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 2025-11-06 16:14 (Thu)
로그인
phone_iphone 모바일 웹
위로가기 버튼

[카드뉴스] 수달에 막힌 전주시 교통체증

  • 기획
  • 디지털뉴스팀
  • 2019.10.28 11:08

[카드뉴스] 익산 천만송이 국화축제

  • 기획
  • 디지털뉴스팀
  • 2019.10.28 11:01

[위병기 논설위원이 만난 사람] 4. 의사 출신 국내 첫 소믈리에 송호석 씨

지방 중소도시에서도 요즘엔 크고작은 와인 바를 종종 볼 수 있다. 예전엔 부자들만 마시는 고급술이란 이미지가 강했으나 차츰 대중에게 널리 전파되고 있다. 사실 와인은 외국 술이다. 외국의 문화와 정서가 녹아 있는 술이고 그들의 음식과 맞는 술이다. 그런데 최근들어 크고작은 와인 동호회도 많이 만들어지고 있다. 여전히 서민에겐 좀 접근하기 어려운 술임엔 틀림이 없으나 한번쯤 접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듯 하다. 때마침 와인 전도사로 유명한 의사 출신 국내 첫 소믈리에 송호석 박사가 전북인 이라는 말을 듣고 그를 한번 만나봤다. 인터뷰는 지난 15일 전주의 한 커피숍에서 진행됐다. 송호석(55) 한국 국제소믈리에협회 고문은 익산 여산이 고향이다. 일반외과 전문의인 그는 서울 은평에서 작은 병원을 운영하고 있다. 한림대 의대 외래교수, 성균관대 의대 외래 부교수인 그는 마스터 소믈리에로서 경희대성신여대 등에서 와인강사도 오래 지냈다. 전주 동북초, 해성중, 영생고를 거쳐 원광대 의대에 진학하면서 의사의 꿈을 키웠다. 수술을 주로 하는 외과를 전공한 것은 무엇보다도 가부가 확실히 결론나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 때문이었다. 남부럽지 않게 살았고, 특히 평소 술을 좋아했던 그는 원광대 의대에 진학할때만 해도 세상은 늘 행복으로 가득찬 것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그런데 본과 1학년때 초등교사였던 아버지가 갑자기 심장마비로 별세하고, 6개월 후 어머니마저 뇌출혈로 쓰러지면서 생각지도 않은 시련과 직면하게 된다. 4형제중 장남으로서 중학교에 다니는 어린 막내동생까지 보살피는 등 가장 역할을 해야했기 때문이다. 갑작스런 고난에 마주친 그가 어려운 현실을 돌파하기 위해 선택한 것은 술을 끊고 교회에 다니면서 종교에 깊게 빠져들었고, 또 한편으론 의료 선교사를 목표로 뛰게된다. 마침내 대학 졸업후 그는 서울 강동성심병원에서 인턴과 레지던트 과정을 밟게 되는데 외과 입국식에서의 작은 사건이 또 인생을 바꾸게 된다. 외과는 군기가 세기로 유명한데 교수, 선배 전문의, 간호사 등이 총 집결한 가운데 진행되던 입국식에서 그는 맥주컵에 가득 따라주던 선배의 술잔을 받지 않고 엎어버린다. 저는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당시로선 건방지기 짝이 없었으나 어느 누구도 관행을 거부하지 못하던 시절 그의 특이한 행동은 훗날 의료계에 많은 우군을 만들게 된다. 그런데 30대 후반의 나이에 서울 은평에 개업한 그는 숱한 어려움에 직면해서인지는 몰라도 혈압이 올라가는 등 건강을 잃게 됐다고 한다. 심장병으로 돌아가신 아버지와 뇌출혈로 쓰러지진 어머니로 인해 프렌치 패러독스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그는 자신마저 젊은 나이에 건강에 이상이 생기자 와인에 큰 관심을 갖게된다.프렌치 패러독스(French Paradox)란 육류 위주의 고지방 식사를 하는 프랑스인의 심장병 발병률이 이유 없이 현저하게 낮은 현상을 말한다. 우리나라에서도 IMF 직전, 프렌치 패러독스가 소개되면서 와인 붐이 일었는데, 그 후 경기침체와 막걸리 열풍에 밀려 다소 주춤하다가 다시 꾸준히 와인 소비량이 늘고 있다. 때마침 국내에서도 와인 붐이 일자 그는 보다 전문적으로 와인을 배우기로 하고 관련 서적을 읽는데 그치지 않고 본격적으로 소믈리에 자격증을 따게된다. 덕성여대, 경희대, 건국대 등에서 강의를 하게 되면서 그는 와인을 단순히 취미 수준에 머물지 않고 의학적으로도 관심있게 연구하기 시작했다. △우선 의사이자 와인 전문가로 활동하면서 내린 결론이 궁금합니다. 저는 그동안 와인을 좋아하는 의사로서 와인과 건강에 대해 강의를 참 많이 했습니다. 강의 말미에 늘 하는 말은 와인도 술이니 절대 과음 하지 말라고 합니다. 와인이 건강에 좋은 술이라도 취하게 마시면 그 폐해는 다른 술과 다르지 않습니다. 과유불급이라고 할까요. 제아무리 좋은 술도 과하면 독이 된다는 점을 늘 강조하고 있습니다. 의학적 측면에서 와인으로 효과를 보려면 하루에 몇병씩 마실만큼 많은 양을 섭취해야 하는데 그것은 오히려 건강을 해칩니다. 다만 십수년간 술을 단 한모금도 마시지 않다가 원만한 사회활동을 위해 와인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대인관계를 원활하게 하는 것 자체가 정신건강은 물론, 신체건강에 도움이 되죠. 와이너리 투어를 통해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환경을 접하는 것이야말로 삶의 또다른 기쁨입니다. 와인은 술이기도 하지만 하나의 예술입니다.좋은 음식과 품위있는 와인이 필수이나 분명한 것은 누구랑 마시는가 하는 것입니다.그게 바로 3위일체죠 △서민들에겐 여전히 와인이 좀 멀게 느껴지는데 생활속에서 좀 가깝게 다가설 수 있는 방안이 있을까요. 와인을 너무 어렵게 생각 하지 말자, 배우려 하지 말고 즐기자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꼭 비싼 와인만이 유명한 와인이라는 고정관념을 버려야 합니다. 하늘에 떠 있는 별처럼 수많은 와인이 있고, 가격도 천차만별이지요. 많은 와인 중에서 자기에게 맞는 저렴한 것을 찾아가는 게 와인의 진미를 아는 첫걸음이 아닐까요. 사실 와인은 하나의 매개일뿐이구요, 이를 통해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서 다양한 대화를 할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술을 전혀 하지 않다가 와인을 마시면서 느낀 점은 무엇입니까. 와인을 통해 알게 된 많은 사회 선후배를 갖게돼 대인관계의 폭도 넓어졌고, 전에는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잘 이해하지 못했으나 지금은 잘 이해할 수 있어서 병원에 오시는 술 좋아하는 환자분들과도 충분히 교감하는게 무척 큰 기쁨이죠 △의사로서 술, 그중에서도 와인이 건강에 어떤 역할을 한다고 보십니까 인류가 술을 마시기 시작한 것은 약 1만년 전부터라고 합니다. 그후 수많은 사람들이 술을 즐겼고 다양한 종류의 술이 개발됐고, 지방마다 고유의 술이 발달되어 왔습니다. 와인도 마찬가지죠. 유럽연합의 조사에 의하면 18세이상 성인 남성의 90% 이상,여성의 80%이상이 술을 마십니다. 우리나라도 술 소비량이 많은 나라중 하나죠. 그런데 회식문화 중심의 술 권하는 우리 사회는 장점도 많지만 건강을 잃거나 패가망신한 사람이 수없이 많습니다. 와인이 꼭 정답은 아니자만 소믈리에로서 이러한 술문화에 하나의 대안으로 와인을 꼽고 싶습니다. 물론 의학적으로는 과연 와인의 성분들이 얼마나 유의미한 효과를 발휘 할지는 의문이나 취하려 마시지 말고 즐기는 술 문화를 만드는 것은 꼭 강조하고 싶습니다.

  • 기획
  • 위병기
  • 2019.08.21 20:12

[위병기 논설위원이 만난 사람] 3. 대한태권도협회 최창신 회장 "전북 문화예술, 무주 태권도원과 접목…찾고 싶은 곳 만들어야"

태권도의 세계화대중화가 화두로 떠올랐다.K-Pop이 칼 군무, 미소년 등의 공식으로 해외에 많이 알려진 것처럼, 현재까지 태권도 하면, 품새나 올림픽경기 정식종목 등 외연적인 모습의 태권도가 많이 강조됐는데 국제화, 세계화를 위해서는 엄청난 혁신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특히 태권도인들의 성지인 무주 태권도원을 품고있는 전북은 지난 2017년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를 성공리에 치르는 등 이룬 성과도 크지만 앞으로 가야 할 길이 너무나 멀다. 전 세계적으로 태권도 인구는 8000만 명 이상이 넘는다. 또한 세계태권도연맹(WTF)에는 200개가 넘은 국가가 가맹돼 있어 글로벌 무예로 크게 성장했다. 하지만 질적인 측면에서는 문제가 많다. 우선 재미가 없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1년 365일 국내 어디에선가 거의 매일 태권도대회가 열리고 있으나 일반인들의 눈을 확 끌지 못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태권도 세계화는 어쩌면 단순히 체육인 몇명의 관심사가 아닌 국가적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이 시점에서 벤치마킹할 수 있는 좋은 사례가 있다. 바로 전 세계를 달구고 있는 방탄소년단이다. 약 6년 전 2013년 6월, 한국에서 7인조 보이그룹인 방탄소년단(BTS)이 데뷔를 했다. 누구도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런데 지금 방탄소년단(BTS)은 이제 단순한 7인조 보이그룹이 아닌, 전 세계에 영향력을 미치는 글로벌 스타로 발돋움했다. 한글 그룹명 방탄소년단 보다는 영문그룹명 BTS가 더 자연스럽다. 지난해 6월 문화체육관광부는 태권도 4개 단체와 함께 태권도 미래 발전전략과 정책과제를 발표했다. 비전으로는 태권도로 열어가는 건강한 세상, 행복한 대한민국을 설정하고, 정책목표로 태권도 저변 확대, 태권도 산업생태계 조성, 태권도의 위상과 정체성 확립, 태권도 글로벌 리더십 강화, 태권도 지원체계 혁신 등을 표방했다. 이를 이루려면 태권도인들 뿐 아니라 자치단체 차원에서도 보다 면밀하게 준비하고 추진해야 할 것들이 많다. 이런가운데 때마침 도내에서 열린 태권도대회 참관차 전주를 방문한 익산 출신 최창신(74) 대한태권도협회장과 두시간 남짓 인터뷰를 했다. 지난 16일 전주에서 만난 최 회장으로부터 태권도 관련 각종 현안 문제에 대해 들어봤다. △무주 태권도원에서 8월 31일부터 2019 태권도 문화 페스티벌이 열립니다. 태권도진흥재단은 이번 페스티벌을 태권 레볼루션, 태권 배틀 킥 잇, 킹 오브 더 팀 세 부문으로 개최하는데요, 태권도가 이젠 단순히 겨루기나 격파에 그치지 않는 것 같애요. 맞습니다. 각종 대회를 참관하면서 많은 태권도인들로부터 듣는 얘기가 재미가 없다는 겁니다. 스릴과 박진감이 넘치고 뭐 좀 볼만하게 만들어줄 수 없느냐는 것이죠. 그런 차원에서 태권도 문화 페스티벌은 발레, 사물놀이, 비보잉, 체조 등 다양한 분야와 태권도를 결합한 형태의 공연 및 작품으로 선보인다는 점에서 특이하죠. 또한 연속 공중회전과 서커스에 가까운 발차기 기술들이 결합한 태권도 고난도 트릭킹 기술 경연 등도 볼만 합니다. 무엇보다도 격파는 청중들이 재미있게 볼 수 있습니다. 대회마다 컨셉이 다른데요, 보고 싶은 축제형 경연 프로그램을 통해 태권도 수련생이나 도장은 물론, 일반인들의 참여폭이 커지면 좋겠습니다. 지난 13일부터 4일간 전주화산체육관에서 열린 2019 전주오픈국제태권대회의 경우 2400여 명의 태권 고수들이 출전해 자웅을 겨루기도 했습니다. 품새를 비롯해서 여러가지 다양한 대회를 통해 태권도 대중화에 나서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세계태권도인들의 메카라고 하는 무주 태권도원은 전북 도민들의 큰 자랑인데 그 기능과 역할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어요. 태권도원(跆拳道園)은 2014년 4월 무주 설천에 개관한 태권도의 체험 및 수련과 연구를 위한 태권도 관련 시설인데 재단법인 태권도진흥재단이 운영하지 않습니까. 2013년 8월 준공됐는데 도전의 장인 체험공간, 도약의 장인 수련공간, 도달의 장인 상징공간 등의 3개의 주요 주제 공간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현재 이사장께서 잘 운영중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문제는 태권도원의 역할을 정확히 정립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태권도원은 호텔도 아니고, 경기장만도 아닙니다. 경기장과 연수를 겸한다고 할까요. 교통애로 해소를 하지 않는 한 안됩니다. 태권도인들은 물론, 전북 도지사를 비롯한 지역 리더들이 모두 청소하는 심정으로 태권도원에 대해 애정을 가져야만 합니다. 전주와 태권도원을 어떻게 접목시킬 것인지 고민도 필요합니다. △크고작은 대회가 전국적으로 많이 열리는데 상대적으로 전북이 태권도의 메카로서 자리매김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태권도가 재미있고 또 한편으론 마케팅에도 눈을 떠야 합니다. 지금하는 형식의 대회는 1000개를 해도 큰 이목을 끌지 못합니다. 형식을 과감하게 바꾸는 것도 필요합니다. 오랫동안 무관심했던 전주 한옥마을이 어느날 대박났는데 거기에서 힌트를 얻어도 될 것 같습니다. 오래전부터 전북은 태권도에 관한 한 최고의 선진지였습니다. 1963년도 태권도 국가대표 제도가 처음 생겼는데 이승완, 황대진, 유기대, 유형환 등 한국을 대표하는 이들이 모두 전북 출신 태권도인입니다. 충분히 자부심을 가질만하죠. 그런데 이젠 시대가 변했고, 전북의 위상도 많이 약화된게 사실입니다. 문화와 예술을 태권도에 접목시키는 노력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한쪽에선 국기원의 전북이전을 이야기하는데 그동안 많은 논란이 있는게 사실입니다. 중요한 것은 전주나 무주가 찾고싶은 곳이 돼야 합니다. 만일 태권도와 어떤 것을 접목시킨다면 더욱 좋을 것입니다. △전국단위 경기단체장 중 전북 출신으로 가장 돋보이는데 태권도와 인연을 맺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저는 고향이 익산인데요, 전주 중앙초, 전주 북중을 거쳐 경기고에 진학했습니다. 할아버지는 황등역장을 지내셨고, 아버지(최도철)는 전주고 교장을 지내셨습니다. 저는 전주북중 2학년때 핸드볼을 했는데 그게 결국 체육계와 깊은 인연으로 연결 됐습니다. 경기고 시절 태권도에 심취해 무척 열심히 했구요, 고려대 영문과에 다닐때는 전국단위 신인 선수권대회에 출전해 금메달을 따기도 했습니다. 한때 태극마크를 달고 일본에도 다녀온 태권도 선수 출신입니다.(웃음) 서울신문사 기자로 12년간 활동했구요, 86 아시안게임, 88올림픽을 앞두고 1982년 체육부가 신설됐는데 당시 노태우장관때 저는 국장급인 공보관으로 관료의 길을 걷게됐습니다.체육부 대변인지도국장, 문화체육부 차관보를 거친뒤 대한축구협회 부회장, 2002 한-일월드컵 사무총장, 대한체육회 이사, 태권도신문 고문, 국기원 이사, 서울FC유나이티드 회장을 역임했습니다. 올림픽 성공을 위해 불철주야 뛰던 시절이 주마등처럼 스칩니다. 정말 제 삶의 궤적에서 정말 바쁘고 보람된 나날이었습니다. 문체부 차관보 등을 거친뒤 꿈에도 그리던 월드컵조직위 사무총장을 맡게됐습니다. 올림픽과 월드컵을 거치면서 우리나라는 확고하게 선진국 반열에 들어섰다고 생각합니다. 한일 월드컵때 대회가 끝나면 세계에서 가장 좋은 축구장 10개가 한국에 있게 될 것이다고 제가 호언장담을 했는데요, 실제로 그렇게 됐습니다. 전주월드컵경기장은 문화예술의 도시 이미지를 잘 형상화했는데요, 한가지 아쉬움은 당초 우려했던대로 주차장이 잘못된게 아닌가 합니다.

  • 기획
  • 위병기
  • 2019.07.24 19:48

[위병기 논설위원이 만난 사람] 2. 공익 활동 앞장서 온 이홍훈 전 대법관 "전북 더 발전하려면 지도자들 낮은 곳 바라보며 헌신해야"

국내 대형로펌 중 매출액 순위 6위권에 해당하는 법무법인 (유)화우는 최근 화우공익재단 초대 이사장을 지냈던 고창 출신 이홍훈 전 대법관(73)의 재직을 기념하는 첫 공익논집을 발간했다. 우주일화(宇宙一花)라고 이름지은 이 공익논집은 국내 법조인 중 대표적으로 공익 활동에 앞장서 온 이홍훈 전 대법관의 삶과 인생 철학을 가장 잘 보여준다. 법조비리 등으로 인해 전 대법원장이 구속되는 등 초유의 파동속에서도 법조계 안팎에서 그는 요즘 더 많은 존경을 받는다. 주말이면 그는 고향인 고창 흥덕에서 생활하면서 후학들에게 특강을 하는 등 평생의 노하우를 전수하고 있다. 지난 21일 고창 석정온천에 있는 한 식당에서 그를 2시간 가량 만나 삶의 궤적을 들어봤다. △요즘 근황은 어떠십니까. 법무법인 화우 고문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는데요, 화우공익재단 고문, 대법원 사법발전위원회 위원장, 평화 법제포럼 대표 등을 맡으면서도 서울 강남에 있는 화우에서 주 3일가량 보내고요, 금요일부터 월요일까지 4일은 제 고향인 흥덕 신송리에서 아내와 꽃이나 나무를 가꾸면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주4일 고향에 머물기에 농담으로 주사파(週四派)라고나 할까요.(하하) 8년전부터 고향을 오가며 생활하고 있는데 인재양성이 중요하기 때문에 고향 젊은이들의 꿈을 키워주는데 힘을 보태고 싶습니다. 얼마전 고창북중에서 학생들을 상대로 특강을 했는데 주로 나 아닌 공동체의 행복한 삶을 주제로 얘기를 나눴습니다. △현 정부 출범 후 대법원 사법발전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셨는데 요즘 사법농단 등 여러가지를 보면서 느낌이 크게 다를 것 같습니다. 전직 대법원장이 구속되고 대법관 2명이 조사받는 상황을 보면서 법조인의 한사람으로서 무척 마음 아픕니다. 국민들은 오랫동안 재판권 독립이 훼손됐다고 보고 있고요, 누적된 폐해에 대해 국민불신이 분출한 것이 사법농단 사태의 본질이라고 봅니다. 안타깝지만 우리 사회가 성숙하려면 정의롭지 못한 재판에 대해 한번은 거쳐야 할 과정으로 보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법관은 체제 보호를 위한 역할을 오랫동안 해왔는데 솔직히 시대적 한계가 있다고는 하지만 국민의 기본권 보장을 제대로 하지 못한 측면이 많습니다. 대다수 변호사들 또한 돈이 되는 개별사건에만 관심을 가졌던게 사실이구요, 이젠 법조계가 크게 달라져야 한다는 시대적 사명이 분출된 것으로 이해합니다.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가인 김병로(순창), 서울 고검장을 역임한 화강 최대교(익산), 서울 고등법원장을 지낸 사도 김홍섭 선생(김제) 등 법조 3성을 배출한 고장임에도 그동안 전북 출신 법조인이 별로 많지 않았어요. 전북 출신 역대 대법관중 현재 생존해 있는 사람은 헌재소장을 지냈던 이강국, 윤영철(가인 손녀사위)을 비롯해 김지형, 김선수, 김재형, 그리고 저까지 6명으로 기억됩니다.광복직후에는 호남 차별이 별로 없었는데 산업화 시대를 거치면서 무척 심화됐지요. 법조 영역에서도 앞으로는 지역균형발전에 기반한 인재 육성을 해야만 결국 국가 경쟁력도 강화할 수 있기 때문에 더 많은 전북출신 법조인이 나올 것으로 기대합니다. 전주 만성동에 새롭게 법조타운을 조성해 올 연말에 법원과 검찰이 이전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를 계기로 도내 법조인들도 시민들에게 자기 역할을 제대로 하는 모습을 보여줬으면 합니다. △학창 시절부터 줄곧 엘리트 코스를 밟으셨는데 나만 못한 주위의 어려운 이를 되돌아보고 공익활동에 관심을 갖게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서울대 법대에 다닐때 우연히 신문에서 경기고 재학생중 가정 형편 때문에 등록금을 못낸다는 기사를 보고 시골에 계시는 아버님께 쌀 한가마니 정도 되는 등록금 좀 해주시면 어떻겠느냐고 말씀드려 도운게 제 삶의 궤적을 바꾼 것 같습니다. 저도 판사 발령받은뒤 박봉에 자녀가 4명이나 되다보니까 생활이 어려워 사표를 낸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경제적으로 어렵다고 해서 법관을 그만두면 결국 인권보장이라는 목적도 달성할 수 없게되기에 참고 이 자리까지 온 거지요. 학창 시절 친구인 조영래 변호사를 가까이 지켜보면서 제대로 된 재판을 해야겠다는 각오를 수없이 했습니다. 황인철, 홍성우, 이돈명 변호사 등 인권변호사들의 헌신이 있었기에 오늘날 이만큼의 법치 실현도 가능했다고 봅니다. △경쟁이 치열한 우리사회에서는 공익을 돌아보는게 배부른 이의 사치에 가깝게 여기는 풍토가 있습니다. 시간이 없다, 돈이 없다는 일종의 핑계에 불과합니다. 가진게 없지만 짬을 내서 자원봉사 하는건 돈으로 하는 것보다 훨씬 값진 거죠. 월급 30만원 받았던 김수환 추기경 다른사람 선물 사고 나면 10원도 안남았다고 합니다. 능력있는 사람이 지도자가 되는것은 너무 당연합니다. 하지만 그 능력을 자신만을 위해 쓰면 안됩니다. 모두가 하나라는 인식에서 출발해야 우리 모두가 행복할 수 있습니다. 전북이 앞으로 더 살기좋은 고장이 되려면 좀 있는 사람이나 지도자들이 혼자 잘 먹고쓰는데만 신경쓰지 말고 더 낮은 곳을 바라보며 헌신해야 합니다. ● 이홍훈 전 대법관은 고창군 흥덕면 신송리가 고향인 이홍훈 전 대법관은 흥덕초, 전주북중, 경기고, 서울법대를 졸업했다. 1977년 서울 영등포지원에서 판사로 시작해 수도권 주요 보직을 거친뒤 제주수원서울중앙지방법원장을 지냈다. 2006년부터 6년간 대법관을 지낸 그는 한양대, 전북대에서 석좌교수로 활동했으며 삼수회 회장도 역임했다. 법무법인(유)화우 공익위원회 위원장, 법조윤리협의회 위원장, 화우공익재단 이사장, 한국신문윤리위원장, 서울대 법인이사장, 대법원 사법발전위원장, 화우 고문변호사 등으로 활동했다. 화우공익재단 초대 이사장을 맡아 국내 법조계에 체계적인공익의 개념을 뿌리내리는데 크게 기여했다.

  • 기획
  • 위병기
  • 2019.06.26 18:38

[위병기 논설위원이 만난 사람] 1. 이치백 전 전북향토문화연구회장 “전북인 긍지 잃지 않고 과감히 자립하려는 마음가짐과 행동 뒤따라야”

흔히 나이 70을 일컬어 고희(古稀)라고 한다. 사람은 예로부터 70세까지 살기가 드문 일이라는 뜻이다. 100세 시대인 요즘엔 70년의 세월이 적게 느껴질지 몰라도 70개 성상은 결코 짧지 않다. 하물며 일제 식민통치와 뒤이은 남북분단및 동족상잔의 비극, 그리고 산업화와 민주화로 이어지는 과정속에서 70이란 숫자는 의미심장하다. 숱한 사건과 사고가 빈발했고, 수없이 많은 인물이 명멸해간 세월이 아니던가. 올해 창간 69주년을 맞은 전북일보는 내년 6월이면 창간 70주년이 된다. 이에 본보는 매달 한번씩 도내 각계 인사를 만나 지난 세월을 반추하고 향후 전북의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는 코너를 마련했다. 첫번째는 반세기 가까이 언론에 몸담아 온 이치백(90) 전 전북향토문화연구회장이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요즘 근황은 어떠십니까. 백세시대여서 그런지 아직은 건강합니다(웃음). 16년간 맡고있던 전북향토문화연구회 회장직을 최근에 후배에게 넘겼습니다. (사)전북향토문화연구회는 도내 일원의 각종 향토 문화를 조사하고 연구해서 지역문화 발전한다는 기치를 내세웠는데 어쨋든 긴 세월동안 나름대로 전북과 전북민을 위해 하나의 돌탑은 쌓았다고 자부합니다. 또 7월에 유네스코에서 공식 발표가 있을 예정입니다만, 무성서원이 세계유산으로 등재됩니다. 사실 제가 15년간 무성서원 원장을 맡아왔는데 오랫동안 노력해서 결실을 맺는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벅찹니다. △전라도 정도 1000년을 맞아 전북몫 찾기가 화두였구요, 요즘에도 지역사회에서 전북이 과연 어떻게 좌표를 정해야 하는가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흔히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합니다. 그런점에서 오늘날 전북의 좌표를 제대로 설정하고 밝은 미래를 설계하려면 반드시 지난 역사에 대한 철저한 분석과 고민이 필요합니다. 제가 이 자리를 빌어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전북인이여, 필요할땐 반드시 목소리를 내고 늘 도민으로서 긍지를 잃지말자고 말입니다. 90개 성상을 살아오면서 느낀건데요, 지역민들이 좀 오기도 있고 집요한 구석이 있어야만 대우받습니다. 바로 이웃한 전남이나 광주와는 늘 형제처럼 잘 지내야 하지만, 전북이 전남광주의 한 속주처럼 가볍게 취급돼선 안된다는 것입니다. 권리위에 잠자는 자가 보호받는 경우를 본 적이 없습니다. 지방화 시대에 지역민들이 통일된 목소리를 크게 내지 못했을 때 과연 누가 그 지역을 살피겠습니까. △그 연장선상의 얘기입니다만, 한때 전북홀로서기란 말이 있었지요 맞습니다. 3김시대가 한창 기승을 부릴때 저는 전북홀로서기를 주창했습니다. 전북의 대표적 정치인이었던 소석(이철승)이 양김과의 대결에서 패한이후 정치적으로 전북은 급격히 전남광주권에 편입돼 버립니다. 따라서 전북홀로서기가 필요하다는 여론이 있었는데요, 민주대 반민주 구도하에서 자칫 적전분열이 되면 안된다는 여론 때문에 사그라들었지요. 그런데 잘 보세요. 전북몫은 다른 사람에 의해 그냥 주어지는게 아닙니다. △많은 이들은 전북이 과거엔 잘 살았는데 지금은 초라하기 그지 없다고 안타까워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한가지 꼭 집고 넘어갈게 있어요. 과거 경상도는 가난해서 풍족한 전라도 지역에 머슴살이와서 겨우 먹고 살았는데 잇따른 산업화 과정에서 전라도가 소외되면서 역전됐고, 오늘날 전북은 소외의 대명사가 됐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과거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말입니다. 큰 틀에서보면 오랫동안 야당의 길을 걸으며 아웃사이더였던 전북은 늘 관직에서 소외되면서 경상도보다 크게 뒤쳐졌던게 사실입니다. 쌀 위주의 농경사회때 호남에 큰 부자가 많았지만, 경상도 역시 큰 부자가 그에 못지 않았습니다. 일제시대, 또 광복이후 일본 유학생중 전라도보다 영남인들이 훨씬 많았음을 알아야 합니다. 경부선 축을 중심으로 한 산업화 이후에는 두말할 것도 없구요. 한국 100대 기업 오너중 전북 출신이 얼마나 되며, 전경련을 비롯한 재계에 전북인이 몇이나 됩니까" △김대중노무현 정권때 전북 인사들이 반짝 등용됐고, 문재인 정부 들어와서도 크고작은 자리에 도내 인사들의 기용폭이 제법 늘어나면서 지역발전에 대한 기대감도 커졌지 않습니까. 무장관무차관 시절과 비교하면 매우 고무적인 일이지요. 하지만 현 정부가 출범한지 2년이 지난 시점에서 전북 출신 인사중 많은 이가 이런저런 이유로 떠나고 몇 안됩니다. 전북 인사가 등용되면서 금방 세상이 뒤바뀔것으로 도민들은 기대했는데, 고관현직에 발탁된 사람들은 개인의 복지는 달성했는지 몰라도 도민들의 삶은 과거보다 더 팍팍해진게 현실입니다. 굳이 군산경제가 폭망한 일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전북도민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줄고있다는 것은 곧 전북이 주는 매력이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더 분발해야 합니다. △그러면 현 단계에서 지역 지도자들의 역할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제가 하나의 일화를 말씀드릴까요. 1968년 4월 23일자 전북일보 신문 1면에 커다란 호소문 하나가 실렸습니다. 박용상 사장과 진기풍 편집국장 시절인데 당시 저는 부국장겸 정치부장으로서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장을 며칠간 밤새워 준비했습니다. 대략 5개 사항인데 전북인의 과감한 등용, 전군도로 확포장, 향토은행 설립, 호남야산개발 추진, 원광대 종합대 승격이 바로 그것입니다. 결과적으로 5개 사항은 거의 다 실현됐는데요, 제가 언론인으로서 가장 보람된 일로 여기고 있습니다. 삼양사 전주공장을 유치하기 위해 이환의 지사, 은병근 전주시장이 수당(김연수)을 찾아가 읍소한 것을 잘 모를 겁니다. 군산 입주가 기대됐던 LG화학이 구미로 방향을 틀고, 자사고인 상산고를 없애려고 하는 지역 풍토가 개선되지 않으면 전북에 미래가 없습니다. 사막에서 길을 잃으면 늙은 낙타를 따르라는 아랍 속담처럼 시대가 변했지만 지도자들이 더 겸허한 자세로 원로들의 조언을 경청하고 몸을 불살라야 합니다.용두사미로 끝내는 풍토를 없애지 못하면 전북엔 미래가 없습니다. 도민과 지역 지도자 모두에게 하고싶은 말입니다. 아직도 전북엔 시기하고 질투하는 관습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단합하지 못하고 전북인의 긍지를 갖지 못하면 우리가 후배들에게 줄 것이 없습니다. 기업체가 됐든 뭐가됐든전북이라는 명칭이 들어간 것을 도민 스스로 작고 부끄럽게 여긴다면 어느 누가 우리를 제대로 알아주겠습니까. 좀 부족해보여도 지역사회의 인재 키우기도 더 배가돼야 합니다. 이치백 회장은 평생 언론인임을 자부하는 이치백 회장은 1929년 전주에서 태어나 전주 해성초, 이리공고, 원광대를 거쳤다. 도내 언론인중 최초로 성곡언론재단 장학생으로 선발돼 동경대에서 석사학위를 받기도 했다. 25세때 연합신문 기자로 출발, 얼마후 전북일보로 옮겨 편집국장, 주필 등을 지내며 필력을 과시했다. 이후 전라일보 초대 사장을 거친뒤 일선에서 은퇴, 전북향토문화연구회장으로 활동했다. 서울분실장을 3년간 지내기도 한 그는 지역 언론인으로서는 매우 드물게 관훈클럽 감사,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감사 등도 지냈다. 일선에서 활동하면서 겪은 경험담을 파노라마처럼 설파하는 그는 이 시대 최고 원로중 한명으로 꼽힌다. /위병기 문화사업국장 겸 논설위원

  • 기획
  • 위병기
  • 2019.06.02 15:15
기획섹션