른 학교 출신이어서 성(星)자를 못 쓰고, 대신 소나무 송(松)자로 썼다는 웃지 못할 비사도 전하고 있다. 시인은 용공 사회주의 건설을 기도한 주동자로 조작되어 7년 형을 선고받았고 복역하다가 1987년 6.29선언 이후 4년 8개월 만에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다. 감옥에 있을 당시 시인은 필기도구조차 빼앗긴 상태여서 단 한 줄의 글도 쓰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운동장에서 주워 온 못을 날카롭게 갈아서 우유 곽에다 시를 쓰고, 책 표지를 뜯어 그 위에 붙여 놓은 방법으로 그 시편들의 생명을 지켰다. 그렇게 해서 빛을 본 것이 두 번째 시집 『목숨을 걸고』(창작과비평사, 1989)에 실려 있는 <바깥의 노래>, <바람의 손길>, <햇빛 한참> 등이다. 시인은 당시 감옥에 갇혀 있는 자신의 무력함을 이렇게 노래하기도 했다. 바람이 부네 마파람 바깥 세계로부터의 무슨 전령이나 되듯이 개구리 울음소리 아득히 이 바람결에 실려 오네. <중략> 여수도 무기수도 수갑 찬 사형수도 어느 누구도 이곳에서 바람이 어디에서 불어와 왜 어떻게 감옥 안에 흐르며 머무는지 손에 잡힐 듯이 말할 수 있을 거네 바람이 부네 세계에서 가장 넓고 부드러운 바람 감옥의 바람 -이광웅의 시 「바람의 손길」의 일부 시인은 1988년 8월 군산 서흥중학교에 복직되었지만, 다시 해직교사가 되었다. 그 이유는 참교육을 부르짖었던 전교조(전국교직원노동조합)에 가입했다는 것이었다. 이 무렵 시인은 두 번째 시집 『목숨을 걸고』(창작과비평사, 1989)를 펴냈다. 이 시집에는 옥중생활의 고단함과 통일과 민주에의 열망, 출소 후의 낙수 같은 시, 교사로서의 애환, 그리고 초기 시편들이 수록되었고, 또한 문익환 목사의 서문과 김용택 시인의 발문도 실려 있다. 문익환 목사는 당신의 자상한 마음으로 골라낸 몇 마디 안 되는 말에서 울려오는 가락만으로 우리는 당신의 믿음, 당신의 사랑, 당신의 바람이 얼마나 아픈 것인가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군요라고 했다. 극도의 절제된 언어로 무지막지한 고문과 억울한 철창생활을 담담하게 그려놓은 것에 머리를 조아릴 수밖에 없다면서 이 시집을 이렇게 평가하였다. 생명은 거룩하여라. 그래서 우리는 모든 생명 앞에서 옷깃을 여미고 머리를 숙일밖에. 철창을 통해서 흘러든 햇빛얼어 곱은 두 손에 받아 든 햇빛 김용택 시인도 그의 시편을 꼼꼼하게 독파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늘 깨어 있는 모습으로 이 땅의 민주화와 민족의 자주화, 그리고 조국 통일을 이루는 날까지 시를 쓸 것이라고 다짐했던 시인을 서해 바다와 그리고 군옥벌이 한눈에 내려다보는 월명공원 날망에 선 한 그루 소나무로 비유하기도 했다. 시인은 우리에게 세 권의 시집을 남겼다. 첫 시집은 1985년에 펴낸 시집은 『대밭』(풀빛, 1985)이다. 이 시집은 시인이 감옥살이할 때 누이동생이 펴냈다고 하는데, 맨 뒷장에는 이런 말이 씌어 있다. 이 시집은 한 결결한 정신의 감동적인 변모의 기록이며, 동시에 내면 서정의 모더니즘에서 민중해방의 리얼리즘으로 나아가는 우리 민족 문학의 한 극적인 승리의 기록이다. 당시 시인과 함께 해직교사였던 도종환 시인(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현 국회의원)은 시인 이광웅을 이렇게 회상하였다. 그대는 이 땅의 맑은 풀잎이었다가 허리에 도끼날이 박힌 상처받은 소나무이었다가 그대는 별자리에서 쫓겨난 착한 별이었다가 견결한 향기로 시드는 가을 들판 마른 쑥잎으로 앉아 있다가 그대는 진흙도 물벌레도 다 와서 살게 하는 고운 호수였다가 천둥번개도 눈보라도 다 품어주는 저녁 하늘이었다가 그대는 지금 갈기갈기 소나기로 내려앉은 슬픔 쏟아지며 쏟아지며 온 세상을 다 적시는 눈물의 빗줄기. -도종환의 시 <이광웅 시인> 전문- 시인은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원, 전북민족문학인협의회 회원으로 활동하였고, 도종환, 안도현 등의 후배 시인들과 좋은 시인 선생님이 되기를 꿈 꾸었고, 한때는 교육문예창작회의 회장을 맡기도 했다. 그러나 시인의 삶은 순탄하지 않았다. 전교조운동에 참여하였다 하여 또 해직의 아픔을 당해야 했다. 그 후 전주 한샘학원에서 강사를 하기도 했지만, 1992년에는 아예 서울로 올라가서 창작에만 전념했다. 그런데 그 무렵 시인은 암이라는 새로운 복병을 만나 육신은 암에 의해서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던 것, 암 투병 생활을 하면서도 세 번째 시집 『수선화』(두리, 1992)를 출간했다. 그 후 며칠 지나지 않은 12월 22일, 시인은 52세의 젊은 나이로 우리 곁을 떠나고 말았다. 시인이 세상을 떠난 6년 뒤, 1998년 그를 기억하는 분들이 금강하구둑이 내려다보이는 곳에다 시비를 세웠다. 언제나 바닷바람을 맞고 서 있는 이 시비에는 시인의 대표시 「목숨을 걸고」가 행인들의 발길을 멈추게 하고 있다. 이땅에서 진짜 술꾼이 되려거든 목숨을 걸고 술을 마셔야 한다. 이 땅에서 참된 연애를 하려거든 목숨을 걸고 연애를 해야 한다. 이 땅에서 좋은 선생이 되려거든 목숨을 걸고 교단에 서야 한다. 뭐든지 진짜가 되려거든 목숨을 걸고 목숨을 걸고 -이광웅 시집 『목숨을 걸고』(창작과비평사, 1989)- /송일섭 전북문학관 학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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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9.09 16:34

[전북문학관 지상강좌 - 한국문학의 메카, 전북] (30) 바다를 품은 고향 하늘의 새가 되고 싶었던 김민성 시인

김민성 시인은 1927년 3월 3일 전북 부안군 부안읍 선은리에서 태어났다. 부안공립보통학교와 전주북공립중학교를 졸업한 이후 초등학교 교사를 거쳐 죽산중학교 교사로 근무하다가 문학의 꿈을 키우기 위해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공부했다. 틈틈이 습작한 시를 발표해오다 1960년 신석정 시인의 추천으로 「자유문학」을 통해 등단했다. 시인은 평생 시를 쓰면서 살았다. 1986년 첫 시집 『파도가 밀려간 뒤』를 낸 이래 2002년 『황혼의 숨결』까지 열한 권의 시집과 다섯 권의 산문집을 냈다. 시인은 1978년에서부터 1992년까지 부안여자중학교 교장을 역임하였고, 정년 후에는 낭주학원이사장, 부안문학관 관장으로 활동하면서 문학과 향토문화 발전에 큰 역할을 하였다. 1985년 국민훈장 석류장을 비롯한 허난설헌문학상, 백양촌 문학상, 교육부장관상, 목정문화상, 세계시황금왕관상 등을 수상하였다. 부안의 선은 마을은 선조들이 누대를 이어온 곳으로 시인은 유복한 가운데 가통(家統)이 뚜렷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시인은 늘 성품이 곧고 겸손을 생활신조로 삼고 살아왔기에 그를 아는 문인들과 고향 사람들에게는 따뜻한 맏형 같은 분이었다고 한다. 그의 선비적 품격과 기질, 정중함은 시인을 회억할 때마다 누구나 떠올리는 말이라고 한다. 그의 수필집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고글, 1996)에 나오는 24개의 창에는 크고 넉넉했던 집안의 분위기를 느끼기에 충분하다. 특히, 첫 시집 『파도가 밀려간 뒤』(친우,1986)는 시인이 문단 데뷔 26년 만에 나온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여기에는 시인의 성품과 치열한 노력을 엿볼 수 있다. 어설피 양산(量産)해서 자꾸 내던지는 경망을 피하고 신중하고 겸허하며 차근차근 다지면서 꾸준하게 이루고 기다리는 시인의 자세가 드러나 있지 않은가.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시인의 겸허한 자기성찰(自己省察), 그리고 정중한 내면 구성, 은은한 자기 노출이 드러난다(이병훈, 「차근차근한 자기성찰」, 첫 시집 발문)는 평가를 받았다. 저는 가만가만 술청을 나와 길모퉁이의 쓰레기장에서 하늘을 하늘이게 하고 땅을 땅이게 하고 빌다가 「로이도」 0도의 안경을 콘크리트 바닥에 떨쳐버렸습니다. 부서진 안경알의 파편 속에는 꽃과 바람과 뉘우침과 조소와 그런 것들이 함부로 함부로 우쭐대고 있었고 저는 견디다 못해 도망쳐 겨울나무 뒤에 숨어 버렸습니다. - 시집 『파도가 밀려간 뒤』의 시 <도(禱)>의 일부- 이 시에 담긴 철저한 자성(自省), 이것은 김민성 시인의 일관된 시 정신이며 삶의 철학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깨어진 안경알, 그리고 그 속에 펼쳐진 풍경(風景), 그것은 단순한 유리의 파편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꽃과 바람과 뉘우침이라는 인식은 참으로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시인의 고향 부안은 문학과 예술이 뛰어난 고장이다. 매창(梅窓)의 아름다운 노래가 언제나 석동산 자락을 감돌고 있으며 바닷가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뒤란의 대나무 숲과 어우러져 언제라도 시심을 일렁이게 한다. 시인은 평생 이처럼 아름다운 부안을 한순간도 떠나지 않고 지켰다. 부안의 아름다운 풍광에 빠져서 부안을 노래했고, 부안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살았다. 그의 시집마다 부안과 변산의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오오 변산이여』을 비롯하여 『파도가 밀려간 뒤』, 『바다 우는 소리』, 『동진강 아으리랑』에는 부안과 변산에 대한 사랑이 동진 들녘의 잘 익은 벼 이삭처럼 풍성하다. 특히 신석정 시인과의 만남은 그에게는 특별한 큰 북이 아닐 수 없다. 시가 좋아 석정의 문하를 들락거렸고 석정을 따라 인생과 자연을 사랑하며 한 시대를 살았다. 전원적이고 목가적인 시풍의 석정 시와 인간에 대한 애정과 고향에 대한 사랑을 노래한 김민성의 시는 어쩌면 동류의 교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석정 시인과 함께 부안문화연구회를 만들어서 문학 활동을 활발하게 하였고, 1960년 이후 석정이 전주로 이사하자 그 빈자리를 메워가면서 부안 문학 발전의 주춧돌을 놓았다. 1961년에는 매창(梅窓)을 상징하는 이화우라는 이름을 따서 이화우동인회를 창립하여 부안 문학을 활성화했다. 또한, 신석정의 추천으로 「자유문학」을 통해 등단한 허소라, 이기반, 황길현, 이병훈 등과 함께 석정문학회를 만들어서 석정의 문학정신을 계승하고자 하였다. -바다 3 바다는 앙금을 남길 줄 모르는 걸음걸이로 와서 가진 것 모두 잃어버린 것 모두 버릴 것 모두 모두를 파묻어 버린다. 떠나가 버린 지난여름 이야기들 떠내려간 상처 많은 사람들 눈물나는 후회를 모두 흘려버리고 혼자서 깊어만 간다. 흐르면서 흐르지 않은 생각 얼마나 많은 가로막고 있는 것들을 훌훌 씻어버리고 내처 달려 온 머나 먼 여로인가 아무도 범하지 못하는 성역에 나의 눈물과 시름을 기대고 오늘은 새초롬히 하나님 같은 그대 앞에 엎디어 불 같은 기도를 올린다. -김민성 시집 『그 끝없는 일렁임 속에』 <바다3>의 전문 - 시인은 바다를 무척 좋아했다. 그의 시집 『그 끝없는 일렁임 속에』에는 바다의 연작시 40편이 사진과 함께 실려 있다. 시인은 시집 첫머리 자서(自序)에서 사람을 만나는 즐거움보다, 귀가 먹어버린 바다이어도 바다를 만나는 행복이 있다라고 고백했다. 바다를 통해서 인생과 삶을 반추하고 늘 거듭나고자 하였다. 시인에게 바다는 자기응시였고 자기성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시인은 정년퇴임 이후 부안문화원 원장직을 기꺼이 수락하고 열정적인 활동을 펼쳤다. 사비를 출연하여 사무실을 마련하는 일에서부터 부안의 곳곳에 어린 문화와 예술의 맥을 찾아 숨 쉬게 했다. 특히 산과 들과 바다가 알맞게 교직(交織)되어 선경(仙境)을 이루고, 거기에 멋과 노래와 예술이 넘쳐나는 고장에 관한 시문(詩文)을 망라하여 『영혼을 울리는 노래, 扶安의 詩』(부안문화원, 1999)를 엮어내기도 했다. 시인은 그이 마지막 시집 『황혼의 숨결』에서는 황혼이 모든 것을 휩쓸어 가는 그 뒤에는 무엇이 숨어 있을까. 잃어버린 것들을 찾고 싶어도 병들어 부서지는 몸 언제 또 만날 수 있을까를 상상하면서 고향 부안을 관통해 흐르는 동진강의 처음부터 끝까지 날아가는 한 마리 새가 되기를 소망했다. 2002년 초여름 갑작스럽게 찾아온 췌장암. 수습할 수 없는 안타까운 상황 속에서도 시인은 창작에의 열정을 접지 않았다. 시인의 일흔일곱 해 생애는 계미년이 시작되는 시간에 멈추었다. 그러나 시인은 변산반도의 아름다운 땅에서 태어났음을 늘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그리고 문학과 고형은 시인의 궁극적인 삶의 가치였고 목적지이고 희망이었다. 이기반 시인의 말처럼 웅성 깊은 고향 사랑과 정중한 인간애는 그의 모든 시문의 행간에서 꿈틀거리고 있다. 시인이 떠난 뒤, 윤갑철, 양규태 등 부안의 문우들은 범영 김민석의 삶과 문학을 기리고자 십시일반 뜻을 모아 바다가 보이는 변산의 문학동산에 시비를 세우고 추모의 시간을 가졌다. 또한, 2008년에는 고향의 후배들이 자신들이 살아 있을 때 해놓아야 한다면서 신인의 고향 마을 선은리에도 시비를 세웠다. 한평생 시와 고향 부안(扶安)을 사랑했던 범영 김민성은 오늘도 고향의 새가 되어 변산반도에서 동진강까지 훨훨 날고 있을 것이다. -오오, 변산이여 변산에 해가 저문다 긴 밤이 오겠지 그러나 또 다른 새벽이 찬란히 트이겠지 산이 높고 짚은 데도 왜 당신은 빈 마음으로 오십니까 바다가 넓고 푸른 데도 왜 당신은 빈 손으로 오십니까 그저 오르고 그냥 돌아가기만 하다가는 산이나 바다는 너무나 길고 당신은 너무나 짧습니다 들판이 거칠고 메말랐으면 그만큼 일구고 가꾸어 나갑시다 그래야 우리의 마음도 자연과 함께 역사와 함께 걸어갈 게 아니겠습니까. -김민성의 시 <오오 변산이여> 전문 부안 변산 문학공원 시비에서 /송일섭 전북문학과 학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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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9.03 16:34

[전북문학관 지상강좌 - 한국문학의 메카, 전북] (29) 아픔·고통마저도 고운 색채로 그려낸 시인, 황길현

황길현 시인 황길현 시인은 1933년 2월 6일 전북 남원시 대강면 송내리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문학에 뜻을 두어 전북대학교 국문학과에서 공부하였으며, 1959년 10월 신석정 시인의 추천으로 「자유문학」에 「만종」 외 2편으로 등단하였다. 첫 시집 『꽃은 미움의 비탈에 피고』(여수, 동아사 1964)를 상재한 이래 『앙가발이의 반항』(서울: 배상출판사, 1974), 『그리고, 다시』(전주:대흥출판사, 1979), 『아픔은 땅에서』(전주: 신아출판사,1984), 『땀 그리고 빛』(인천;유림사,1990), 『풀잎은 한을 삭이고 자란다』(전주; 신아출판사, 1997) 등을 남겼다. 시인은 대학 졸업 후, 1960년부터 전주 영생고등학교를 비롯하여 여수고, 장흥중고, 순천고, 남원여고, 전주공고, 전주여상을 거쳐 삼례 여고서 교사로 근무하였으며 1998년 2월에 정년퇴직하였다. 시인은 이렇듯 평생 전남과 전북지역에서 학생들에게 문학을 가르치면서 작품 활동을 했다. 1970년 이후 남원여고로 부임한 이래 전북에서 문단 활동과 작품 활동을 활발하게 하였다. 그러나 시인에 관한 연구는 매우 미흡한 상황이다. 그를 아는 문단의 선후배들은 그를 가리켜 한결같이 참 시인이라고 회고했다. 항상 좋은 시를 쓰려고 노력하였으며, 자신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았으며 스스로에게는 아주 엄격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시인의 삶에 대한 조명이 미흡한 점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시인의 작품에 대한 언급은 김동수(전 백제예술대 교수)의 빛과 순결의 아웃사이더 황길현이라는 글이 전북일보와 시사전북에 게재된 바 있고, PEN 문학 동인지에 정휘립의 <내면의 항거, 역설적 은유와 상상력에 의한 황길현의 작품세계에 대한 개괄적 일고>라는 글이 있을 뿐이다. 이 두 편의 공통점은 시인의 작품에 대한 해설과 평가에 그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점이다. 시인의 삶의 단면을 엿볼 수 있는 기록은 쉽게 찾을 수 없었다. 따라서 본 고는 여기저기 흩어진 시인의 행적을 중심으로 시인을 추억하고, 제한적이지만 김동수와 정휘립의 작품론 일부를 소개함으로써 시인에 대한 이해와 관심을 촉구하고자 한다. 시인은 전북대학교 국문과에 다니면서 김해성, 허소라, 채만묵, 김종곤, 장태윤, 서완석, 이귀호, 김유택, 김종득 등과 함께 문학동아리 청도를 결성하여 활동하였다. 1955년에는 전주공보관( 현 가족회관)에서 동인들의 시화전을 개최하였는데, 이는 대학생들로서는 최초의 것이었다고 한다. 이 시화전은 청도 동인들의 작품과 김교선, 신석정, 이철균, 백초, 이동주, 박성남 등의 시화도 함께 전시되었다고 한다.(장태윤, 청도 동인 활동을 중심으로, 전북문단일화집) 시인은 대학 졸업 후, 1960년 전주 영생고에서 근무한 것을 비롯하여 전남과 전북의 여러 학교에서 근무하였다. 영생고 이후 그가 근무한 학교가 대부분 공립학교인 점을 고려한다면, 영생고에 근무하면서 교원 공개임용시험을 거쳐 공립학교로 옮긴 것으로 추측된다. 특히 전남 장흥 중고등학교에서는 재직할 당시 교지(校誌) 「억불(億佛)」과 관련된 소상한 자료를 찾을 수 있었다. 장흥고의 한 동문이 쓴 <장흥중고의 교지 「억불(億佛)」 창간호와의 그리운 만남>(장흥신문, 2018.4.27.)에 그 자세한 내용이 소개되어 있다. 시인은 교지 「억불(億佛)」 창간에 깊이 관여하면서 문학적 재능이 있는 학생들을 편집위원으로 직접 선정하고 그들과 함께 자장면을 배달해 먹으면서 교지를 만들었던 아름다운 정경이 한 폭의 그림처럼 잘 나타나 있다. 또한, 시인은 남도문화제, 호남예술제, 전북대학교 개교기념일 백일장 등 크고 작은 문학 행사에 문예반 학생들을 참여하게 하는 등 문예반 지도에 매우 열성적인 모습도 비친다. 최근 전국 최초로 회자(膾炙)하는 문학관광기행 특구지정과 관련하여 장흥 문학과 그 문맥을 정리하다 보면 장흥고 교지 「억불(億佛)」과 관련 김용술, 활길현 등 열정 있는 교사들과 장흥중고 문예반 출신 작가들이 거론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70년이 되면서 시인은 남도 생활을 접고 자신의 고향 남원으로 돌아왔다. 남원여고(1970년부터 1974년까지)에 근무하면서 기노을(奇老乙) 시인과 함께 남원지역 학생들의 문학동아리 「햇보리」 문학회의 고문을 맡아 이들의 문예 창작지도에 힘썼으며, 윤영근(전, 남원 예총회장, 소설가) 등과 함께 남원 문인협회를 창립하여 남원 문학 활성화에 이바지했다. 1984년에는 신석정 시인의 추천으로 『자유문학』을 통해 등단한 허소라, 김민성, 이기반, 이병호 등과 함께 석정문학회 창립의 산파 역할을 하였다. 오랫동안 황길현 시인이 남긴 여섯 권의 시집을 중심으로 그의 시를 연구한 정휘립은 전북 PEN문학의 「황길현의 작품세계」에서 황길현은 자신이 살던 시대와 삶에 대하여 상당히 비판적인 성향을 지녔다는 말부터 해야 할 것 같다. 스승 신석정의 중ㆍ후기 시 세계로부터 영향받은 것이 분명한 그의 현실 인식은 종종 고도의 지적인 사유를 빌어 시대를 파고든다. 그의 기법은 한국 전쟁의 후유증이나 경제적 궁핍 등 현실의 아픔을 추상적 색채로 그려내는 역설적 언어미학에서 강렬해진다. 그가 탐미한 내면의 공간이나 관념의 경지 한끝에서 수사적 이미지의 활달한 상상력이 샘솟아 나며, 그 이지적 언어로 길어 올린 변주곡의 질긴 음향은 공명을 타고 길게 울려 퍼진다.라고 했다. 김동수는 「빛과 순결의 아웃사이더 황길현」(시사 전북 닷컴 2011-04-25)에서 그의 문학을 이렇게 평가한 바 있다. 왜곡되고 굴절된 시대의 아픔을 때로는 술로, 때로는 조용한 내출혈로 삭이면서 순결과 저항의 길로 난해한 지성의 문맥으로 오갔던, 아니 어둠 속에서도 빛을 찾다가 아직도 미완의 숙제를 우리에게 남긴 채 우리 곁을 떠난 시대의 파수꾼이요, 아웃사이더, 그러면서도 진정한 휴머니스트였다고 본다. 정휘립의 연구에서 보듯 황길현 시인은 6.25 비극에서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현실을 예리한 눈길로 포착하면서 당대 겪어야 했던 고통과 아픔을 망라했다. 6.25 전쟁 때에는 반목과 질시, 살육과 모함을 이야기했고, 전후 극복과정에서 겪을 수 없는 고뇌를 앙가발이의 비극으로 표현하는 등 70년대의 저항과 순결의 의미를 그려냈고, 1990년대는 산문시로 변모하면서 최루탄, 군화 등에 짓눌린 어두운 사회 모습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갈망하기도 한 것이다. 시인은 이렇듯 역사의 질곡 속에서 고민하고 갈망했던 문제의식만 표현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우리 주변의 모습이나 소소한 일상도 예쁘게 그려내기도 했다. 시인이 당대 문인들과 함께 전주팔경을 시로 썼는데, 시인이 쓴 전주팔경의 마지막째 동포귀범(東浦歸帆은 아주 특별했다. 동포귀범(東浦歸帆)은 완주군 용진면 신기리 마그네다리 부근의 고산천을 돌아 마그네 선창부두, 만가리천으로 돌아오는 소금배, 젓거리배, 시탄배, 상강배, 곡식배 등의 행렬이 만들어 낸 산수화 같은 풍경을 아주 생생하게 그려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동포귀범(東浦歸帆) 어쩌면 좋아 맑고 밝게 서해로 트인 풍광 철철이 이어진 철새들의 축제를 멋과 맛이 어울린 풍요 바람의 돛은 돌아와 머물고 참한 평강과 온달 착한 선화와 맛동 예쁜 춘향과 몽룡 이쁜 농투산이와 땜장이들 부푼 보부상들 돛대에 걸린 그들의 노을이 곱게 불타고 있는 것을 허지만 화암사 진묵의 종소리에 여울진 백제 고혼의 한은 열리고 갯버들 풀뿌리에 얼기설킨 다슬기와 또랑새비의 마그냇 몸부림을 어쩌면 좋아 전북 문단에서 굵직한 역할을 한 황길현 시인의 삶과 문학을 재조명하는 것, 그것은 우리 전북문단에 남겨진 과제이다. /송일섭 전라북도문학관 학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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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8.26 16:25

[전북문학관 지상강좌 - 한국문학의 메카, 전북] (28) 익살꾼의 재치 드러낸 글의 마술사, 오찬식

오찬식 소설가 오찬식 소설가는 1938년 2월 15일, 전북 남원시 산동면 이곡마을에서 태어났다. 남원고등학교 1회 졸업생인 그는 1960년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오찬식과 대학 동기인 이근배 시인협회장은 당시 서라벌예술대학의 풍경을 이렇게 묘사한 바 있다. 서울 미아리 고개 너머에 신라의 고도, 서라벌(徐羅伐) 천년의 영화로움을 따서 명명한 서라벌예술대학에 1953년에 문예창작과가 생겼는데, 전국의 내로라 하는 학생들이 다 모였다. 김동리, 서정주, 안수길, 박목월 등 당대 최고의 교수진에다가 학생들은 천승세, 서상옥, 유현종, 김문수, 김주영, 오찬식 등 걸출한 소설가를 비롯한 시, 평론, 희곡, 아동문학에 이르기까지 40여 명이 작가들이 한 반에서 쏟아져 나왔다고 했다. 오찬식은 대학 재학 중인 1959년 〔자유문학〕에 단편소설 <전야(轉夜)>로 등단함으로써 그는 문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당시 그의 소설들은 서민 생활의 진실성을 묘파하면서 우리 사회의 부조리를 고발하는 경향을 보였다. 오찬식은 처절한 민족사의 현장인 지리산 기슭을 배경으로 해방 전후의 민족 비극을 형상화한 장편 《마뜰》을 비롯하여 《지리산 빨치산》, 《지방주재기자》, 《창부타령》 등 토속적 색채가 강한 50여 편의 작품을 썼다. 그 외, <고전 논리 열두 마당> (청목사.1985), (시사출판사.1994) 등의 저서가 있고, 1986년에는 죤 스타인 벡의 <붉은 망아지>를 번역본으로 내기도 했다. 오찬식은 등단 이후 왕성하게 작품활동도 하였지만, 중앙의 문학 관련 단체에서 많은 역할을 했다. 1979년부터 10년 이상 한국소설가협회에서 사무국장, 1979년부터 13년간 한국문인협회 이사,1984년부터 8년간 한국예술인총연합회 기획부장, 1984년부터 10년 동안 국제펜클럽한국본부 이사를 역임했고, 1989년부터는 문예학술저작권협회에서 이사로 근무하기도 하였다. 1960년대에는 <동아일보> 신춘문예 중편소설 부문 예심위원으로 활동한 바 있으며, 부안 출신의 소설가 신석상, <비인간시대>를 쓴 황원갑, 윤영근 전 남원예총회장 등과도 자주 어울린 것으로 보인다. 오찬식의 소설 중 지리산을 배경으로 한 <마뜰>, <지리산 빨치산>에는 우리나라 현대사의 아픔이 잘 드러나 있다. 지리산에서 펼쳐지는 동족상잔의 비극은 단순한 전쟁의 활극이 아니다. 이데올로기와 얽히면서 매우 가슴 아픈 비극으로 다가온다.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살육과 약탈, 만행의 대상이 되어야 했고, 낮과 밤에는 권력이 교체되면서 일어나는 잔혹함을 감당해야 했던 원주민들의 절박감을 그려냈다. 소설가 김주영은 오찬식의 소설에 대하여 이렇게 회고한 바 있다. 그의 글은 장작을 뽀개듯이 투박한 언어와 직설적인 구어체 문제를 많이 사용하고 있다. 질그릇 멋 같은 그의 작품은 문체의 핵심으로 넘어가는데 있어서 우회하지 않고 직선적으로 달려든다. 오찬식 문학이 지닌 호소력은 바로 인간의 속임수 없는 자세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나는 너무나 아프게 느끼고 있다. 문학평론가 임헌영은 분단 이후 지리산과 관련된 문학 작품들은 대체로 두 가지 측면을 다루고 있다고 했다. 하나는 원주민들이 분단으로 겪을 수밖에 없었던 아픈 체험을 소재로 한 증언문학이고, 다른 하나는 분단극복을 위한 역사적 변혁 주체로 참여하는 과정에서 지리산에 들어간 경우를 다룬 작품이라고 했다. 특히 오찬식의 <마뜰>과 <지리산 빨치산>, 그리고 김주영의 <천둥소리>는 몰 이념적 인간성을 내세워 민중의 수난을 그려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고 했다. 오찬식은 중앙 문단에서 활발하게 활동을 하였다. 특히 넉넉한 품성에다 술을 좋아했기에 많은 사람과 어울렸다. 언제나 활발하고 인정이 많았으며 설사 잘못되어 일이 꼬인다 해도 목젖 짜릿한 소주 한 잔이면 훌훌 다 풀어버리는 대인다운 성격을 지녀, 주변 친구들은 그를 곰으로 불렀다고 한다. 그의 오랜 친구 윤영근에 의하면 가슴 한쪽에는 눈물이 고일 법도 한데, 노상 웃음을 띠는 그의 모습이 때로는 바보스럽게 보일 때도 있었다고 했다. 오찬식과 가까웠던 윤영근(前 남원예총 회장, 소설가)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사람의 인연이 참 묘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때는 1957년 7월 후텁지근하던 날, 서울 명동에 있는 돌체 다방에서 그를 우연히 만났다고 한다. 돌체 다방에는 공초 오상순 등 명망 있는 소설가들이 자주 모였는데, 그날 웬 풍채 좋은 사내 둘이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로 좌중을 압도하고 있었다는 것, 한 사람은 부안 출신의 신석상 소설가였고, 또 한 사람은 남원 출신의 오찬식이었던 것, 초면이었지만 동향(同鄕)이었던 셋은 충무로의 부뚜막 술집에서 밤새 이야기하고도 부족하여 고려대학에서도 40분 넘게 걸어가야 하는 석관동의 허름한 오찬식의 자취방에까지 이어졌다. 다음 날 아침, 끼니를 해결할 수 없는 오찬식의 가난을 마주하며 석관동 버스 종점에서 국수 한 그릇을 나눠 먹은 것이 인연이 되어 그와 함께 3년 동안 자취생활을 했다고 한다. 고향에서 부쳐준 윤영근의 넉넉한 하숙비로 궁기를 면했으니, 시골 출신의 가난한 대학생 오찬식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런데 소설가 지망생의 오찬식과 의사 지망생의 윤영근은 쉽게 어울릴 수 있는 조합은 아니었다. 그런데 윤영근이 훗날 소설가가 되고 남원 문인협회 및 예총회장 등을 한 것으로 보아 의대생이었지만 그의 내면에는 문학적 취향이 강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윤영근은 오찬식이 대학 재학 중 문단에 등단한 것은 아주 대단한 일이라고 했다. 이들의 만남은 또 이어진다. 윤영근이 의대를 졸업하고 전방에서 군의관으로 근무할 때 그들은 부대 식당에서 우연히 만났다. 그 후, 병(兵)으로 근무하던 오찬식은 윤영근의 숙소를 뻔질나게 들락거렸다. 제대하여 서울에서 다시 만났을 때 오찬식은 동가식서가숙의 유랑 객이었다. 그는 윤영근의 병원 숙직실에서 함께 보냈다니 그들의 인연은 놀랍기만 했다. 이쯤 되면 훗날 윤영근이 소설가가 되고, 문단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필연의 결과라고 해야 할 것이다. 윤영근이 고향으로 내려와서 병원을 개업한 이후에도 인연은 계속되었다. 특히 오찬식이 지리산을 배경으로 하여 <마뜰>과 <지리산 빨치산>을 쓸 때는 함께 취재하기도 했다. 2008년 오찬식의 부음을 듣고 그가 쓴 회고의 글에는 이런 내용이 담겨 있다. 오찬식과 나는 전생에 무슨 인연인지 모르겠다. 이제 그는 영원히 내 곁에서 멀어져 갔다. 그가 평생에 눈물을 속으로 삭였듯이 나도 그의 영전에 눈물을 보이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저승에서 또 만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 뜨거운 눈물을 흘릴 것이다. 우연히 만나서 함께 자취하면서 대학 생활을 하고, 군대에서 다시 만나고, 그리고 직장생활을 할 때 다시 만나고, 고향에서 또 만나 문학을 화두 삼아 살아온 것은 참으로 특별한 인연이다. 윤영근의 말처럼 그들은 언젠가는 또 새로운 만남을 이어갈 것이라 믿는다. 오찬식은 소설가로서 작품활동을 하면서도 고향에 대한 사랑을 잊지 않았다. 1959년부터 남원 최초의 문학 동인지 『南苑』의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남원 문학의 디딤돌을 하나하나 놓기 시작했다. 고향에서 자리 잡은 그의 도반 윤영근과 남원 문인협회와 남원 예총을 창립하기도 했다. 이러한 공으로 그는 자유중국문학상(1980), 한국소설문학상(1980), 문학평론가협회상(1985), 월탄문학상(1994) 수상 등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오찬식은 지병인 신부전증을 떨쳐내지 못했다. 사람이 좋은 데다가 두주불사였으니 오죽했을까. 오랫동안 병고에 시달리면서 작품활동을 했다. 평생 글만 알고 가난하게 살았던 그는 술 마시는 재미로 살았으니 낭만적인 사람이었고 좋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점점 나이가 들면서 병이 악화하였고, 마침내는 복막투석을 해야 했고, 게다가 부인까지 먼저 세상을 뜨는 바람에 홀로 병고에 시달리다가 삶을 마감하였으며, 유족으로는 기력, 기춘 두 아들이 있다. /송일섭 전라북도문학관 학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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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8.20 16:20

[전북문학관 지상강좌 - 한국문학의 메카, 전북] (27) 인도주의를 추구했던 권일송 시인의 삶과 문학

권일송 시인 권일송 시인(1933-1995)은 전라북도 순창군 순창읍 가남리 가잠(佳岑) 마을에서 태어났다. 가잠(佳岑)이란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아름다운 봉우리란 의미인데, 마을 뒤편에는 나지막한 봉우리가 이 마을을 포근하게 감싸고 있다. 이 마을은 안동 권씨들이 집성촌을 이루어 사는 마을이다. 마을의 위쪽 중앙에는 조선 철종 임금이 하사한 효열문이 서 있는 전형적인 반촌(班村)의 모습이다. 마을 앞쪽에는 옥천(玉川)이 섬진강으로 흘러가고 그 좌우에는 너른 들이 펼쳐져 있다. 시인은 어려서 손(孫)이 없는 천 석지기 부자인 큰아버지 댁의 양자가 되었다. 집안의 분위기는 따뜻했고 평화로웠으며, 특히 시인의 어머니는 늘 책을 손에 놓지 않고 독서에 열중하였다고 한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성장한 시인이 평생 시인으로 산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시인은 순창에서 태어났지만, 그의 문학 활동의 상당 부분은 남도를 배경으로 하여 이루어졌다. 어려서부터 광주에서 성장하였고, 광주공고를 졸업한 후 전남대학교에서 수학했다. 1956년부터 1970년대까지 목포의 영흥고등학교와 문태고등학교에서 국어교사로 재직하였고, 이 지역 고등학생들의 문예반을 지도하면서 목포 문학 활성화에 이바지했다. 지금도 목포에서는 해마다 시인의 삶과 문학을 기리는 크고 작은 행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문단 활동의 상당 부분을 목포에서 했고, 이곳에서 많은 제자를 길러낸 만큼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목포 유달산에는 유달산공원조성기념비가 있는데, 여기에 시인의 글이 새겨져 있다. 목포 사람들은 시인의 고향이 목포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1957년 영흥고등학교 재직 중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불면(不眠)의 흉장(胸章)>이 당선되었고, 같은 해에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강변 이야기>가 당선되면서 시인은 문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당시 남도에서는 시인을 신춘문예의 바람을 몰고 온 장본인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1965년에는 《주간한국》에 장편서사시 <미처 못다 부른 노래>가 25회에 걸쳐 연재되기도 했다. 시인이 중앙무대에서 문단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1970년 10월부터다. 그 무렵 목포에서의 생활을 접고, 상경하여 한국문인협회 이사와 한국시인협회 중앙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76년에는 국제펜클럽한국본부 이사, 한국현대시인협회 부회장 등을 역임하였고, 1982년에는 《한국경제신문》에서 논설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91년에는 옥천향토문화사회연구소의 고문을 맡으면서 고향 순창의 향토문화 발굴과 진작에 애쓰다가 1995년 간경화로 세상을 떠났다. 시인은 이렇듯 화려하게 문단의 주목을 받으면서 많은 시집과 평론과 수필, 저서를 남겼다. 1966년의 첫 시집 《땅은 나를 술 마시게 한다》(한빛사) 이후 《도시의 화전민》(1969), 《벼랑과 눈물 사이》(1987), 《바다 위의 탱고》(1991) 등의 시집을 냈고, 평론으로는 《우리 시와 시대사황》(1986)이 있다. 또한, 저서로는 《한국 현대시의 이해》(국제출판사, 1981), 《윤동주 평전》(민예사, 1984) 등이 있으며, 수필집으로는 《한해지(旱害地)에서 온 편지》(현대문학사,1973)가 있다. 시인은 감상이나 연민을 배격하고 주지적 계열의 사회참여를 강조하는 시를 많이 썼다. 현실의 암담함과 부조리를 외면하지 않았고 인도주의 정신에 입각한 사회참여의 경향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경향은 그의 첫 시집 《땅은 나를 술 마시게 한다》(한빛사)에 실린 그의 대표시 <이 땅은 날을 술 마시게 한다>에도 엿볼 수 있다. 떠오르는 須臾의 햇빛 / 지는 노을의 징검다리 위에서 / 지나쳐 가는 그 온갖 것의 /點과 線의 거리와 眞實을 /허깨비 보듯 시린 눈으로 揚陸하면 // 정적은 비와 같이/ 背逆의 등을 쓸어 내리고 / 비에 젖는 共和國의 憲章 第 1 條 / 뜨겁게 뜨겁게 이즈러진 폐허의 조국 // 이 땅은 나를 술 마시게 한다. -<이 땅은 나를 술 마시게 한다>의 일부 위 시는 시인이 처한 서글픈 시대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제5공화국 시절의 암담한 현실이 나타나 있고, 이에 대한 저항과 고집도 비친다. 또 그와 관련된 일화에서도 이러한 시인의 모습을 찾을 수 있다. 4.19 학생 시위가 있던 날이다. 신문사로부터 원고 청탁을 받았는데, 시인은 밤이 깊도록 책상 앞에 앉아 씨름했지만, 단 한 줄도 쓰지 못했다. 마감 시간이 다가오자 시인은 <무언의 항변(抗辯)>이라는 제목만 써서 원고를 보냈다. 이를 받아든 신문사는 매우 당황했지만, 시인의 고뇌를 읽어내고 그 제목만 있는 빈 여백으로 편집하여 신문을 발간했다. 그 뒤에 시인은 공안 담당자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어 적지 않은 고생을 하였다. 시인이 단지 자연의 완상이나 사물을 새롭게 인식하는 것만으로 시인의 역할을 다 했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어느 시인의 말씀처럼 시인은 민중과 함께 민중의 울음을 울어주는 천한 곡비(哭婢) 역할도 해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권일송 시인은 주목할 만하다. 그는 학대받은 지성과 진실 앞에, 그리고 오늘의 몰락한 불구의 노래를 부른다고 밝히면서 우리 사회의 암담함을 놓치지 않았다. 시인은 그와 동시대에 함께 활동했던 대부분의 시가 전통적이거나 자연 친화적인 경향에 기울었음에 비해 현실적이고 시사적인 사건들에서 소재를 포착하여 그것을 풍자 비판하는 주지적 시풍을 견지한 것으로 평가된다. 시인은 1960년 제6회 전남문학상을 받았고, 1983년 제1회 소청문학상, 1895년 현대시인상 등을 수상했다. 시인은 시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다. 평생 400여 수를 암송한 김수남, 그리고 김춘수 시인과 함께 11월 1일을 시의 날로 제정하기도 했다. 시인의 사후 8년 뒤에 그가 어렸을 적 자주 오르내렸을 가잠(佳岑) 마을의 뒤쪽 남산대 귀래정 체육공원에 그의 시비가 세워졌다. 이 시비에는 그의 대표작 <반딧불>의 일부가 새겨져 있다. 생전에 광주와 목포, 서울을 떠도느라 바빴던 시인이 사후 고향의 품으로 돌아온 모습이 어쩌면 이 시의 중심소재인 반딧불이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늘에게 가는 목숨이야 / 어디 날개 달린 새뿐이랴 // 모시 수건으로 정갈하게 닦아낸/ 쟁반위의 밤 하늘엔 // 반딧불로 어지러운/ 떠돌이의 고향이 보인다// -<반딧불>의 일부 시인의 고향 마을 한가운데는 생가(生家)인 기와집 한 채가 덩그렇게 남아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시인의 형수 이기남 할머니가 이곳에서 순창의 전통 고추장을 만들었다고 한다. 시인의 6촌 동생 권문길 씨를 비롯한 종친들은 한 가지 아쉬움을 이야기했다. 주옥같은 시편을 남긴 시인의 시비가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귀래정 전망대 한쪽 구석에 있다는 것이다. 순창의 대표적 시인이면서 우리 문학사에 큰 발자국을 남긴 시인인 만큼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는 곳으로 시비가 이전되어야 한다고 했다. 시인의 고향 마을 앞에는 1992년 8월 2일에 세운 자그마한 정자가 있다. 바로 그 정자 안에 시인의 고향에 대한 추억과 향수를 담은 시 한 편이 걸려 있다. 그리운 가잠(佳岑) 바위보다 무겁고/풀잎보다 가볍다 /마침내 고향의 무게가 그런 것이고나 / 그리운 것들은 다 떠났어도/네 이름만은 여기 남는다.//눈 비비고 바라보는 그리운 산하/아비는 온종일 논을 갈고 /어미는 땀 밴 수수깡 밭에서/둥근 햇덩이를 줍던/아름답고 포근한 옛이야기들//천년을 버티는 푸르른 댓잎을 보아라 /마침내 흙 한 줌이 나의 뿌리였고나/ 여기 그리운 얼굴들이 다시 모여 /고개 숙여 마음을 속여/이별 없는 아침의 노래를 부른다.// 권일송 시인은 주로 광주와 목포, 그리고 서울에서 문학 활동을 하였기에, 전북 문단과의 교류는 그리 활발하지 못한 것 같다. 그런데도 우리 고장 순창에서 태어나서 이 땅의 시문학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것은 전북 문학의 자랑과 긍지로 남을 것이다. /송일섭 전라북도문학관 학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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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7.30 16:36

[전북문학관 지상강좌 - 한국문학의 메카, 전북] (26) 고독한 감꽃 시인, 이철균

이철균 시인. 이철균 시인은 우리 문단에 고독한 감꽃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시집 한 권 남기지 않고 세상을 버린 시인, 그의 제자 이운룡은 시인의 시를 모아 유고시집 『新卽物詩抄』를 발간하여 그의 문학적 업적을 기렸다. 이 시집명은 생전에 시인이 지어놓은 이름이고, 시와 시론의 원고 배열, 목차, 평설 및 장정까지도 시인이 출판을 위해 준비한 그대로라고 한다. 시인은 1927년 3월 15일, 전주의 물왕몰에서 부채를 만드는 집안의 이형환과 김금주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전주북중학교와 일본 와세다대학을 졸업하였고 625 이전에는 목포의 문태중학교에서 1년 남짓 근무하였으며 전쟁 이후부터 1958년도까지 전주고등학교에서 근무했다. 전주고등학교 재직 중에 『문예』에 시 <염원>(1953.2), <한낮에>(1953.6), <소리>(1954.3)로 서정주의 추천을 받아 등단했다. 그 무렵 시 동안지 <남풍>을 주재하고, 잡지 <인물계>의 편집을 맡기도 했으니 그의 삶은 오로지 시와 함께였다. 해마다 주옥같은 서정시를 발표하여 문단의 주목을 받았지만, 유별나게 독신을 고집하여 홀로 지내다가 1987년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철균의 시에는 동양 정신의 하나인 무(無)위 사상이 주조를 이룬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초기 작품의 대부분은 동양 정신에 입각한 무위(無爲)가 주조를 이루고 있으며, 1960년 이후부터는 조금씩 현실에 눈을 돌려 <감꽃>, <정거장 부근에서>, <낙엽 풍경> 등을 발표하여 원숙한 시 세계를 표현하였다. 시인은 한평생 시의 길만 오롯하게 걸었다. 시는 곧 그의 생활이면서 분신이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그의 삶은 언제나 외롭고 쓸쓸했지만, 결코, 어느 한순간에도 게을리하지 않으면서 시의 길을 고집하였다. 시인의 삶은 항상 낙관적이었으며 자신만만했다. 제자나 지인들의 서술에 의하면 시인은 술자리에서 취기가 돌면 금방 천진난만한 아이처럼 어린이가 되었고, 가난했기에 주변 친구들의 신세를 지면서도 항상 당당했다고 한다. 시인이 시를 쓰는데 남다른 집요함을 보인 것은 아주 오래전부터인 것 같다. 시인이 전남 목포의 문태중학교에 근무할 때의 일이다. 당시 문태중학교 교장인 아버지를 따라 이 학교에서 공부한 강우택 씨는 이철균 시인과 한방에서 지냈던 추억을 이렇게 서술해 놓았다. 이철균 선생은 책상머리에 앉아 원고지에 뭔가를 쓰고 구겨버리고 또 쓰곤 하였다. 아침에 일어나 보면 구겨진 원고지가 한 뭉치씩이나 되었다. 그 무렵 나는 선생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시를 쓴다는 것이 어려운 작업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딴짓은 다 해도 시를 쓰는 일, 문학은 어려운 것이라고 판단, 일정 거리를 두고 살아왔다. 매일 밤 밤새도록 원고지와 씨름한 시인은 6.25 전쟁 때 전주에 있는 부모님이 궁금하다며 돌아간 후 다시는 만날 수가 없었다고 했다. 그 뒤로 소식을 모르다가 우연히 덕진공원에서 시인의 시비를 보고 그를 떠올리며 쓴 수필에 나온 내용이다. 그의 제자 이운룡 시인은 이철균 선생에 대하여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유인 이철균 시인은 진짜 시인이다. 시인으로서 긍지와 자존심을 꺾지 않았음은 물론, 고고한 시 정신을 끝까지 저버리지 않았다. 시와 맞붙어 일생을 두고 1대1로 싸운 선생의 치열한 정신과 의지는 모든 시인의 본보기가 될 것이다. 정말로 처절한 고투였다. 외로움이 시인의 전유물이요 고독한 삶이 시인의 운명이며 인생인 것처럼 피붙이, 살붙이 하나 남김이 없이 그리고 자신의 무덤조차 남기지 않고 재로 뿌려졌지만, 이제 저승의 한 점 바람 앞에 하얀 감꽃 그림자로 서서 이 『新卽物詩抄』를 바라보고 쓸쓸한 미소를 띨 것이다. 항공대학교 윤석달 교수는 이철균 시인을 시대의 아웃사이더, 외로운 단독자였던 시인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이렇듯 그의 삶은 고독한 여정이었고, 외로의 연속이었다. 그의 시 <감꽃>은 빼어난 수작이라는 평가다. 그의 초기 시부터 감꽃을 노래했다. 감꽃의 순수한 소박미와 동양적 정서를 잘 그려낸 시인, 감꽃처럼 수줍게 피어나 감꽃처럼 미련 없이 세상을 떠나갔다. 쑤꾸기 소리 따라 감꽃은 하나 둘 피어났는가? 다시는 오지 못할 푸르름 밑에 하마터면 뜨지 못한 나의 눈빛이 진정 새로운 뜻으로만 피어나는가? 의좋은 어느 집 어린 형제와 같이 돌담 위에 서로의 손짓이 보일 듯 어제 밤 너와 나와의 아쉽던 가슴 위엔 저기 저 감꽃이 쑤꾸기 소리 따라 피어났는가? -<감꽃>전문 이 시는 많은 사람으로부터 시인 자신의 간결하고도 근원적인 소망이 눈물로 아롱져 있는 작품이라고 평가되었다. 최종한의 박사학위 논문「존재론적 시 의식 연구」에서 쑤꾸기 소리는 생명을 탄생시키는 근원적 어떤 것이며 부재(不在)다. 그리고 쑤꾸기 소리로 인하여 형상을 갖춘 감꽃은 새로운 생명이며 존재(存在)다. 따라서 여기에는 쑤꾸기 소리가 곧 감꽃이고 감꽃이 곧 쑤꾸기라는 인식이 내재하여 있다. 즉 부재가 존재이고 존재가 부재인 것이다. 시인은 육십 평생 시를 썼지마는 살아생전에 단 한 권의 시집도 낸 바 없다. 그렇다고 국정교과서나 문학 교과서에 실린 적도 없어서 시인이 활동상도 널리 알려지지 않은 편이다. 그러나 그와 함께 문학 활동을 했던 많은 제자와 시인들은 그의 삶을 아직도 소중한 추억으로 기억하고 있다. 시인의 고독한 생애와 시집 한 권도 내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던 중산 이운룡 시인을 비롯한 우리 고장의 문인들이 뜻을 모아 전주 덕진시민공원에 시비를 세우고 4년 간(2002-2005년) 이철규문학상을 주고 시인의 삶을 기렸으니 얼마나 가슴 든든한 일인가. 그 시비에는 그의 시 <한낮에>가 새겨져 있다. 영(嶺)을 넘어 구름이 가고 나비는 빈 마당 한구석 조으는 끝에 울 너머 바다를 흐르는 천봉(千峯)이 환한 그늘 속 한낮이었다. <한낮에> 전문 한 폭의 그림처럼 한가롭고 고요한 시가 속에 그려진 마을의 풍경이 떠오르는 시다. 어떤 요사한 관념이나 현란한 수사도 없이 여름 한낮의 풍경을 담담하게 그려낸 시로, 여기에도 동양적 사고가 유유하게 흐르고 있음을 감지한다. 시인이 시집을 내려고 준비했던 자서에 의하면 나의 시 대부분은 무수한 자살에 직면하면서 그 위기를 새로운 차원으로 극복해 간 나름의 눈물이요, 내 존재의 집들이라고 표현한 것을 보면 많은 시가 그렇기 쉽게 씌여진 시가 아님을 곧 눈치채게 한다. 시인이 직접 이름 지어놓았다는 유고시집 『新卽物詩抄』도 즉(卽)의 철학이라는 실존철학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감꽃의 시인 이철균 시인은 우리 곁은 외롭게 떠났지만, 시인이 남긴 주옥 같은 시편들은 전북 문단의 후배들에게 새 길을 밝혀주는 등불이 될 것이다. /송일섭 전라북도문학관 학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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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7.16 16:45

[전북문학관 지상강좌 - 한국문학의 메카, 전북] (25) 야천 김교선의 삶과 문학세계

김교선은 1912년 함경남도 함주군에서 태어났다. 1932년 함흥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 가서 도쿄호세이대학(東京法政大學) 문학과를 졸업하였다. 학교를 마치고 서울에서 잠시 구문사라는 출판사에 다녔지만, 낙향하여 이화여전을 나온 최정희 여사와 결혼하였다. 해방 후 어수선한 상황에서 일본 유학까지 다녀온 그가 고향에서 태연하게 지낼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서울로 와서 신혼살림을 했고, 슬하에 딸 둘과 아들 하나를 두었다. 6.25 전쟁 때에는 부산까지 피난하였고, 광주와 전주, 고창에서 교사와 교장을 역임하였다. 1954년부터 20여 년간 전북대학교에서 봉직하였고, 정년 이후에도 약 10여 년 동안 전주대학의 객원교수로 재직하였다. 김교선은 대학에서 강의와 연구에 전념하였으며 1960년대 초반부터 현대문학과 창작과 비평 등 국내 유수의 지면에 무게 있는 비평을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1972년에는 선생의 회갑을 기념하려는 제자들의 뜻을 받아들여 그동안에 발표되었던 글을 모아 『소설의 이해와 평가』라는 평론집을 출판하였다. 그리고 또 24년이 흐른 뒤에 『관념과 생리』라는 문학평론집을 냈다. 김교선의 걸출한 제자 천이두 교수는 스승의 평론집 『관념과 생리』의 발문에서 그의 스승을 이렇게 회고했다. 선생의 강의는 웅변조나 연설조와 같은 화려한 강의 스타일과는 정반대로 조용하고 차근차근하게 더듬거리지 않으면서도 어딘지 더듬거리는 듯한 느낌을 주는 강의 스타일이었지만, 30년대의 이상(李箱)과 1차 대전 이후 서구의 전위문학과 불안(不安)문학에 대한 강의는 막연히 문학 쪽에서 삶의 길을 찾아야 할 것 같다고 생각한 나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차츰 선생의 강의에 끌려 들어갔고 그분 특유의 인간적 분위기에 점차 빠져들게 되었다. 이렇듯 김교선은 전형적인 선비 스타일이었지만, 일체의 교조적인 태도를 배격하고 가정에서는 엄격하면서도 자애로웠고, 학교에서는 제자들을 무척 아끼고 사랑하였다. 또한, 문우들과도 자주 어울리면서 문학과 인생을 이야기하였다. 김교선이 625 이후 우리 지역에 정착한 것은 전북 문학계로서는 매우 은혜로운 일이었다. 왜냐하면, 전북의 비평문학은 1920년대 이익상, 유엽, 김환태, 윤구상 등의 1세대 비평문학가들이 있었지만, 이들의 활동 시기는 대부분이 1930년대까지였다. 그들 이후 전북의 비평문학은 한동안 침체기에 들었는데, 그 이유는 일제의 노골적인 침략 탓이 크다. 이러한 침체기에 전북 비평문학의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데 그가 맨 선두에서 아주 큰 역할을 했다. 그의 지도로 한국 비평문학계에 우뚝 선 천이두 교수와 그리고 그 뒤를 이은 오하근, 임명진, 전정구 등 많은 평론가가 전북의 비평문학을 더욱 풍성하게 했다. 그런 점에서 김교선은 전북비평문학사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다. 최명표 문학평론가는 「김교선의 생애와 비평」에서 김교선의 비평이 높이 현양되어야 할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제시한 바 있다(전주예술사,2019). 첫째, 대일 항쟁기에 이익상으로부터 기원한 전북의 근대 문예비평이 해방 후 상당 기간 공백 상태에 처했는데, 이 혼란기에 전라북도 평단을 수복하느라 헌신하였다. 둘째, 뉴크리티시즘이라는 비평적 방법론을 도입하여 전북대 국어국문과에 이식하면서 치밀한 독해를 강조함으로써 천이두의 텍스트에 대한 정치적 독해, 오하근의 원전비평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셋째, 김교선의 비평적 업적을 기술하지 않고서는 전북의 현대문학비평사가 제대로 기술할 수 없을 만큼 이익상의 졸서(卒逝)와 전쟁으로 중단된 전북지역 비평사적 맥락을 채워주는 역할을 충실히 했다. 김교선도 한때 시를 쓰기도 했지만, 시가 관념적 정열의 소산이라는 생각이 들어 대학 시절에 그만두었다고 한다. 1962년 『현대문학』 2월호에 「불안(不安)문학의 계보와 이상(李箱」을 발표하면서 그는 나이 마흔에 늦깎이 문학평론가가 되었다. 그의 비평문학 활동은 1960년대에서 1970년대까지가 절정인데, 대부분의 평론이 『현대문학』지에 발표되었고, 월평과 서평을 도맡아 할 만큼 왕성한 필력을 과시했다. 그중에서도 「현대적 背理意識의 원형」, 「자기증명의 소설」, 「조화미의 절정」, 「이정화의 작품세계」, 「관념소설론」, 「윤흥길의 작품세계」 등은 높이 평가되는 평론들이다. 그의 첫 평론집은 『소설의 평가와 이해』(형설출판사, 1972)이다. 이 책은 작가론과 작품론을 일관되게 논의한 평론집이지만, 그의 말대로 작가론은 전기적인 성격의 작가론이기보다는 작가의 작품세계를 논한 비평이었다. 작품론은 월평 중에서 중점적으로 취급했던 작품을 추려 넣은 것이라고 밝혔다. 작가론에서는 「김동인론」의 동인 문학의 근대성의 저변을, 「나도향론」은 자기증명의 소설을, 「현진건론」은 리얼리티에 관한 세계를, 「이상론」은 불안문학의 심리적 계보를 논의하였다. 또한, 성층적 구조의 소설인 황순원의 「原色 오뚜기」의 현대적 가치, 자의식 과잉의 표현인 최병익의 「張三李四」의 분석, 심리적 지적 사색과 소설적 형성을 보인 장용학의 「圓形의 傳說」의 현재적 의의와 표현상의 맹점, 현대적 배리(背理)의식의 원형으로서의 체호프의 「六號室」의 현대적 의의 등이 논의되었다. 그 외에 『현대문학』 월평으로 윤흥길의 「황혼의 집」, 이청준의 「침몰선」, 「별을 보여드립니다」, 「소문의 벽」, 「문단속 좀 해주세요」와 이세기의 「두 시간 십 분」, 이주홍의 「유기품」, 이범선의 「청대문 집 개」, 오영수의 「새」, 「갯마을」, 이병구의 「세금」, 임옥인의 「술꾼」, 김용성의 「불상」, 손창섭의 「흑야」와 박상륭의 「남도」, 이광숙의 「가변성」, 「광한 산신」, 최상규의 「적」, 오영석의 「구두와 훈장」, 송병수의 「정광호 군」, 「한여름의 권태」, 오유권의 「가랑잎새」 등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비평했다. 두 번째 평론집인 『관념과 생리』도 작가론과 작품론, 월평과 서평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소설의 이해와 평가』에 이은 24년 만의 결실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작가론은 이효석, 이정환, 윤흥길, 박완서, 이세기, 나도향, 이상의 문학세계를 분석하였다. 작품론은 김소월의 「산유화」, 이범선의 「오발탄」, 오상원의 「모반」,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 김주영의 「천둥소리 3」, 최명희의 「혼불」, 오영수의 「갯마을」, 황석영의 「객지」, 임철우의 「사평역」, 김정한의 「사하촌」, 나도향의 「벙어리 삼룡이」, 신석상의 「프레스 카드」 등이 주로 논의되었다. 김교선의 비평 태도는 문학에 대한 철저한 인식을 바탕으로 작품 자체에 집중하여 작품의 실상을 따뜻하게 심정적으로 수용하는 자세를 견지하였다. 김교선은 나가 배제된, 나의 주체적 심정적 참여가 배제된 어떠한 고담준론도 믿지 않았고, 그러면서도 지나치게 나 속으로 탐닉함으로써 대상을 내 안에 흡수시켜 버리는 나르시스즘도 배제했다. 즉, 그의 비평세계는 어떤 선입견에도 사로잡히지 않고 작품 자체에 밀착하려는 태도를 일관되게 보여주었다. 천이두 교수는 김교선의 비평은 항상 대상을 일정한 거리에 두고 바라보는 자세를 견지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어야 하고(『관념과 생리』의 발문), 최명표 박사는 김교선의 비평 태도를 중용의 비평가로 정리했다.(전북작가열전,2018) 중등학교 재직시절부터 김교선의 동료였던 송준호 교수는 <야천 김교선 선생과 나>라는 글에서 그를 이렇게 서술한 바 있다. 야천 선생은 범사에 사리가 분명하고 비리 앞에 의연하며 속된 타협을 모르고 사는 분이다. 그러나 선생은 또 언제나 분위기가 좋고 가족적이며 그러면서도 매사에 원칙과 질서가 존중되는 학자로서 알려져 있으며, 그러한 점에서 많은 사람의 선망이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김교선은 2006년 94세의 나이로 별세하였으며, 전북 완주군 봉동읍 완주공설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그에게는 1남 2녀의 자녀가 있는데 모두 훌륭하게 성장하여 우리 사회의 중추로서 역할을 잘하고 있다. 장녀 김춘이는 서울대학교 산업미술과를 나와 다자이너로 활동하면서 꾸준히 작품을 발표하고 있으며, 차녀 김진이는 전주대학교에서 영어교육과 교수로 정년 퇴임하고 사회복지의 법인 대표로 봉사하고 있다. 아들 김정민은 감리사로 건축분야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송일섭 전라북도문학관 학예사 **이번 편부터 송일섭 학예사가 전북문학관 지상강좌를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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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6.18 17:23

[전북문학관 지상강좌 - 한국문학의 메카, 전북] (24) 한국 비평문학의 효시 눌인 김환태

눌인 김환태 여(余)는 예술지상주의자 남도 그렇게 부르고 나도 자처(自處)한다 오월의 아카시아 향기에 묻혀있는 김환태의 묘지석에는 예술의 대상은 영원히 인간이다 생명이다. 예술비평의 대상은 사회도 정치도 사상도 아니요 문학이다. 문학이란 자유의 정신의 표현이다. 구(究)의 정신의 소산이다.라고 새겨져 있다. 그리고 예술은 예술가의 감정을 여과하여 온 외계의 표현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언제나 감정에 호소합니다. 그곳에는 이론도 정치적실용적 관심도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술의 세계는 관조의 세계요, 창조의 세계입니다.(「문예비평가의 태도에 대하여」)라고 했던 김환태는 순수 비평의 씨앗을 튀운 한국비평문학의 효시라 불린다. 눌인 김환태(訥人 金煥泰, 1909~1944)는 무주군 무주면사무소 직원이었던 김종원과 부인 고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전주고보에 입학한 그해(1922)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1924년 일본인 교사를 쫓아내려는 항일운동에 연루되어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고, 해제조치에서 제외되면서 자퇴하였다.(1926) 그해 보성고등보통학교로 전학하여 신소설 『능라도』를 읽고 문학에 입지하게 되었다. 김환태는 서울 보성고등보통학교로 편입하였다(1926). 당시 보성고보에는 상급반에는 이상(李箱)이 있었고, 김상용(金尙容)이 교사로 재직 중이었다. 그는 이들과의 문학적 교류를 통해 자신의 문학적 소양을 키워 나갔다. 1927년에는 고향을 멀리 떠나 서울에서 생활을 하면서도 무주청년회가 주최한 강연회에 강연자로 참석하여 고향 무주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김환태는 1928년 일본 도시샤대학(同支社大學)에서 유학하였다. 재학 시절 신입생 환영회에서 시인 정지용(鄭芝溶)을 만나 문학적 친교를 맺게 된다. 도시샤대학을 수료한 후 후쿠오카의 규슈제국대학(九州大學)) 법문학부 영문과에 입학하여 영문학을 전공했다. 그는 영국의 비평가 매슈아널드와 월터페이터에 대하여 연구하면서 작품 자체의 미적 구조를 존중하는 순수 문학을 옹호하는 비평가로 기틀을 잡는다. 그의 졸업 논문 『문예비평가로서의 매슈아널드와 월터페이터』를 써 졸업하였다. 고국으로 돌아온 김환태는 본격적인 문학활동을 이어간다. 조선일보에 실린 외국문학작품을 번역하며 각종 신문과 학예지에 평론을 게재했다. 『조선문단』, 『조광』, 『문장』 등에 평론과 수필과 번안소설 등을 발표하였다. 1935년부터는 집필에만 열중하다가 여의전 강사로 활동하며 이헌구 등과 친근하게 지내게 된다. 1936년 구인회에 가입하여, 박팔양, 김상용, 정지용, 이태준 등과 활동했다. 그리고 구인회 회원이었던 박용철과의 교류는 그의 문학적 성향을 형성하는데 영향을 받았다. 그해 박용철 누이동생 박봉자와 결혼했다. 김환태는 일본 유학 시절 안창호와 교류를 하던 중 동대문경찰서에 1개월 동안 수감되는 등 그의 항일 의지는 확고했다. 이어 일본은 전쟁을 위해 학병 및 징병제도를 실시하였는데, 문학가들과 교사들을 앞세웠다. 일부 문학가들은 변절하여 친일문학을 썼으며, 일부 교사들은 학생들을 전장으로 내몰았다. 일제의 국어말살정책과 친일문학이 확산되자, 김환태는 1940년 절필을 선언한다. 1943년 폐병을 얻어 무학여고 교사직을 사임하고 귀향한다. 1944년 영면에 들었다. 1986년에 문학사상사의 주관으로 김동리, 박두진, 최승범, 이어령 등 52명의 문인들이 뜻을 모아 덕유산 국립공원에 「김환태문학비」를 건립했다. 1988년에 문학사상사는 김환태평론문학상을 제정하였다. 이후 2009년 눌인 탄생 100주년을 기념한 문학제를 개최하고 『김환태 전집』을 발행하였다. 전 전북문인협회 서재균 회장과 무주군수 김세웅 등이 눌인문학관을 건립하였다. 무주군 주최와 김환태문학기념사업회 주관으로 매년 기념행사를 개최하고, 눌인평론문학상금을 주며, 『눌인문학지』를 발행해 그의 공적을 기리고 있다. 나는 상징의 화원에 노는 한 마리 나비이고자 한다. 아폴로의 아이들이 가까스로 가꾸어 형형색색으로 곱게 피워놓은 꽃송이를 찾아 그 미에 흠뻑 취하면 족하다. 그러나 그때의 꿈이 한껏 아름다웠을 때는 쉬운 그 꿈을 말의 실마리로 얽어놓으려는 안타까운 욕망을 가진다. 그리하여 이 욕망을 채우기 위하여 쓰여진 것이 소위 나의 비평이다.(「김환태 문학비평의 길」, 김환태문학비에 새긴 글) 김환태는 문예비평가의 태도에 대하여 문예비평이란 문예작품의 예술적 의의와 심미적 효과를 획득하기 위하여 대상을 실제로 있는 그대로 보려는 인간정신의 노력입니다. 따라서 문예비평가는 작품의 예술적 의의와 딴 성질과의 혼동에서 기인하는 모든 편견을 버리고, 순수히 작품 그것에서 얻은 인상과 감동을 충실히 표출해야 합니다. 라고 언급했다. 또한 「나의 비평의 태도」에 따르면 비평은 작품에 의하여 부여된 정서와 인상을 암시된 방향에 따라 가장 유효하게 통일하고 종합하는 재구성적 체험이요, 따라서 비평가는 그가 비평하는 작품에서 얻은 효과, 즉 지적정적 전 인상을 표현하고 전달하기 위하여 어느 정도까지 창조적 예술가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믿어 움직이지 않는 자이다.라는 견해를 밝혔다. 김환태는 상허는 그의 높고 맑은 상만이 아니라 이를 표현하는 놀라운 기교를 갖추고 있다. 진정한 예술에서일수록 우리는 내용 즉 형식 즉 내용이라는 느낌을 가진다.는 평을 했다. 시인 정지용은 느끼고 감각한 것을 조화하고 통일하는 지성을 고도로 갖추고 있는 시인이다. 그리하여 그는 결코 감정을 그대로 토로하는 일이 없어, 그것이 질서와 조화를 얻을 때까지 억제하고 기다린다. 고 하였다. 시인 김상용론(金尙鎔論) 그는 생에 대하여 가장 진실하게 느끼는 시인요, 생에 대한 그 진실한 느껴움을 읊은 것이 곧 그의 시다. 라고 발표를 했다. 무릇 김환태의 문예비평에 대한 주장은 그 작품에 나타난 사상과 현실이 얼마만한 정도에 있어서 작가의 상상력과 감정 속에 융해되었으며, 그것을 어떤 방향으로 지도하려던 그 작가의 의도가 얼마만한 정도에 있어서 실현되었는가, 그리고 그 결과 그 작품이 얼마만한 정도로 우리를 감동시키고 기쁘게 하였는가를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며 문예비평이 정치비평이나 사회비평과 다른 점을 부각시키고 있다. 김환태의 일부 수필에서 가을이 되자 나는 머슴을 따라다니며 겨울 먹일 소풀을 뜯어 말렸다. 겨울에는 여물을 썰고 소죽을 쑤었다. 그랬더니 이듬해 첫봄에 소가 새끼를 낳았다. 나는 동생을 보던 날처럼 기뻐 밤새도록 자지 못했다. 이 시절이 나의 가장 행복하던 시절, 내 마음의 고향이다. 돌아가신 어머님 생각이 날 때면 그 시절을 생각한다. 그리고 소를 생각한다. 고향이 그리울 때면 그 시절이 그립다. 그리고 소가 그립다.며 어머니와 고향에 대한 서정적 향수가 형상화되고 있다.(「내 소년시절과 소」) 김환태는 일본대학 재학 중 정문의 위협적인 표정과 정문 수위의 냉담함과 오만함을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수험결과에 자신을 얻은 다음 활개를 펴고 오만한 교문을 마음대로 들어 다닐 수가 있었다. 오늘부터 나의 기쁨은 오직 읽고, 생각하고, 스스로 매질하는 데만 있을 것입니다.라고 맹세를 하였다.(「九大 法文學部 正門의 표정」)와 「교토3년」에는 그가 일본 유학시잘 식민지 청년으로서 겪어야 했던 쓸쓸함과 굳은 의지가 잘 표현되었다. 김환태를 추모하는 이어령은 우리 곁에서 영원히 살아 숨 쉬는 그의 문학정신을 많은 비평가들이 얻는 것은 이데올로기요, 잃은 것은 예술이었다고 탄식했다. 이헌구는 지극히 낮고도 부드러운 음성과 웃을 때마다 유난히 하얗게 빛나는 고르고 고운 이빨, 크게 웃지도 않고 조용히 소리없이 포개지는 작약처럼 수줍게 미소짓던 그 모습을 떠올렸다. 지금까지 범박하게 살펴본 김환태는 한국문학사에 한 획을 남겼다. 일제 암흑기에 순수문학의 이론 체계를 정립하고 1930-1940년대에 활약한 비평가이다. 식민지 시대 지식인으로서 애국적 삶과 그의 문학론은 오늘날 많은 후배 평론가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그는 이데올로기 문학의 카프와는 달리 문학을 순수한 미적 대상으로 보았던 순수문학의 주창자였다. 그리고 문학에서 받는 인상과 감각을 중시하였고, 예술을 독자적 미를 가진 심미적 존재로 보았다. 김환태는 치열한 문학정신으로 근대 한국 문학의 발전에 공헌한 평론가이다. /김명자 전라북도문학관 학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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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5.28 16:51

[전북문학관 지상강좌 - 한국문학의 메카, 전북] (23) 시적 언어의 순수성·인간애 구현한 구름재 박병순 시조시인

구름재 박병순 시조시인. 무궁할 겨레의 가슴가슴에 불씨 되어 타리라 박병순(朴炳淳, 1917~2008)은 진안군 부귀면 출신이며 아호는 구름재이다. 2016년에 복원된 생가는 모래재 메타세콰이아의 길 입구에 구름재 박병순 생가라는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이곳은 스승인 가람 이병기에 이어 한국현대문학사에 시조의 가치와 의미를 대중적으로 확장시키고, 시조 부흥에 정념을 쏟았던 구름재 박병순이 살던 곳이다. 1917년 출생하여 1939년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이 집에 살았던 구름재 선생은 나라사랑도 남달랐으며 집 둘레에 무궁화를 심어 울타리로 삼고, 한글보급운동에 힘써 우리말글 지킴이로 위촉받기도 하였다. 이곳에서 쓰여진 대표적인 시작품은 「무궁화」, 「속금산」 등이 있다. 이후 2017년 구름재 선생의 시비가 생가 마당에 세워졌는데, 구름재 박병순은 애국심과 우리글 사랑이 육화된 불꽃 신념으로 생애를 마치신 한국이 낳은 시조시인이며, 교육자며, 한글운동가로 존경받으면서 나라사랑, 한글사랑, 시조사랑의 삼애(三愛)를 몸소 실천하신 분이다. 이에 높은 뜻을 기리고자 고향 진안에 시비를 세워서 숭고한 정신을 우리의 유산으로 계승하여 천추에 길이 남을 자랑으로 삼고자 한다. 라는 건립의 뜻을 담고 있다. 그리고 비문에는 서정성이 담긴 시조 한 편이 새겨져 있다. 눈이 탐스럽게 내린다/ 흰나비인 양 춤추며 내린다.// 밀보리 쏟아지신다신/ 가람 스승님 생각도 나고// 어린 맘 절로 신이 나서/ 덩달아 춤을 춘다.// 경칩이 엇그젠데/ 봄눈 탐스럽게 내린다// 보리 풍년도/ 까마득한 옛이야긴데,// 촌색시 봄손님 맞은 듯/ 괜스레 가슴 설렌다.(「봄눈」 전문 ) 구름재 선생의 약력으로는 진안공립보통학교와 대구사범학교를 다녔으며, 전북대학교 국문학과(1954)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1939년 전주사범부속초등학교 교사를 시작으로 전주고, 전주공고, 전주여상고, 이리공고, 진안농고, 전라고 등 1978년까지 40년 동안 교직에 헌신하였다. 이후 전주대학교, 중앙대학교, 한양대학교 등에서 시조창작론, 고전세미나 등을 강의하였다. 또한 1952년 전주에서 시조문학 최초의 전문지 『신조』를 5집까지 발간했다. 구름재 선생은 전통의 보고인 시조문학의 시조집을 1956년에는 『낙수첩』, 1971년 『별빛처럼』, 2003년 『먼길바라기』 등 12권을 상재하였다. 이외에도 한춘섭, 리태극과 함께 공저 『우리 시조 큰 사전』을 발행하였다. 구름재 선생은 스승 김해강을 통해 처음 시조를 접했으며, 이후 이병기 선생에게 본격적으로 시조를 배웠다. 일제 강점기 대구사범학교 시절 시조집을 몰래 배포하다가 일본 경찰에 잡혀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815 해방 후부터 이병기와 함께 시조부흥에 참여했으며, 신석정, 백양촌, 장순하, 최승범 등과 함께 가람동인회를 결성하여 한국시조사에 영향을 주었다. 또한 이철균, 김목랑, 하희주, 장영창 등과 전북문인협회를 창설하였다. 한국시조협회 이사, 가람문학상 운영위원, 1991년 한국시조시인협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한글 운동에 앞장섰으며 한글학회 이사로 활동했다. 가람시조문학상 공로상, 한글학회 창립 100돌 기념 공로상 등을 수상하였다. 다음으로 구름재 선생의 시작품을 시기별로 분류하면 제1시조집 『낙수첩』에서 제4시조집 『새 눈 새 맘으로 세상을 보자』 까지의 초기문학은 그의 인생관과 서정/서경이 일상생활에서 이미지화됨을 알 수 있다. 총총히 먼 길을 떠난 지 하마 보름도 넘었는데,/ 네 뚫고 간 문 구멍을 아직도 막지 않는 뜻은,/ 그 구멍 넘어 귄이 쪽쪽 흐르던 모습을 보기 위해서다.// 아침 저녁 선들거리고 비바람 사납게 부는 날도, 네 뚫고 간 문 구멍을 상기도 막지 않은 뜻은,/ 고 구멍 넘어 정이 찰찰 넘치던 소리를 듣기 위해서다.///총총히 먼 길을 떠났듯 어서들 빨리 돌아오라./ 장미꽃 이제도 피고 국화 향기로운 뜨락으로,/ 수없이 찢고 간 문을 바르기 전에 종종걸음쳐 빨리 오라.(「문을 바르기 전에」 부분) 그리고 제6시집 『가을이 짙어보면』에서 제9시조집 『구름재 시조 전집』 까지를 중기작품으로 볼 때 이 시기에는 인생과 자연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심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내 생애 아무리 서럽고 괴로왔대도,/ 임종만큼은 저- 낙조처럼 고와야지/ 저녁 놀 헤치고 깜박 숨지는 황홀황홀한 저 한 점.// 구름 흩어지며 산산 조각이 나도,/ 서녘 하늘은 마지막 거룩한 잠자리/ 낙조는 빈 하늘 한 가닥 서광으로 남는다.(「낙조처럼」 전문) 구름재 선생은 쉰 아홉에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하여 장 수술을 세 번이나 받았다. 그러므로 후기 작품들은 인생과 죽음에 대한 회고와 사유를 통한 삶의 자세가 구체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무시로 틈만 나면 창 너머 먼 길 눈빠지게 지키건만,/ 날마다 밤마다 먼길바라기 수심 깊고 밤도 깊어 조바심/ 온 밤이 대 새도록 어떻다 바라는 당신 나몰라라 하시시는가?/ 차라리 방문을 차고 눈 온 먼 길 떠나갈까 보다.(「먼길바라기」 부분) 이상으로 살펴본 구름재 선생의 시작품에서 장순하는 구름재 선생의 시조는 즉생활적(卽生活的)이고 철저한 서정이다. 인정스런 그의 성품과, 생활과 시를 일치시켰고, 황희영은 구름재의 시정신은 소박한 휴머니즘에 바탕을 두고 있다. 생활 잡기가 아닌 그의 수많은 작품들의 소재와 주제는 인간들의 아기자기한 삶에서 오고 있다.고 논하고 있다. 김해성은 애국 애족관과 자연과 인간의 합일화에 대한 미학을 피력하였고, 천이두는 가람의 숱한 제자 가운데 가장 충실한 제자가 바로 구름재라고 했다. 이은상은 박병순을 교육자와 시인으로서 순수성을 가진 맹물로 비유했다. 백철은 그의 시적인 경지는 안정감을 느끼게 하고 전통적인 시조 형식과 문장이 능숙하여 독자를 감복시킨다.는 평을 했다. 무릇 구름재 선생의 시학은 친자연주의, 휴머니즘, 전통주의, 선비정신이다. 이러한 시적 이념은 인간과 사물과의 관계가 은유적인 시공간으로 표상되고 있다. 밤은 깊어 갈수록 고적은 사뭇 쌓여 오고(「한가위」)나, 맑은 닭 소릴 듣자면 초가집 지붕 밑이야 되네(「초가 지붕 밑에서만」) 등은 고향에 대한 깊은 천착이 드러난다. 그리고 합죽선 확- 폈다가 활활 부쳐 오므리는 이 한 맛(「부채」)과 전통이 벅차게 흐르는 속에 넋을 잃은 이 아침(「추석」), 밤차에 너를 보내 놓고 흐느끼는 밤이로다(「밤」) 등에서 삶의 의식에 대한 자아 성찰이 표상되고 있다. 무엇보다도 구름재 선생은 시조사랑에 대한 시정신이다. 나는 시를 치레로 하거나, 생활하는 시인보다, 시와 시조를 종교하는 시인으로 살겠다는 것이 나의 신념이자 나의 실생활이요, 나의 참마음 참모습이다. 나는 자만하지 않고, 자긍과 겸손을 지나, 겸손하게 살고 싶은 것이 나의 마음가짐이자 몸가짐이려 한다.라며 여리고도 단단한 작품세계를 피력했다. 뿐만 아니라 시조는 혼과 멋, 기교와 창의가 따라야 하며, 시조 창작은 진실과 순수 그리고 정열만이 가능하며, 또 곱고 쉬우면서 밝은 우리말 우리글로 표현된 시조를 위해 순정을 바쳤다. 무거운 책보따리를 들고 허우대던 불우한 국어 국문 학도였다. 그러나 한글 전용의 선구자요, 실천자요, 공헌자였고, 시조 전문지의 효시 신조(新調),의 주재자로 시조 문학 부흥과 시조 보급 운동의 거점을 이룬 끈질긴 과감한 투쟁자였다. 한글을 사랑하고 시조를 종교하는 민족 시인으로 가람의 뒤를 이은 한국의 별로 살다 간 가냘프고 고달픈 순결한 대한의 교육자였다.(「비명(碑銘)」 전문) 따라서 구름재 선생은 우리 민족의 정체성인 전통문학인 시조의 계승을 위해 자신의 시학을 올곧고 정성스럽게 수행하며 현대시조사에 기념비적인 업적을 남겼다. 새 눈으로 자연을 보고 새 맘으로 세상을 보며 어질고 착하고 맑고 곱게만 세상을 살았던 구름재 박병순. 그는 현대시조 정착을 위해 시조사랑의 순수성과 인간애의 구현을 위해 목숨이 다할 때까지 천명을 하늘에 걸었다. 그리하여 오직 한 평생 시조와 함께 길을 걸으며 무궁할 겨레의 가슴가슴에 불씨 되어 죽는 날까지 노력을 멈추지 않는 시조시인이었다. /김명자 전라북도문학관 학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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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5.14 16:54

[전북문학관 지상강좌 - 한국문학의 메카, 전북] (22)긴 세월 부여안고 넋으로 밝혀온 말간 강심 백양촌 신근 시인

백양촌 신근(白楊村 辛槿, 1916~2003)은 부안에서 태어난 시인이며 교육자이다. 고향 부안 서림공원과 부안댐에는 그를 추모하는 시비가 있다. 첫 번째 시비가 전주 덕진공원에 세워져 있으며, 전북지역문단에서 왕성한 활동을 한 업적이 새겨져 있다. 그의 시작품은 삶을 관조함으로써 투명하고 순수한 시세계가 형상화됨을 알 수 있다. 시비에 새겨진 「강(江)」은 백양촌의 따뜻하고 단아한 선비적 풍모를 지닌 시적 정서가 섬세하게 인지되고 있다. 여기 서면/ 태고의 숨결이 강심에 흐려/ 어머니, 당신의 젖줄인양 정겹습니다./ 푸른 설화가 물무늬로 천년을 누벼오는데/ 기슭마다 아롱지는 옛님의 가락/ 달빛 안고 하얀 눈물로 가슴 벅차옵니다./ 목숨이야 어디 놓인들 끊이랴마는/ 긴 세월 부여안고 넋으로 밝혀온 말간 강심/ 어머니 당신의 주름인양 거룩하외다. 길어 올리면 신화도 고여올 것같은 잔물결마다 비늘지는 옛님의 고운가락/ 구슬로 고여옵니다.(「강」(江) 전문) 백양촌은 그의 아호이다. 고향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도일하여 중학교와 대학을 수학하였다. 1945년 전주사범학교에서 교편을 시작으로 삼례중학교, 전주고등학교와 전주성심여자고등학교에서 근무하였다. 또한 『전라신보』와 『전북일보』 편집고문 겸 논설위원을 역임했다. 1931년에 시작품을 창작하기 시작하여 1946년 『월간예술지』에 시작품 「동방의 새아침」이 당선되었다. 해방 직후 김해강 김창술과 함께 전북문단동우회을 결성하였다. 또한 봉선화동요회(1948)를 조직하여 동요와 동극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후 전라북도아동교육연구회 기관지 『파랑새』 창간호(1946)가 발행되었다. 이 소년소녀잡지에는 창간사와 동요, 동시, 동화, 아동극 등이 실렸다. 이때 활동한 사람은 김목랑, 신석정, 김영만, 김해강 등이 있었다. 그들은 이 소년소녀잡지를 통해 꿈과 희망을 심어 주었다. 그러나 4호까지 발간되고 재정상 더 이상 발간되지 못했다. 우리집 앞동산에 파랑새하나/ 아츰마닥 고흔날 노래부르네/ 곱디고흔 몸맵시 나는 좋아요/ 아름다운 그노래 나는좋아요// 푸른하늘 빛나는 해ㅅ별을안고/ 하루하루 반가운 소식을안고/ 파랑새는 새단장 고흔맵시로/ 어린이의 새세상 축복해주네// 파랑새의 노래는 희망의 노래/ 파랑새의 노래를 들을때마다/ 두려움과 겁남도 스러지고요/ 어린이의 의기를 싹돋게해요// 파랑새 파랑새 고흔동무야/ 휫날리는 희망의 태극기아래/ 하고싶든 우리말 우리노래를/ 파랑꽃이 필때까지 합처부르자(백양촌, 『파랑새』)라는 시를 게재했다. 백양촌은 수필 「어린이날에 보내는 노래」에서 손을 다오 어서 나아가자 새날을 약속하는 오월 태양이 빛나는 거리로 희망과 미소가 쏟아지는 들로 산으로 자유롭게 날개 펴어 밤하늘 별처럼 지혜롭고 무성한 초목처럼 싱싱하게 꽃피어오르는 날에 노래부르자 하면서 어린이들에게 권리를 부여하여 그들이 생각하고 행하는 일을 함부로 꺾지 말고 북돋아 주자 했다. 어린이가 있는 곳에 웃음이 있고, 어린이가 행하는 데 참됨이 있고, 어린이가 커가는 데 이 나라의 행복이 있다.(「오늘은 어린이날」)며 어린이와 아동문학에 남다른 열정을 보였다. 백양촌은 1960년대 이후 문단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전북문단 1세대라 일컫는 김해강 신석정 서정주 이철균 시인들과 함께 전북문단의 꽃을 피웠다. 한국문인협회 전북지부장(1962), 한국예총 전북지부장(1966), 전북문화상(1966), 전주시사를 집필하였다. 평론과 시, 동요, 수필을 그의 필명으로 발표하였는데, 살아생전 시집 한 권 내지 못했다. 그가 와병된 이후 후손과 후학들의 후원으로 『白楊村 詩全集』, 『白楊村 隨筆全集』(1989)이 백양촌선생 간행위원회에서 발간하였다. 그리고 백양촌문학상(1989)을 제정하여 매년 12월에 시상하였다. 백양촌의 시세계는 작품들의 시적 관심사나 형상화 측면에서 주로 자연과 자아 존재론적 탐구에 기초한다. 서정주는 『白楊村 詩全集』의 序에서 너는 차라리/ 푸르른 달빛이 氷河처럼 고요히 흐르는 밤/ 오오래 뉘우침 앞에 기도드리고 일어선/ 백합같이 하이얀 손에 만져지라.(「백합앞에서」)하며 우리에게 주는 영향은 純粹性의 性向이 많은 試鍊과 選擇과 求心的祈禱를 거쳐 深化一路를 걷고 있다는 소견을 적었다. 또한 원형갑의 『무한한 너의 詩心觀』에 따르면 시인 백양촌에 있어서 자아와 자연은 그의 유한한 생명을 영원의 이름으로 유지해주는 주체성의 양면이라고 논하고 있다. 백양촌의 시적언어는 마치 동요의 색채를 띤 것처럼 맑고 담백하다. 그는 일상어를 통해 시적 정서와 심상을 구체적으로 표현하였다. 포플러 나뭇가지 물이 오르면/ 니-나 소리내어 불어보지요/ 흰나비 노랑나비 춤을 추면은/ 오얏꽃 복사꽃이 방긋웃어요/ 바람이 하늘하늘 꽃잎을 안고/ 시냇물 남실남실 흘러내리면/ 누나와 푸른잔디 기슬에 앉아/ 파-판 하늘아래 봄꿈맺지요.(「봄인사」) 하듯이 경쾌하고 발랄한 순수함이 형상화되고 있다. 또한 백양촌은 교지 『옥잠화』에서 내 앞의 사심없이 투명한 소녀의 눈망울엔/ 치솟는 청탑 위 구름처럼 푸른 꿈 흐르는가./ 신의 이슬같은 고운 눈물 아슬히 깃드는가.(「소녀의 눈망울은」)과 너는 차라리/ 푸르른 달빛이 빙하처럼 고요히 흐르는 밤/ 오오래 뉘우침 앞에 기도 드리고 일어선/ 백합같이 하이얀 손에 만져지라.(「백합 앞에서」)에서 외롭고도 슬픈 부끄러운 세월을 담담한 자아 성찰로 나타내고 있다. 이밖에도 친자연주의에 관심이 많았다. 수필 「自然歸依 思想」에서 자연의 품에 들어서면 몸과 마음이 상실한 어린 날의 고향에 돌아와 온통 안기듯 아늑하여 심기가 마냥 자유로와 좋다. 무심한 듯 하면서도 神의 경건함과 끝없이 깊은 성자의 포용력, 오묘하고 아름다운 默示로서 어루만져주며 정한 목숨으로 고이 다스려주지 않는가. 자연은 영원한 동경의 고장이다.하며 자연을 자신의 의지처요 아취라 했다. 그리고 「현대시의 길」에서 오늘의 시인은 발전하는 민족적 방향에 뒤떨어짐이 없이 용감히 뒤쫓아가 보조를 맞춰가며 국민들의 생활과 민족의 임무와 역사적 과제를 시로써 형상화하는 것이 유일한 詩의 길이라 했다. 여기 일월과 더불어 사라지지 않는/ 싱싱한 젊은 나라 있어/ 젊은 염통 염통마다 희망과 꿈은 되살아나/ 삼천리 강산마다 재건의 함마소리 드높나니/ 오오, 겨레의 자랑, 겨레의 영광/ 불멸의 진리인 나의 조국이여!(「조국에 부치는 사랑」)와 사월의 깃발을 향수하며 여기 역사의 층계 위에 다시금 저립하며 멋대로 도금되는 민주주의의 허무로 사랑도 슬픔도 동결된 세월의 막다른 위치에서 황토길에 뒹구는 별눈 같이 역겨운 고독은 묻어두길 바랐다.(「사월의 의미」)며 현실 비판적 의식을 노래했다. 백양촌의 작품 세계를 이기반은 『자아극복의 미학적 표상세계』에서 백양촌 시인의 孤獨 痛恨 憂愁는 내면의 외로움과 아픔과 시름을 눈물짓지 않는 엄숙한 극복의 의지를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詩속에 작용하는 遠近의 거리와 明暗의 차이를 조명하면서 빛을 부르는 노래로 자아를 슬기롭게 극복하는 詩心의 美學이라고 조명하고 있다. 김해성은 백양촌의 시세계는 시름과 사는 孤獨의 美學이라고 한마디로 요약하고 있다. 또한 구름재 박병순 시인에 의하면 백양촌 시인은 童顔에 동심을 갖고 있으며, 다사하고 온화한 성품을 지닌 조용하고 관조적인 시인이다. 전북문단의 씨앗을 뿌리고 가꾸며, 묵묵히 시작품만 창작해 온 시인이다. 어느 때 읽어도 순화된 인간미의 감득을 깊게 이식하고 있다.며 시인의 세계인식에 대해 표상하고 있다. 백양촌은 모름지기 詩人은 현실에 뒤떨어지지 않는 詩를 쓰라! 시인의 생활이 진실한 현실적 실천단계에 선다면 그 형상화하는 시도 진실할 것이요, 詩가 진실하다면 새 방향을 내닫는 국민들의 가슴 속에 울림이 크고 벅찰 것이 아니냐?며 문학과 인간에 대한 시정신을 성취하고 있다. 백양촌의 詩는 높은 理想, 곧 사랑이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이와 같은 사랑을 구현시키기 위해서 살아왔고, 살아가며 이 고귀한 시정신은 사랑이 빛이다. 했던 백양촌. 20여 년 동안 투병 생활하며 삶을 마칠 때까지 자랑보다 부끄럼 많은 당신과 나의 맺힌 세월을 순수하고 담백한 언어로 휴머니즘을 구현했다. 그는 살포시 열리는 꽃잎같이 엷은 미소를 지닌 순수 서정의 시인이었다. /김명자 전라북도문학관 학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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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4.23 15:25

[전북문학관 지상강좌 - 한국문학의 메카, 전북] (21) 임을 노래한 시인 최민순 신부

늦게야 님을 사랑했습니다. 이렇듯 오랜, 이렇듯 새로운 아름다움이시여, 늦게야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 성 아우구스티노, 『고백론』 최민순(崔玟順, 1912~1975)은 신부이고, 세례명은 요한이며, 문인이다. 진안에서 출생하였다. 신심 깊은 부모님과 진안 어은동 본당 신부님의 허락으로 1923년 대구 성유스티노신학원 라틴어과에 입학했다. 이후 사제 수업을 마친 후 1935년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는 서품 후 수류 본당 주임으로 성무를 수행했으며, 전북 정읍, 임실, 남원본당 등에서 주임신부로 사목하였다. 1938년부터 1945년까지 전주 본당 내 학교가 해성심상학교로 개편 창설되면서 교장으로 재직하였다. 최 신부는 일제 탄압에 맞서 강론 등을 통해 거부 저항함으로써 구속되기도 했다. 그 후 1945년 최 신부는 대구 성유스티노신학원 학장으로 임명되었으나, 그해 일제에 의해 사퇴되어 경성천주공교신학교(현 가톨릭 대학) 교수로 전임되었다. 1951년 대구대교구 출판부장, 『대구매일신문』, 『천주교회보』의 사장으로 임명되었고, 『천주교회보』의 명칭을 『가톨릭시보』로 변경 후 신문 사설에 글과 시를 실었다. 이듬해 성신대학 교수로 전임되어 후진 양성과 시, 수필, 번역 작품을 발표했다. 1963년 세르반테스의 소설 『돈키호테』의 번역으로 제2회 한국 펜클럽 번역상을 수상하였다. 1960년 스페인 마드리드대학에 유학하여 신비(영성)신학과 고전문학을 공부하고 1962년에 귀국하였다. 1962년 성가수녀회 지도신부로 지냈고, 1963년에는 소명여자중고등학교장으로 재임되었다. 1965년 가톨릭 공용어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어 주의 기도, 대영광송 등의 기도문을 작성했다. 1966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가톨릭대학에서 영성신학을 강의했다. 1968년 구약성서의 시편을 완역했고, 1975년 지병으로 사망하여 용산 성직자 묘지에 안장되었다. 서울 혜화동 가톨릭 신학대학 교내에 세워진 최민순 신부의 시비가 있는데 비문은 아래와 같고 그의 영성이 잘 나타나 있다. 외딸고 높은 산 골짜구니에/ 살고 싶어라/ 한 송이 꽃으로 살고 싶어라// 벌 나비 그림자 비치지 않은/ 첩첩 산중에/ 값 없는 꽃으로 살고 싶어라// 햇님만 내 님만 보신다면야/ 평생 이대로/ 숨어서 숨어서 피고 싶어라 (「두메꽃」, 전문) 저서로는 수필집 『생명의 곡』(1954)과 시집 『님』(1955), 『밤』(1963), 그리고 유고집 『영원에의 길』(1977)이 있다. 그의 유고집에 의하면 최 신부는 신학생 시절부터 이미 문재文才에 뛰어났으며, 사색을 즐겨했고, 우수한 성적을 보였다고 한다. 여기에는 『프랑소아 모리악의 소설론』(1936)이 있으며, 수류 본당 재임시절에 쓴 수필 「양 떼를 찾아」(1936)와 단편소설 「효종」, 「헌 양말」 등이 있다. 1960년에서 1975년까지 저술활동은 한국 가톨릭문화의 거장들 자료에 따르면 이 시기 최 신부의 글은 가르멜 영성에 기초해, 아우구스티노 성인과 함께 걸으면서 생명의 원천인 하느님을 추구하고 찬미 드리는 것으로 귀착된다. 이는 세상으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자신이 먼저 진정한 길을 걸으며 세상을 향해 외치는, 인생살이의 서러움을 뼛속까지 체험한 형제로서의 간절한 부름이요, 성인들에 대한 영구와 기도 및 수덕생활로 보낸 지혜 가득한 학자요 선생으로서의 손짓이며, 세상 속에서 하느님의 징표를 발견한 예언자로서의 실존이며, 봉헌과 희생의 제사를 지내는 사제로서의 자기 희생이요, 자신의 피로 맡겨진 양 떼를 키우는 사목이었다. 또한 번역서로 단테의 『신곡』, 중 지옥편,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아우구스티노의 『고백론』, 『완덕의 길』, 『예수의 데레사』, 『성경의 시편』, 『영혼의 성』, 『가르멜의 산길』, 『십자가의 요한』, 『어둔 밤』 등이 있다. 최 신부는 신학교에서는 파리외방전교회의 영향을 받았으며, 특히 스페인에서 신비신학의 체험을 바탕으로 하느님을 향한 여정에 깊이를 더해갔다. 그의 영성적 삶에 영향을 끼친 성인은 성 아우구스티노와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십자가의 성 요한 등이 있다. 아우구스티노의 『고백론』은 하느님을 모르고 외로운 나가 되었던 사람들이나, 알고도 모르는 척 나 하나로 있고 싶어서 스스로 외로운 나가 되어버린 현대인들에게 진정한 나의 모습과 가치를 계시해 주었다. 이를 번역한 최 신부는 현대의 소용돌이 속에서 불안한 정신, 진리에 목마른 지성과 죄 많은 영혼은 여기서 평화와 신앙의 빛과 은총을 얻을 것이라는 글을 독자에게 남겼다. 또한 아빌라 데레사의 『영혼의 성』과 『완덕의 길』에서 성녀의 영성에 대한 가르침을 이해하게 된다. 영성의 세 단계인 님의 영원안에서의 현존, 영혼의 점진적 심화, 하느님과의 합일을 통해 이해와 구원에 이르는 길을 제시한다. 그리고 자아인식을 통해 영혼의 목마름을 극복하고 하느님과의 일치를 체험한다. 십자가의 성 요한의 『가르멜의 산길』과 『어둔 밤』은 밝고 희망찬 인생이 이어지길 바라고 행운만이 있기를 바라는 보통 사람들에게는 어둔 밤이 두려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십자가의 성 요한은 끊음과 씻음을 통해 스스로 어둔 밤을 향해 걸어가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태초에 누리던 놀라운 행복으로 가는 것임을 깨닫는다. 이에 최 신부는 다른 어느 사람의 영성보다 피부로 느낄 수 있고, 또한 어떤 의미에서 현대를 건질 수 있는 구원의 원리를 지닌 영성이라 자각했다. 최 신부는 특별강론이나 피정지도를 통하여 사제나 평신도들에게 영성을 심어준 영성신학자로서, 문인으로서 존경을 받았다. 박일 신부의 『최민순 신부의 생애와 하느님의 이해』 에 따르면 최민순 신부가 한국 교회에 남긴 의미는 그 깊이와 폭에 있어서 측량하기가 어려울 정도다. 특히 영성과 문학에 있어서 그의 위상은 참으로 선구자적이고 우뚝해, 차라리 고독하게 느껴질 정도다.라고 조명했다. 검은 喪服에 청춘을 묻고/ 오로지 님을 숨쉬며 살던 生物// () 더 큰 괴임과 섬김이 소원이었기/ 어느 空間에 갇히일 몸이 아니었다/ 죽기 아니면 견디옵기를.(「제물」)로써 살았다. 보지 않고 믿음이 복됨이라면/ 허전한 가슴 안고 이냥 살으려노니/ 그리움도 내일을 몸가지는 한낱 기쁨/ 고독이 쥐어짜는 방울 방울/ 핏 방울에 어두움이 물들고/ 까마득히 새벽은 멀리 있어도/ 나는 밤을 새우렵니다/ 님 하나 믿으며, 믿으며/ 젯세마니의 밤을 세우렵니다/(「젯세마니의 밤」)라며 고뇌도 했다. 그리하여 지복의 하늘나라 성삼위聖三位의 품속에서 그립던 천사들이 우리 금혼의 곡을 노래하는 날까지 구도자의 길을 추구했다. 최 신부는 님의 노래 머금고/ 봉오리가 부풀어 오르면/ 태양은 눈부신 키쓰로 나를 꽃피웁니다의 한 송이 채송화처럼, 혹은 구태여 양지쪽 동산을/ 부러워하지 않는 마음/ 나는 님이 심어주신 좁다란 땅에서/ 다함 없는 봄을 맞이하는 엉겅퀴가 되어 평생 알려지지 않기를 원했다. 따라서 님을 향한 구원 여정은 항시 저 푸른 하늘 별들과 다못 살고파/ 겨우내 눈 비 맞으며 이렇듯 서 있노라(「겨울나무」)처럼 참자유의 길을 선택했다. 그는 깊고 캄캄한 어둔 밤을 시라쿠사의 貞女처럼/ 두 눈알을 쟁반에 받쳐들고/ 캄캄한 심연/ 두 안공처럼/ 해를 비추시는 나의 님을/ 다함 없는 빛을바라며 살기를 원했다. 그리하여 골고타 봉우리에 밀씨 한 톨/ 부활의 씨앗을 심으면서 당신 등에 곱다시 업혀/ 구름 속 헤치며 창공을 가고자 했던 구도자였다. 그는 신앙인이자 사제이며, 영성가이다. 그리고 임을 노래한 시인으로서 참된 하느님과 만남의 길을 가르쳐준 사표師表이다. 님은 나의 길, 나의 진리, 나의 생명, 영원한 카나안을 밝히는 빛임을 인식하며 구원 여정을 향하여 나아갔다. 오직 사랑하는 임과의 일치를 위하여 어둔 밤을 걷고 있는 오늘날의 신앙인들에게 최민순 신부는 영적 등불이 되고 있다. 가시 아래 피 번지신 당신의 거룩한 얼굴을 밝으신 태양 삼아 지복직관至福直觀했던 최민순 신부님에 관한 더 많은 연구가 이어졌으면 한다. /김명자 전라북도문학관 학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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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4.02 15:18

[전북문학관 지상강좌 - 한국문학의 메카, 전북] (20) 높은 뜻, 시를 읊고 서 있는 나무 호은(壺雲) 박항식

문학관의 하얀 목련이 하늘로 피어오르는 봄밤, 투명한 고독, 혹은 가릴 수 없는 마음으로 선생님을 그리워하는 제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호운 박항식 선생님을 어떻게 기억하고 계시나요? 짧은 질문 속으로 긴 호흡의 침묵은 고요했다. 그리고 가만가만 깊은 기억의 장을 펼쳤다. 그는 호운 선생님을 대학교 학부시절에 만경강 문학 동인회의 지도교수님으로 모시게 되었단다. 선생님은 섬세하고 날카롭고 자신감으로 고집도 강하시고 또 그만큼 고독하셨으리라 생각한다며 지금까지 가장 존경하는 분이고, 시인이 되는 가르침을 주었던 선생님의 따뜻한 정을 잊지 못한다고 했다. 호운 박항식(朴沆植, 1917~1989)은 나의 號 壺雲에 대하여 설명한 바 우리나라 지리산을 방호산方壺山이라고 한다. 智異山 발치인 南原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나는 號를 方壺, 方壺山人, 壺雲으로 한 것이요, 詩集을 『方壺山 구룸』이라 이름하게 된 것인바, 『列子』 湯問篇의 故事와도 因緣맺기에 이르른 것이다. 호운은 1917년 남원에서 출생하였다. 어릴적 일찍 아버지를 여위었고, 전주농림고등학교(1949)를 다녔다. 『한성일보』 신춘문예에 「눈」이 당선되었고(1949), 남원에서 수지중학교를 설립하여(1951~53) 초대 교장으로 활동하였다. 이어 원광고등학교 교감으로 재직하였으며(1953~64), 호남문학회 회장을 엮임하였다(1960~64). 『경기신문』 신춘문예 시조부에 최우수상(1961),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조부에 당선(1967)되었다. 한국언어문학회 회장을(1972~74) 지냈으며, 이후 동국대학교에서 「동서문학 수사 비교연구」라는 논문으로 문학박사를 받았다(1975). 원광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를 엮임 후 영면하기 전까지 익산에서 46년 동안 활동했다. 저서로는 시집 『白砂場』(1946), 『流域』(1959), 『方壺山 구룸』(1981)과 시조집 『老姑壇』(1976)이 있으며 가족동시집 『다람쥐와 꽃초롱』(1981), 『수사학』(1976)과 『시의 정신차원』(1985) 등의 작품을 남겼다. 또한 호운 박항식 박사 고희기념문집(1987)이 간행되었다. 이후 2005년 5월 13일 남원 교룡산성 공원에서 박항식 박사 시비 「도라지꽃」이 세워졌다, 여기에 김동수 시인은 기라성 같은 원광문인들을 길러 한국 문단에 새로운 사단을 형성한 선생은 정갈한 언어와 심원한 동양적 사유가 정교하게 어우러진 서정 미학으로 한국시사에 새로운 정신세계를 열어주었다고 펑가받고 있다.라고 썼다. 그의 첫 번째 시집 『유역』에서 「미호천美湖川」은 시대적 비극인 625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물오라기! 베를 날면서 흐르는 미호천은 고요히 흐르는 강물처럼 뿔뿔히 헤어졌던 수천 각색 살림살이가 마침내 흘러서 맑아지는 미호천으로 평화의 꽃 잎을 띄우며 흘러가는 것으로 우리 민족의 애환이 표상되고 있다. 그리하여 오라기마다 고운 마음을 담아 길고 구비진 사연을 이루어가는 어머니 손길처럼 매듭진 것도 풀어 이어 이루는 미호천이여 자비하신 어머니처럼 흘러가 동이 트는 아침에 빛나는 얼굴로 기쁨을 기다리는 시적 화자의 심상을 은유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그리고 호운은 「現代詩小考」에서 현대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20세기 예술운동의 대표적인 것으로 추상주의(형식주의의 화화 계통)와 초현실주의(환상예술의 계통)를 인식함을 생각했다. 이러한 인식의 사유는 시들의 표현과 정신세계를 내용으로 담는 것이다. 예를 들어 1920년 프랑스의 예술가 마르셀 뒤샹이 도자기로 된 변기를 분수라는 제목으로 전시한 적이 있는데, 자신을 소변기 샘의 영혼과 동격으로 놓은 것으로 초현실주의파에 있어서 상징적으로 작용되는 오브제의 근원이 되고 있다. 또한 호운의 시론 「나의 詩에 대한 見解」에는 두 가지 시론을 설명하고 있다. 시 속에서 언어를 추방하려고 들었던 뽈 발레리의 순수시론純粹詩論과 시 속에서 문학을 배제하려고 주장하였던 기욤 아폴리네르의 상형象形(그림의 형식을 통한 시) 이다. 먼저 호운은 아폴리네르의 영향을 받아 그의 시 「코스모스」와 「안개」 작품을 쓰면서 주제에 맞도록 문장을 도형화했는데, 이러한 시도는 상형에 영합한 것으로 글꼴과 문장 모양, 행간 등으로 시각적인 의미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언어에는 의미를 전달하는 작용과 감동을 전달하는 작용이 있는데, 다음의 작품에서 살펴보자. 인생은 떠다니면서도 지상에 집을 지니고 살 듯이 구룸은 해맑은 창공에 부리를 내리고 부평초같이 고요히 떠나간다.// 눈동자 초롱한 변두리를 길어올리면 거기서 눈물이 솟기듯이 구룸은 가장 해맑은 생각은 물이다.// 물이 환상에 불타서 피어오르는 구룸 구룸은 이제 그의 물길을 간다.// 가다가 참을 수 없는 뜨거운 정이 되면 눈물로 화하여 방울방울 떨어지는 구룸//() 인생이 구룸을 보는 깨끗한 마음으로 구룸은 또 인생의 마음을 어루만지는데// 쉬지 않고 흐르는 습성으로 가다가 가다가 마침내 구룸과 인생은 서로의 모습을 바꾸는 물에서 만난다.( 「구룸」, 부분) 위 작품에서 호운은 언어의 순수성에 대한 사유를 인지한다. 순수시의 요건은 감동을 주는 것인데, 이는 시를 구성하는 순수시의 시도이며, 시 속에서 산문적 요소를 배제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시에서 감동은 視聽覺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호운의 시집 『方壺山 구룸』은 視聽覺으로 표상되는데, 주조는 각覺이 될 것이다. 이처럼 호운의 시와 시조에서의 공통점은 감각성을 중시했다. 山 속에 속속들이 처녑 속 깊은 山이/ 나무 나무 나무들이 서로 어깨 싸고 서서/ 頭流千年 壯한 듯을 몸짓으로 나토니라// 눈에 보이잖은 실날 같은 사연들이/ 골짜구니 세세구비 이야기를 모아다가/ 蟾津江 띠를 둘러서 가고 오고 흐르니라// 山이야 江물이야 하늘 푸른 靑鶴洞에/ 백닥이 전나무처럼 살고 말라 서서/ 푸르러 사는 이치를 지켜보고 싶구나.( 「老姑壇」, 전문) 호운의 시조집 『노고단』을 연구한 김광원은 호운은 음성상징어를 많이 사용하고 있으며, 음성상징어의 사용은 시의 감각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의 시는 감각성과 관련하여 정령성을 띠게 된다. 여기서 정령성이란 사물과의 감각적 교감을 통해 얻어지는, 영속성을 지닌 맑고 투명한 영혼성을 의미한다. 시의 내용은 조화와 평등의 세계를 지향하고 있다. 그의 시조에는 불교적 경향을 띠고 각의 세계를 지향하고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 밤에 마시고 아침에 후회하는 사람같이 눈은 내린다. 후회의 빛깔은 먼 회색이면서 가까운 백색이다. 눈은 혀가 깔깔하지 않은가? 마시고 후회하는 사람을 탓하는 여인같이 마음 곱게 눈은 내린다. 눈이 물이라는 것도 모르는 멍청이같이, 내리다가 지다가 쌓이다가 녹다가 녹고 마는 소인 같이 눈은 내린다. 먼 광야 향기로운 초원의 오줌에서 피어나는 김같이 모락모락 눈은 내린다.( 「눈」, 부분) 위 수필에서 보듯이 호운의 눈은 너는 나같이 나는 너같이 눈은 내린다.에서 작중 화자와 눈을 동일시하고 있다. 작중 화자는 쓴 막걸리에다 소주를 섞어서 마시는 막소주처럼 인생은 고달프고 세상이 각박해도 하늘이 베풀듯이 눈이 내리는 것을 묘사한다. 불상한 걸인의 시체를 덮는 이불처럼 눈은 오는가? 울어주는 이 없는 것처럼 내리다가 너무 많아서 싱거우면 올라가다 내리듯이 눈은 내린다. 그리하여 내가 돌아갈 날을 위하여 눈은 내리고, 이제는 더 올라가다 다시 내려와 마른 눈물처럼 인생은 그렇게 내가 돌아갔다가 돌아올 날이 노승의 독경소리 같아 진공묘유眞空妙有의 각으로 도달되고 있다. 그리하여 화자는 산사의 정적만이 노승의 무위처럼 우리의 인생도 다시 돌아올 기약 없는 눈처럼 내린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범박하게 호운 박항식의 생애와 작품을 살펴보았다. 그는 인간과 사물과의 교감을 통해 맑고 담백한 서정 미학을 펼친 신념의 시조시인이다. 따라서 모두가 평등하고 자유롭게 살아가며 현재와 미래가 하나 되는 순수직관의 세계를 희구했다. 더불어 그는 아내 강영진과 5남매가 엮은 가족동시집을 내는 등 가정에도 충실한 가장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 속에서 거침없이 쓰러졌던 지도자같이 제자 사랑도 지극했다. 호운의 시와 글을 모아 더 풍부한 연구가 이루어져 기쁨으로 출렁이길 바란다. /김명자 전라북도문학관 학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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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3.19 17:03

[전북문학관 지상강좌 - 한국문학의 메카, 전북] (19) 한국 현대문학 초창기 작가, 백주 김태수

생거부안에 솔씨 하나가 땅에 떨어져 그 자리에 뿌리 박고 자라나 그 나무 열매 맺고 노송이 되어 바람과 해와 달까지도 찾아와 같이 지내고 싶었던 백주, 그 노송을 찾고자 오늘을 손꼽아보다가 선은리 찬바람에 그 곁을 찾지 못하고, 山골짜기 접동새 울음 소리만 듣고 돌아서는 그날. 백주가 발자취를 남겼던 변산, 채석강, 내소사, 개암사, 울금산성, 매창, 반계 등을 생각하며, 그의 발길이 잦던 곳들을 바라본다. 지인의 소개로 어릴적 친구 신석정에게 보내는 편지가 석정 문학관에 있다는 말을 듣고 비로소 한평생 푸른 큰 솔밭을 이루고자 했던 백주 김태수를 만날 수 있었다. 백주 김태수(白洲 金泰秀, 1904~1982)는 부안에서 태어났다. 소설가이자 극작가인 그는 필명으로 진주태수를 썼다. 열한 살 때 부친이 별세하자, 사헌부 감찰을 지낸 조부 김방위가 훈육을 맡았다. 어린 시절은 서당과 읍내 공립보통학교를 다녔다. 이후 31 운동을 전후하여 나는 사람의 행복이나 생활이 저의 마음먹기와 용기에 달렸다라고 결심하여 서울로 가출하게 되었다. 그래서 할아버지가 심부름으로 맡긴 돈을 가지고 경성으로 올라가 수송동에 있던 사립중동학교私立中東學校에 들어갔다. 이후 백주는 1921년부터 1925년 기간에 작가로서 활동했다. 문예잡지 『개벽』에 희곡 「희생자」(1924)가 입선하였고, 그해 『동아일보』에 단편소설 「처녀시대」를 게재하고, 『개벽』, 『신민』, 『가면』 등의 잡지에 소설, 수필, 희곡, 시, 논설 등을 발표했다. 그러나 백주는 조부가 별세하자, 어머니를 따라 고향으로 낙향한 후, 집안 살림을 도맡았고, 1926년 정읍 출신인 송한순과 결혼하였다. 1920년대 말 그는 사회주의 사상에 몰입하여 동아일보사 부안지국 운영과 노동조합운동, 조선공산당 및 고려공산청년회 재건 사건으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뤘다. 이후 사업가로 변신한 백주는 운수사업, 백합 양식, 부안관광문화지, 매창문화제 등 부안 발전에 큰 업적을 남겼다. 특히 해방 후부터 육영사업에 전념한 그는 고모부인 춘헌 이영일을 도와 부안중고교를 설립에 기여했고, 낭주학회를 세워 부안여중고교를 설립하여 30년 동안 교육사업을 경영하였다. 유고집으로는 『황혼에 서서』(부안문화원, 2010)가 있다. 『황혼에 서서』는 백주의 문단 데뷔와 작품들을 그의 유족과 관계 전문가와 부안문화원에서 발간지원을 받아 출간된 작품집이다. 김하림은 「백주의 꿈과 사랑의 노래-조부님 문집 출판에 부쳐」에서 그이의 꿈은 어디까지 이르렀는지/ 아무도 짐작하기 어렵다./ 그이의 사랑이 얼마나 깊고/ 노래가 얼마만큼 울려 퍼졌는지/ 그 누구도 알지 못한다/ 다만/ 31, 815, 625, 419, 516, 1026 등/ 숫자로 점철된 긴 고비를/ 일찍 홀로 된 어머니를 모시며/ 문학을 꿈꾸고, 민족을 고뇌하고, 가정을 꾸리고,/ 고향을 사랑하고, 문화를 꽃피우고자 했던/ 그이의 안타까움과 애절함을/ 힐끗 혹은 묵묵히 보았을 뿐이다.라며 헌시를 바쳤다. 백주의 문학적인 유전자는 자녀들에게 전해졌다. 큰아들 민성이는 시인이 되었고, 작은아들 석성은 기자와 교육사업으로 활동하였다. 김석성 평전에서 석성은 아버지 백주白州 김태수편에 따르면 아버지는 1924년 이광수의 추천을 받아 『조선문단』에 「과부」로 등단하였다. 이광수는 백주군의 「과부」는 여자의 심리를 그린 것으로 우리 문단에 드문 작품으로 천재적 솜씨가 보인다. 실로 아름다운 작품이다라는 소설 선후평을 남겼다. 수필가며 약사인 딸 김초성은 아버지는 청년시절부터 집안의 가장이 되어야 했기에 현대문학의 길을 앞서 가려던 꿈을 못다 펼친 것을 아쉬워하신 분이다. 약관의 나이에 시작해서 삼사 년에 걸쳐 써낸 삼십여 편의 문학작품은 아버지께서 억눌린 봉건적 가풍 속에서 꿈을 펼쳐보려 발버둥 쳤음을 알려준다.며 추모의 글을 남겼다. 뿐만 아니라 문학평론가 오하근의 「어느 선각자의 도전과 좌절」에 따르면 백주 김태수는 문학사적으로는 1922년 『백조』 동인에 이어서 등단한 현대문학 초창기의 작가이다. 1920년대 신경향파의 관념적인 소설을 최초로 사실적인 소설로 전환시킨 작품을 남김으로써 우리가 마땅히 챙겨야 했을 잃어버린 작가이다.라며 한국 현대문학사에 전혀 언급이 없는 인물이라고 제시한다. 또한 1924년 『영대』 12월호에 백주의 작품이 제목조차 깎인 채 「전부 삭제」로 金素月의 시와 나란히 게재되어 있다. 이는 일제 검열의 실상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문학사를 비롯해서 누구도 인용하지 않고 있다며, 그의 작품을 발굴하여 제대로 평가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돌이켜보면 1924년부터 신경향파 문학이 등장하는데, 백주의 소설에서도 이러한 색채를 띤 신경향파 문학에 해당되는 작품을 발표한다. 「구두장이」는 시골서 올라온 구두장이와 어느 여관방에서 바이올린을 켜는 안경 쓴 학생과의 이야기이다. 하루종일 헤매고 다녀도 돈 한 푼 벌지 못하는 구두장이는 집에서 기다리고 있는 아내와 자식들을 생각하며 반드시 오 전을 받고 수선할 생각으로 학생의 자만과 인색한 짓을 참았다. 학생은 오 원짜리 돈을 내밀며 바꾸어 올 때까지 구두 짐을 맡기고 다녀오라 한다. 돈을 받아든 그는 오 원으로 선술집을 들러 고기를 사 먹으며 병든 아내와 굶주린 자식을 생각하며 돈만 있으면, 돈만 있으면, 돈! 하며 여관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위 작품에서 보듯이 구두장이의 심리적 변화의 내적 갈등으로 돈과 빈민층의 고통과 굴욕이 상징적으로 표상되고 있다. 「인도주의자와 자전거」에서 작중 화자 K는 빚을 받아서 고아원을 경영해 보겠다는 마음으로 자전거를 타며 인도주의에 대해 생각한다. 세상 사람이 다 같이 행복스럽게 한번 살아보지 못할까? 싸움도 없고 시기도 없이! 하는 도중에 그의 자전거가 봇짐을 진 노인을 치고 줄행랑을 놓았다. 얼마 후 그가 자전거에서 넘어져 사람 살리요, 사람 살리요.하며 부르짖지만 인도가 없는 세상이로군.하며 쓴웃음을 짓는다. 이 작품 역시 자신과의 갈등이다. 고아원 사업과 길에서 넘어짐, 곧 인도주의자인 체하는 인간의 허위성을 형상화하고 있다. 「살인미수범의 고백」은 탐욕스러운 부르주아 계급의 임교장과 아이들에게 새 나라를 세울 새 사람이라고 가르치는 K교사와 갈등을 문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어디를 가든지 아이들은 있다. 일시적 분노를 못 이겨서 갈 수는 없다며 참는 K와 대조로 나는 임교장을 죽이려는 살인미수를 한다. 이 작품은 참된 교육을 위해 노동자와 직접 학교를 지어가는 목적의식을 지니고 쓴 목적문학으로 여겨진다. 또한 백주의 희곡 「암야暗夜」는 동경에서 유학을 하고 있던 만수가 완고한 노조부 진사의 병환으로 귀향한다. 김 진사는 만수를 불러 집안 망할 놈이라 하며 담뱃대로 만수의 머리를 후린다. 만수는 피를 흘리며 어두운 밤에서 잠을 자고 있는 조선을 열어서 세계의 인류를 끄집어 낼 거라며 어머니와 두 여동생 붙잡는 걸 뿌리치고 집을 떠나는 내용이다. 이 시기의 희곡은 작중 화자의 자유의지를 통해 당대 현실을 부정하면서 새로운 세상을 희구하는 특성을 지닌다. 한편 백주는 4편의 시에서 이별에 대한 애절한 심상이 표출되고 있다. 이러한 정조는 할아버지와 가족의 죽음을 구체적으로 제시되고 있다. 사람아, 싸우며 사는 사람아. 기억해라 세상에는 이날이 있는 것을.(「어머니와 아들 부분」) 또 금슬 맺은 지 55년 아들 딸 육남매 길러 정도 들고 마음도 심었지.(「그대 가다 부분」 ) 등에서 외로움도 참고 허전함을 견디는 것을 자연에게 맡겨두고 말을까를 은유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상으로 살펴본 바, 백주는 삼십여 편의 문학작품과 고향 부안의 교육, 문화, 예술 사업을 위해 헌신하였다. 그는 일제 검열 제도의 희생자며 사회주의자이며 인도주의를 실천했다. 저 푸른 하늘에 변산이 높이 솟아 있고 그 서쪽엔 수평선, 동은 지평선 이만하면 살겠소이다./ 그날이 있기에 오늘이 있어 그 얼도 넋도 몽땅 이어받아 새 꿈 그리우니 이만하면 살겠소이다./ 감격에 일하고 은덕으로 잠도 자니/ 서로 믿고 도와서 이만하면 살겠소이다.(「그날이 있기에 오늘이 있어」) 라는 백주 김태수. 그의 생애와 문학은 유고집을 통해 다시 세상에 나왔으며, 후학자들에 의해 보다 적극적으로 평가될 필요가 있다. /김명자 전라북도문학관 학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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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3.05 15:45

[전북문학관 지상강좌 - 한국문학의 메카, 전북] (18) 한별 김완동, 전북 최초의 아동문학가

2019년 8월, 전라북도 문학관을 찾아온 사람이 있었다. 서울에서 사는 이들은 이곳에 전시된 아동문학가 김완동의 둘째 아들 부부였다. 아버지 김완동 작가에 대한 자료가 이곳에 전시되어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지내다가 소식을 알게 되어 전시관을 찾아온 것이다. 이후 그들이 다시 문학관을 방문하였을 때 『반딧불』책 한 권을 가져왔다. 오랜 세월의 흔적만큼 낡은 책표지는 테이프로 붙여져 있었고, 제목 위에는 한별 金完東 僎集이라고 씌여 있었다. 그분은 한 권밖에 없는 아버지 유품인 이 책을 문학관에 기증하였고, 그의 생애와 작품을 재조명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한별 김완동(1903-1965)은 전주서 출생하였다. 전주고등보통학교와 대구고등보통학교 사범과를 졸업한 이후 군산공립보통학교와 군산메리뽈딩여학교를 거쳐 전주신흥보통학교, 서천서림보통학교에서 교사로 지냈으며, 장항성봉심상학교 훈도와 순창교육구청 학무과장를 역임했다. 그리고 이서와 금암을 거쳐 왕궁과 옥정국교 교장으로 퇴임했다. 또한 전북노동청년연합회회지 「전북청년」과 「전북일보」 편집 고문, 그리고 「전북어린이신문」주간을 역임했다. 그의 문학활동을 살펴보면, 193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동화부 「구원의 나팔소리」가 입선되었고, 193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동화부 「약자의 승리」가 당선되었다. 논평에서는 新童話運動을 爲한 童話의 敎育的 考察-作家와 平家藷位에게와 語學會 敎育을 마치고 가 발표되었다. 이후 「동아일보」에 소년소설인「아버지를 따라서」가 3회에 걸쳐 연재되었으며, 사망 2년 후 1965년 5월 보광출판사에서 『한별 김완동선집』이 간행되었다. 이 유고집에는 전라북도지사와 전라북도교육위원회교육감이 동시에 펴내는 글로 여러 선생님 그리고 학부형들에게 이 자그마한 책자를 권한다.는 소감을 남겼다. 또한 유작품 출판회 출판 발기인를 보면 문교부장관, 북중동창회장, 동기동창대표, 전북대법과대학장 국방분과위원회, 고려제지사장 등이 참석하여 童謠 童話가 어린이 人格形成에 至大한 影響을 미친다는 것에 엮은 뜻을 밝히고 있다. 무릇 한별의 유고 선집 『반딧불』에는 동시 29편이 수록되어 있다. 이들은 주로 1930년 초에 발표되었는데, 그 가운데서「보름달」, 「반딧불」, 「아침새」 등의 11편은 김완동 작사, 김순용 작곡의 동요가 악보와 함께 실려 있다. 「동아일보」 발표작이 8편, 「전북어린이신문」발표작이 3편, 유작이 11편이다. 편수가 맞지 않은 것은 동시가 동요로 만들어진 편이 있기 때문이다. 짱아 짱아 고추짱아/ 괴밥 주께 일오너라/ 하늘높이 나르다가/ 재비에게 채이로다/ 또로신 또로신 또로신// 짱아짱아 고추짱아/ 내동생이 기다린다/ 숲사이로 날러가다/ 거미줄에 걸리리다/ 또로신 또로신 또로신.(「잠자리」, 전문) 위 동시는 44조 운율의 리듬과 시어의 반복성으로 경쾌함을 지니고 있다. 시적화자는 잠자리가 재비와 거미줄에 채이고 걸리는 상황을 또르르 또르르 또르르를 통해 은유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그의 동요는 노래(謠)로서 일제강점기 동시에서 출발했다. 이 시기의 동시는 75조 3음보의 외적 리듬을 견지한다. 김종헌에 따르면 이 시기 창작동요가 시어의 반복으로 음악성을 살리고 어린이들의 언어감각을 반영한 점, 그리고 조선어로 창작된 점 등은 민족의식을 일깨우기에 충분하다고 논평했다. 빤-짝/ 반딧불 아가씨들 어데갑니까?/ 밤이면 불켜들고 어데갑니까?// 빤-짝/ 빤-짝/ 반딧불 아가씨들 마중갑니다/ 공부방 도련님을 마중갑니다. (「반딧불」, 전문) 위 동시(동요)는 그의 표제작이다. 75조 율격으로 대구와 반복의 형식적 특징을 보이며, 또 빤-짝의 시간성과 어데갑니까?의 공간성의 관계에서 흥미로운 긴장감을 인지하고 있다. 그리하여 밤이면 불켜들고 공부방 도련님을 마중갑니다에서 보듯 의인화된 서정적인 이미지를 통해 따뜻한 정서를 표출한다. 훅꾼 고은향기, 마음가득 풍기여라/ 배달의 꽃봉오리, 귀엽게도 맺었구나/ 이강산 희망의 꽃이나니, 아름답게피어나라에서 살펴보듯이 그는 독특한 문학 형식인 시조를 통해 그의 작품세계를 확장하였다. 또한 실실히 휘느러진 수양버들 그늘아래 임께서 주신정을 그리며 애절한 감정을 묘사한다. 貴한님 고운節槪 松竹에나 비하리까 風霜에 않꺾이는 黃菊에나 비하리까 雪中梅 외로히피니 임이신가 하노라에서 「壽安의 노래」는 유일하게 제목이 있는 시조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동화의 요건에 대하여 동심동어가 충만할 것, 현실을 굳게 파악할 것, 내용의 목적이 정확할 것, 내용은 풍부하고 간명할 것 등으로 기준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동화의 교육적 고찰에서 살펴보면 동화는 아동의 사상문학이 될 것이며 아동이 요구하고 있는 진정한 예술이라고 불합리한 예술을 떠나서 이상적으로 추구하고 있는 참된 아동의 세상이라고 거론하였다. 이에 양재홍은 김완동, 독립운동과 애민문학에서 밝히듯이 김완동의 동화를 읽기 전에 알아야 할 점은 일제가 그를 훈도직에서 파면한 사건이라고 제시한다. 그 상황인즉, 김완동은 기독교를 믿으나 음흉한 수단에 불과하다. 그는 일찍이 신간회 및 조선 청년동맹을 조직하고 그 장으로서 활약하였다. 배일 사상이 농후한 그는 교원 자격에 부적당하여 파면한다.는 것이다. 이후 그의 자전적 체험을 통해 발표된 것이「아버지를 따라서」이다. 그 많은 사람 가운데 창룡이를 가장 귀해 하시든 담임 선생님의 얼굴이 보이자 창룡이는 급히 뛰어가서 단정히 절을 하고 나와주신 뜻을 감사하였다. 흔드는 손목들이 공간을 휘졌을 때, 황혼빛이 손에 어리었다. 마치 고기 비눌같이 반작거리는 손톱 그리고 또 손톱들! 그많은 손톱들이 창룡이의 가슴을 갈퀴고 있는듯 하였다. <그리운 고국의 산천이여! 그리고 사랑하든 친구들! 나의 스승님 안녕히 계십시오 또다시 만나볼 그 날까지!>. 이 작품은 日帝時 惡毒한 抑壓에 학교를 고만 둔 先生任을 아버지로 뫼시고 있는 昌龍君이 當時 살 수 없어 故國을 떠나게 되는 슬픈 光景을 짤막하게 그려낸 소년소설이다.라는 編者註가 있다. 주지하듯이 그는 1930년~1931년에 가장 많이 작품을 발표했으며, 특히 「동아일보」에「구원의 나팔소리가」발표 되었을 때, 長善明은 三大新聞을 중심으로 하는 新春童話槪評에서 이 작품은 자기개인적영락에만 도취되어 일반의 수난을 불원하는 비인간배를 경계한 작품이다. (생략) 그리고 표현양식과 사건전개와 모든 것이 퍽 능란하다. 여러 작가 중 대표할 만하다. 많이 써주기 바란다. 라는 평을 게재하고 있다. 오! 아버지! 왜 이렇게도 무참히 세상을 떠나셨습니까? 지금 아버지의 마음은 오히려 편하실 겁니다. 오! 아버지! 소자는, 이 세상 헛된 영화와 죄악의 향락을 피하여, 저 순량한 농민이 되어, 한 세상을 보내 겠아오니, 아버지이시여!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그후 왕자는 농촌에 들어가서, 아침 저녁으론, 그 구원의 나팔을 부르며, 나라의 행복을 축복하였고, 낮에는 땅을 파고, 밤에는 글을 읽었는데 온 백성들은, 구원의 나팔소리를 들을 때마다, 악한 마음을 버리고, 사랑을 이웃끼리 베풀어 가며,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며 편히 살아 갔습니다. 위 작품은 옛날 어느 나라 왕이 백성을 돌보지 않고 오직 자기 한몸의 평안한 것을 생각하며 백성들에게 까닭없이 세금을 받아들이는 백성의 공궁함을 알게 된 아들이 옥통수와 함께 백성의 구원과 애민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지금까지 범박하게 살펴본 김완동은 1930년대 전북 아동문학의 선구자다. 그의 『반딧불』문학세계는 친자연적인 소재를 통해 동심 언어가 풍부했다. 그러면서도 일제강점기적 현실에서 불의를 피력하였다. 교육자로서 평생을 지낸 그는 아동문학을 통해 휴머니즘 가치를 희구했다. 이몸이 살어살어 무엇이 될고하니 삼천리 금수강산 無窮花園 고히가꿔 香氣가 滿天地 할 제 내가 즐거하리라라고 말해주듯이 반딧불 향기처럼 살았던 그의 생애와 작품에 대한 연구는 더 치밀하고 면밀하게 고찰되어야 한다고 본다. /김명자 전라북도문학관 학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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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2.20 16:01

[전북문학관 지상강좌 - 한국문학의 메카, 전북] (17) 당시대 리얼리즘시의 최고봉, 야인 김창술

잠깐 외출하겠다고 집을 나섰다가 50년이 넘은 세월 동안 돌아오지 않으시는 가친의 시전집이 발간된다고 하니, 저희 못난 불효자식들은 생업에 종사하느라 가친의 행적을 되찾지 못한 지난 시절의 불효가 높아 보이고, 무심한 세월이 원망스럽기만 합니다.라며 유족들은 빛 바랜 사진 몇 장으로 그에 대한 추억을 회고하고 있다.(『김창술 시전집』에서) 야인 김창술(野人 金昌述1902-1953)은 전주 출신이다. 그는 1920년 『개벽』을 통해 「大道行」을 발표하여 등단하였고, 1920-30년도에 일제에 의한 국권침탈기에 민족해방을 위해 활약했던 시인이다. 또한 카프 회원이었으며, 1925년 『동아일보』 주최 신춘문예 「봄」이 입선되었지만, 그의 생애 동안 한 권의 시집도 출판하지 못했다. 1926년 『熱光』이라는 시집을 발간하려다 출판이 불허되었고, 1927년에는 유엽 김해강과 함께 전주시회을 조직하였다. 이후 1930년에 김해강과 77편의 시를 묶어 공동시집 『機關車』도 일제의 검열로 불허되었다. 유고시집으로는 『김창술 시전집』이 있다. 돌이켜 보건데 그는 전주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였고, 노동자시인도 아니었다. 전주 남부시장에서 순창상회라는 포목상을 운영하여 경제적으로 가난하지도 않았다. 해방후에도 이병기 신석정 등과 전북 문단의 재건에 힘을 기울였다. 이어 전쟁이 발발하여 고향을 떠나게 된 그는 서울로 거주지를 옮긴 후 1953년 11월에 집을 나간 뒤 돌아오지 않아 마지막 생애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무릇 한국현대문학사에서 김창술은 1920년대에 활동했던 경향파 시인 정도로만 알려져 왔다. 그에 대한 작품 언급은 몇몇 연구자를 제외하고는 한국현대문학사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장창영은 그가 문학사에서 주목받지 못하는 이유를 제시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그의 작품이 미학적 특질 때문이고, 작가로서의 전문성 결여를 든다. 그가 1920년대 주로 『조선일보』와 『개벽』 등의 시 작품을 발표했을 뿐, 그 외에 다른 매체에는 거의 작품을 발표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몇몇 카프계열의 시인들과 김해강을 제외한 다른 문인들과의 교류와 문단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지 않았다. 또한 그의 뿌리 깊은 자의식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고, 분단의 고착화에 따른 연구자들의 시각 편협성을 고찰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잊혀진 시인으로 김창술의 시세계를 다시 재조명하는 것은 각별한 의의를 갖는다. 이는 한국 현대문학사의 중요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리얼리즘시의 영역을 복원하는 것이며, 카프 시인들인 임화 박영희 김기진 등과 같은 리얼리즘계열의 시세계를 넓혀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김재홍은 여성적인 정조와 폐쇄적인 어둠의 분위기가 범람하던 1920년대 초기 시작 형성과 그 전개 과정에 있어서 낭만적인 기백과 낙관주의적 풍모를 보여줌으로써 우리 시의 한 변경을 개척한 것에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김창술 시선집. 더 나아가 최명표는 『김창술 시전집』에서 그는 자타가 공인하듯 1920-30년대 리얼리즘시의 한 국면을 고스란히 감당하였다. 따라서 그의 시세계에 대한 총체적인 접근이 이루어지지 않고서는, 근대 시문학에 대한 평가가 온전히 이루어질 수 없다. 그의 시작품을 통해서 당시 리얼리즘시의 경향과 한 시인의 당대 현실에 대한 치열한 시의식을 발견할 수 있다. 라며 시집을 엮은 이유를 밝히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1920년대 전기의 시 흐름은 세기말 사상과 31운동의 실패와 같은 시대적 상황으로 인한 주관주의와 감상주의로 빠져들었다, 이후 192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시들을 비판하는 경향이 등장하여, 현실 지향적인 시들이 등장했다. 이 시기의 김창술의 초기시는 주제 의식이 드러나지 않았고, 이들 작품에서는 낭만적인 감상성을 주축으로 한 내용으로 표출되고 있다. 예컨데 농촌과 자연의 풍경을 노래한 시 「芽亭에서」를 비롯하여 「水泡」, 「푸른하늘」, 「失題」 등에서 볼 수 있다. 그리하여 김창술은 시대적 현실 앞에서 현실을 체화하지 못했던 것이다. 1920년대 중반 이후 프로시에서 나타나는 촛불은 연약하고 애달픈 존재인 프롤레타리아의 존재와 동일시되어 표상된다. 이러한 그의 시 「촛불」에서 붉다란 불꼿이 심지를 들고/ 슬글슬금 타 기어오르니/ 그뜻이 무엇이뇨?/한말도 하지 못할 애처러운 몸으로 소멸되는 존재로 인지되고 있다. 자신이 촛불처럼 나약한 존재임을 인식하기 시작한다. 그 결과 현재의 고통을 잊을 수 있는 과거로의 회귀를 갈망하면서 향수에 젖는데, 이는 「성숙기의 마음」에서 드러나듯이 과거와 현재의 현실 상황에 대한 대비를 통해 애상적 관념을 형상화하고 있다. 나도 사람이외다/ 피와 살과 ᄲᅧ가가튼사람이외다/ 가트면왜?/ 平等이아니라해요/ 白丁놈이란무엇임나가/ 쌍놈이란무엇임닛ᄭᅡ/ 나도人格이잇서요!/ 個性도잇구요/ 나는反抗함니다 내 내生命ᄯᅢ문에// 올소이다! 白丁!/ 白丁이란내일흠이외다!/ 당신이부르든내일흠이구요/ 내肉體는ᄯᅥᆯ니엇지요/ 피는용소슴츠고요/ 마음쓰림은 내마음쓰림은/ 아! 나는 反抗하여요/ 絶對平等을부르지즈며/ 階級이라는 强盜를破滅식히기로(「反抗」, 『동아일보』, 1923) 위 작품은 그가 현실 세계를 변혁하고자 하는 의지로, 억압받는 삶에 대한 반발로부터 시작된다. 이러한 사실적 작품이 「反抗」이다. 이 시에서 시적 주체는 백정이다. 그가 백정을 내세우는 이유는 백정의 처지와 자신의 처지를 동일시하여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백정도 사람이고, 나도 사람이다는 전제를 통해 생명을 지닌 모든 인간은 다 평등하다는 핵심으로 귀결된다. 즉 피와 살과 ᄲᅧ가가튼사람과平等를 내세우면서 생명이라는 존재의식으로 천착된다. 이러한 평등의식은 시 「賣罰」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민중을 시적 주체로 내세워 전매로 야기된 갈등과 그로 인한 슬픔과 분노를 표현한 최초의 작품이다. 시적 주체인 농민들은 맘대로팔엇다고 잡혀가는이몸, 이제와서 묵겨가는이몸, 스무 하루 갇히게 된 이몸으로 감각적인 이미지로 나타나고 있다. 이는 농민과 식민지 지배자와의 관계, 즉 지배와 종속의 계급 관계가 가시화되고 있으며, 농민의 계급적 분노가 구체적으로 묘사된 작품이다. 이러한 주제를 담고 있는 시편은 「병아리의 꿈」, 「大道行」, 「간밤이 새여지다」 등이 있다. 이어 「앗을대로앗으라」에서 알ᄯᅳᆯ이 지어노흔 쌀은 누구에게 ᄯᅢ앗겻는가.라며 시적 주체의 격렬한 감정이 드러나며, 강박한 시대적 현실 앞에서 항변과 투쟁에 대한 행동이 사실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戰線으로」는 일제 강점기라는 당대 현실을 직시하면서 노동 현장과 노동자의 집단적 투쟁이 제시된 작품이다. 배가주리어 죽는 한이 잇드래도/ 한사람아 남은 순간ᄭᅡ지.처럼 이 시의 경우 신경향파 시의 시대가 끝나고 프로시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작품이다. 또한 「조선을차저서」에서 보여주듯 차라리발악을하자! 폭탄을안고서/ 이러한조선을찻고십다.라는 그의 강한 외침으로 잃어버린 땅에 대한 환멸과 이를 회복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분노의 감정이 표출되고 있다. 지금까지 그는 당대 현실 속에서 농민과 노동자의 현실을 직시하고, 낙관적인 미래를 전망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삶에 懷疑하는사람 어든밤에로가라에서 드러나듯 새시대를 향한 인젠새벽이로다 새벽이로다라고 생명의 노래를 부르는 그마음 굿세임이여처럼 자신의 마르크스즘 신념을 실천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시대 현실에 대한 저항의식과 초극의지로 민족의 화해 평등사상을 염원했다. 따라서 김창술 시는 상대적으로 소외받던 민중들의 삶과 정서를 바탕으로 당대 현실에 대하여 비판적인 시각의 확보를 시도함으로써 다른 카프 계열의 시인들과의 차별성을 모색했다는 의의를 가진다. 요컨대 그가 개인적 관심을 사회적 현실로 일치시킴으로써, 삶과 역사의 올바른 이념을 충실히 반영하여 당대의 리얼리즘 시의 중추적 역할을 하게 되었다. 온몸으로 시를 쓴 그는 반외세 민족해방의식과 반봉건 계급해방의식으로 당대 시세계관을 열었던 리얼리즘 시인이다. 아울러 그에 대한 문학사적 오류를 시정하여 전북지역 시문학 연구에 더 넓은 지평을 열 수 있기를 기대한다. /김명자 전라북도문학관 학예사

  • 문학·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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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2.06 16:17

[전북문학관 지상강좌 - 한국문학의 메카, 전북] (16) 화봉 유엽, 전북 문학의 토대 다지고 전주 변혁·문화운동 이끌어

화봉 유엽 벗이여! 가사이다!/ 이 검은 장막을 걷고 물껼 넘어 저 따로 건너가사이다!/ 벗이여! 및여 멋 가시겠거든/ 내가 먼저 오리다./ 기다릴 쑤 없이 급한 나의 마음은/ 벗이 나의 뒤로 곳 오실 줄 알고/ 나 먼저 가오리다. (...)// 밤새에 길우고 아끼던 살진 나의 팔, 다리를/이제야 이 바닥 우에서 마음껏 시험해보려렴니다./ 어이야! 이 나의 생명의 배는/ 빛을 실러 동녘을 행하여 저어감니다. 위 시는 유엽 「해 실러가는 나의 생명의 배」(『조선문단』),1927.2)의 부분이다. 이 작품에서 시적 화자는 검은 장막을 걷고서 해빛을 받아보려고라는 행위를 통해 새 희망에 대한 의미를 형상화한다. 또한 빛을 실러 동녘을 행하여에서 생명의 배로 저어가기 위해 밤새에 길우고 아끼던 살진 나의 팔, 다리를 시험해보렴니다 라며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 역동적 결의를 표출하고 있다. 전주 출신 유엽(柳葉,1902-1975)은 시인이자 소설가이며, 언론인이자 출판인이고 승려였다. 본명은 춘섭(春燮)이고, 엽(葉)은 필명이며, 법명은 화봉(華峯)이다. 1917년 전주 신흥학교를 졸업하고, 1923년 동경대진제가 일어나자 도일하지 않고 2년 만에 학교를 중퇴하였다. 1920년대 중반부터 여러 방면에 걸쳐 활발하게 활동을 했으며, 1923년 그의 시 「춘원행」이 『동명』을 통해 발표되었고, 1927년 금강산으로 출가한 이후 1975년 서울 법륜사에서 입적할 때까지 시 41편, 소설 7편, 동화 19편, 수필 48편, 평론 20편 등을 남겼다. 그 외에도 그의 행적은 1925년 경성 종로 기독교청년회관에서 노동부인위안음악회에 출연하여 「조선 노래」를 독창하였다. 1926년 전주공회당에서 열린 전주시회 주체 문예강연회에 참석해 생과 사에 대한 주제로 강연하였으며, 1945년 한국민주당 발기인으로, 1946년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의 문교부장으로 선출되었다. 1953년 해인대학 교수와 1954년에는 영남일보 주필로 활동하였으며, 제3대 국회의원총선거에서 출마하여 낙선하였다. 이러한 다양한 활동의 시기에서 당시 식민지 문단은 사회주의의 영향으로 계급문학이 성행할 때였다. 이 때 예술지상주의를 신념으로 삼은 유엽은 카프집단에 맞서 진실된 예술품은 예술지상주의적 정신에서 산출된 예술품을 일음이오 한 그러한 진실한 예술품이라야만 과연 우리 인생으로 하여금 구원(「나의 예술관초」)이라며 강한 주장을 내세웠다. 또한 말이 벌써 음률적으로 되어 가지고 모름지기 사람의 감정에 부합이 되도록 되어저야 되는 것이라며 그의 시론은 1930년대의 순수시 운동의 발판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의 초창기 예술 활동의 시작은 연극에서 비롯되었다. 1921년 3월 일본 와세다대학에 재학 중 김우진, 최승일, 조명희 등 일본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극예술협회를 조직하였고, 그해 7월 조명희의 원작 「김영일의 사」에서 주연 배우로 김영일 역을 맡아서 극예술협회 회원들과 전국을 순회하며 공연하였다. 그리고 신인 발굴과 후배 문인들을 지원하였으며, 음악에도 관심이 많아 외국 곡의 가사도 번역하였다. 그리하여 한국연극사의 첫머리를 장식한 인물인 동시에 전라북도 연극운동의 창시자가 되었다. 이러한 문단 활동을 시작할 무렵, 1923년 11월 한국 최초의 전문지 『금성』을 창간하게 된 것이다. 동인은 손진태, 양주동, 백기만 등이었다. 여기서 그는 『금성』의 발간 자금을 조달을 비롯하여, 편집과 출판, 당국의 검열 그리고 신인 추천 문제 등을 담당하는 노력을 하였다. 그러나 지금까지 학계에서는 『금성』의 주재자는 양주동으로 단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 때 유엽은 가친 상을 당해 전주로 내려 왔을 때 양주동은 자신의 이름을 편집인으로 내고 일본으로 건너가 버렸다. 그래서 『금성』의 편집인이 바뀌고 발행마저 중지된 것이다. 따라서 『금성』의 편집과 발간을 주재한 유엽의 역할에 대한 기존 서술 내용과 문학사적 왜곡은 시정되어야 할 문제이다. 一千九百二十三年/ 地殼이얼기始作하든첫날/ 내집에 오는길電車에서 나는/ 매우 沈着한 少女를 맛낫서라/ 초생달갓흔그의두눈섭은/ 가장아름다워 그린듯하고/葡萄酒빅삿흔그의입술은/ 달콤하게도 붉엇섯다/ 그러나 도럄직하고 귀여운 그얼골에는/ 맛지안은 근심빗이도라잇고/ 웬섬인지힘을일코 보는 두눈가에는/ 桃紅色의어림빗이 도라라. 위 작품은 유엽의 시 「少女의 죽엄」(『금성』제2호, 1924.1)의 일부분이다. 여기에서 한국 현대문학사는 김동환의 『국경의 밤』(1925)을 최초의 서사시로 기술하고 있다. 그의 작품은 이보다 앞서는 것으로, 한국 근대 서사시의 효시를 이르는 작품이며, 3부 34연 142행에 이르는 장시이다. 최명표의 「범애주의자와 시론」 논문에 의하면 이 시는 근대적 비극의 표지로서 소녀의 죽엄을 문제시하고 있다. 따라서 시적 화자는 필연적 사건의 결과로 인해 소녀가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통해 그男子의 완력과 사회의 폭력성을 상징적으로 제시한다고 고찰하고 있다. 또한 그의 시 「落葉노래」에서 가을밤 구으는 落葉 소래는을 통해 개인의 정서가 묘사되고 있다. 「겨울밤의 哄笑」의 시는 빗없는 골방의 고립에서 새로이며노흔골방으로부터 다른 삶으로의 몽상을 꿈꾸기도 했던 것이다. 마침내 그는 「感傷의 斷片」의 작품에서 어린애의 얼굴의 웃음처럼 생명의식에 대한 노래를 통해 범애주의적 신념을 펼친 것이다. 그의 문학 활동은 1931년 2월 자가본 시집 『임께서 나를 부르시니』를 간행하고 출판 했지만 원본은 찾을 길이 없다. 1939년 장편소설 『꿈은 아니언만』을 고려사에서 발행한 후, 1953년 이 소설은 덕홍서림에서 재간행되었다. 또한 1962년 『華峯譫語』과 『無低船』이 발행되었고, 1971년에는 불교의 난해한 『대승기신론소』 등을 순한글로 해설한 『멋으로 가는 길』이 발행되었다. 그의 소설 『꿈은 아니언만』은 변화영의 「유엽의 자전적 소설에 나타난 사랑의 의미」 논문을 통해 연애의 서사의 장소는 전주와 동경 간의 대립적 공간을 통해 하나의 담론을 형성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이 소설의 내용에서 동경은 연애가 탐닉의 대상이자 사업의 일환으로 변질된 곳이고, 조선인에게는 식민성 재생산의 텅 빈 공간일 뿐이다. 전주는 민족 공동체 조선의 발상지라는 점을 사회적으로 환시하고 있으며. 존재의 근간이자 세계의 중심은 전주로, 그가 전주라는 장소에서 흔적에 주목하였다.고 논하고 있다. 또한 그는 평론을 자주 집필하였다. 그 중 『詩와 萬有』에서 詩를 쓰는 벗님들에게 詩는 모든 것의 極致올시다. 宗敎, 道德, 法律, 이 모든 것의 우에 잇습니다. 詩人은 豫言者외다. 自然의 深奧한 妙理와 宇宙의 眞理를 天眞爛漫하게 노래하는 者외다.라는 글로 시인이 되는 자질을 언급한 바 있다. 그리고 화봉스님은 『華峰柳葉』에서 선은 멋이다. 살림살이이다. 이 누리로 더불어 한 풀이 되어 멋지게 어울려 살아가는 노릇이다.며 禪을 멋에 빗대어 표현하고 있다. 유엽은 여러 분야에서 왕성하게 활동하여 큰 족적을 남겼다. 그 중에서 그의 공은 놀라울 만큼 크고 넓다. 그 중에서 만해 한용운과의 특별한 인연에 힘입어 괄목할만한 불사를 일으켰다. 유엽이 한용운이 주재한 잡지 『불교』 의 발간을 도운 것이나, 불교 청년운동과 종단 정화 사업 등에 앞장선 것, 일제 말기에 아나키즘운동에 가담한 것 등은 순전히 한용운의 영향이다. 유엽이 특히 힘쓴 분야는 불교대중화운동이었다. 그의 글쓰기는 대중불사를 일으키려는 의지의 표현이고, 난해한 불경들을 순한글로 풀어 옮긴 것도 그것의 실천이었다. (『유엽문학전집Ⅰ』) 지금, 전남 송광사 유엽의 「행장비」에는 스님께서는 色相이 端嚴하고 辯才가 出衆하시며 마음이 너그러워 좋은 일이나 언잖은 일이나 一切 執着하지 안았고 무슨 일이든지 責任을 지면 勇氣로 臨하였고 因緣이 다하면 果敢하게 물러나셨다. 慈悲는 봄바람 같고 威嚴은 秋霜같았다. 라고 적혀 있다. 한 평생 문학과 예술, 불교에 전 생애를 바친 삶에 대한 재조명이 필요하다. 아울러 그에 대한 문학사적 평가가 하루속히 착수되어 전북지역 문학연구를 통해 전작품을 발굴하여 소개하는 기회가 오길 기대한다. 오날부터/ 새해라는데/ 때마츰/ 눈이나리네/ 고요히 밝는/ 이 따우에/ 깨끗한/ 눈을 나리네/ 어나듯 이몸도 눈이 되었나/ 고요히 이따우에/ 눈이 나리네. /김명자 전라북도문학관 학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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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1.16 16:39
문화섹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